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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덫에 걸린 시베리아 불곰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3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닌주의자(Leninist)들을 압도한 레넌주의자(Lennonist) ‘프라하의 봄’이 소련제 탱크에 의해 뭉개져 ‘프라하의 겨울’로 변했지만, 엄혹한 한파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이 짓밟히던 그즈음에 조직된, 체코의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인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의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은 경찰을 피해 다니며 몰래 게릴라식 연주를 하다가, 결국 1976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밴드에 대한 터무니없는 재판은 수백 명의 지식인들을 자극했고, 이들은 1977년 1월 1일 공개된, 이른바 ‘77 헌장’ 선언문에 서명하게 된다. 체코의..

미중의 반도체 전쟁 : 21세기 편자의 못

옛날 영국의 자장가에는 “못 하나 빠져 편자를 잃고, 편자가 없어 말을 잃고, 말이 없어 기수를 잃고, 기수가 없어 전쟁에 지고, 못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24일 바이든 미 대통령은 “못(nail)이 없어서 편자(horseshoe)가 사라졌고, 편자가 없다 보니 말을 잃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왕국이 파괴되었다”면서 컴퓨터와 자동차 등의 생산에 필수적인 반도체(semiconductor)를 ‘21세기 편자의 못’으로 비유하였다. 중국의 반도체 점유율은 15%이지만 급성장하고 있고,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37.5%)은 이미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희토류의 58%를 공급하고, 코로나사태 이후 백신 및 의약품에서도 세계적 지위를 높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

미중 패권경쟁 2021.05.15

경제제재(1)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미국 외교의 양축 : 핵위협과 경제제재 오랜 세월에 걸쳐 경제제재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국가안보에서 핵심적이고 효율적인 도구로 자리잡았다. 달러와 미국의 금융시스템에 대한 사용 및 접근이 차단된 개인과 법인은 국제적으로 경제행위를 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다. 어지간한 국가들에게 미국의 금융제재는 무역전쟁과 같은 충격을 가하고 국가경제가 사실상 봉쇄되는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 외교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양 축은 압도적 능력에 의한 ‘핵위협’과 기축통화(달러)에 기반한 ‘경제제재’라고 할 수 있다. 핵을 앞세운 군사적 대치가 퇴조하면서 제제를 중심으로 한 압박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일부 국가에서 체제전환이나 정책과 태도의 변화를 견인하기도 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얻지 못..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프라하의 봄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2 김태항(정치학 박사) 알코올 중독자들의 창궐 전시(戰時)를 제외하고, 정치적 숙청과 정책적 실패로 스딸린이 집권 30년 동안 죽인 사람들의 숫자는 1년 평균 100만 명 이상을 상회하는데, 스딸린에 버금가는 또 다른 대량 학살자는 보드카였다. 보드카 역시 매년 100만 명 정도의 소련 인민들을 죽였다.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수명이 짧아진 나라는 소련뿐이었다. 일반 노동자들도 술 냄새를 풍기며 일을 했지만, 근무 중 음주 전통은 까게베(КГБ; KGB) 요원들과 정보원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1930년대 스딸린의 대숙청 기간에 본격화된 근무 중 음주는, 당시 고문 기술자들과 처형 담당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날마다 유혈이 낭자..

최장집 교수의 ‘촛불혁명론’ 비판

지난 5월 7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역사적으로 해외에서는 벨벳처럼 부드럽게 성공했다는 의미로 붙여진 벨벳혁명(1989년 체코), 야당후보 유센코의 상징색에서 유래한 오렌지혁명(2004년 우크라이나), 나라 꽃의 이름을 딴 재스민혁명(2010년 튀니지), 로제타스톤에서 이름을 딴 로제타혁명(2011년 이집트) 등이 통용되었다. 그렇다면 2016년~2017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사법처리로 이끈 사건을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을까? 최 교수의 문제제기는 촛불집회 혹은 촛불시위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 집권한 세력 및 ..

백신 국가주의 vs 백신 지재권 유예

코로나 백신 지식재산권 유예에 관한 국제적 논의가 본격화될 조짐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재권 유예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데 이어 미 무역대표부(USTR)의 대표가 성명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이른바 ‘백신 국가주의(Vaccine Statism)’로 인해서 고소득국가들이 글로벌 제약사들과 배타적인 구매계약을 맺음에 따라 백신의 평등한 보급을 위해 만든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의 성과는 미미하다. 인도의 최근 양상은 사실상 생지옥에 가깝다. 옥스퍼드대의 ‘아워 월드 인 데이터’ 등에 따르면 코로나 백신의 80% 가량이 고소득 국가와 중상위 국가에 집중되었고, 저소득 국가는 0.1%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저소득 국가들은 2023년에 가서야 백신 접종이 본격화되고 글로벌 집단면역은..

한반도 중립화 논의(3) 헌법의 침묵과 새로운 접근

1980년대~2020년대 1983년 오란 영(Oran R. Young)은 한반도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중립화되면 국제적 매력을 가질 것이고, 남·북은 외부의 침략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을 중립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1985년 10월 17일 금수산기념궁전에서 김일성 DPRK 주석은 비밀리에 방문한 장세동 안전기획부장과의 면담에서 중립노선과 중립화를 강조했다. 이에 앞서 9월 5일 경기도 기흥에 있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의 별장에서 전두환 ROK 대통령은 비밀리에 방문한 허담 과의 면담에서 조속한 통일의 필요성을 타진하였다. 1987년 그레고리 핸더슨은 방미한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에게 자신을 한국사 연구로 인도한 매쿤(George McCune)이 ‘중도적인 코리아’가 되기를 희망..

한반도 중립화 논의(2) 광복∼1970년대

1945년 광복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중립화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로 중국내전에 관한 대책을 수립한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는 미·소가 철군하면 한반도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의 ‘우측 8원칙’은 남북 및 좌우의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포함했는데, 임시정부가 미국과 소연방(Soviet Union)의 지지를 받으려면 군사적 중립화와 함께 쌍방의 이념적 접근 및 중도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도 미 국무성은 한반도의 ‘비무장중립화’를 검토하였고, 이후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조선과 중·소의 국경지대를 따라 중립 및 안전보장 지대를 설정하는 ..

한반도 중립화 논의(1) 대한제국(1897~1910)

조선의 중립화를 제기한 유길준(1856~1914)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아시아의 인후(throat)로 비유하면서 벨기에의 지정학적 조건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인후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유럽의 벨기에와 같고, 그 국제적 지위로는 중국의 공방이어서 불가리아와 터키의 관계와 같다. 불가리아는 동등지례로 세계 각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갖고 있다. 공방의 반열에서 외국의 책봉을 받는 일은 벨기에의 경우는 없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일이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체세는 실로 벨기에와 불가리아 양국의 전례를 겸하고 있다. 불가리아를 중립화한 조약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를 중립화한 조약..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조롱받는 지도자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스딸린의 적자들 1964년 10월 흐루쇼프의 핵심 측근이었던 브레쥐네프는, 휴가 중이던 흐루쇼프를 정치국 긴급회의에 소환했다. 표결 결과 보직 해임된 흐루쇼프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발적으로 은퇴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한 흐루쇼프는, 상황을 조용히 인정했다. 이후 흐루쇼프는, “아마도 내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와 같은(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결로 저를 제거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 같았으면 그 자들을 모조리 체포했을 것입니다”라고 빈정거리듯 이야기했다. 흐루쇼프가 키워준, 흐루쇼프의 부하이자, 흐루쇼프 축출의 주범인 브레쥐네프는 1906년 제정 러시아의 까멘스꼬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