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브레즈네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조롱받는 지도자

twinkoreas studycamp 2021. 5. 3. 19:48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브레쥐네프(위키미디어)

 

 

스딸린의 적자들

 

1964년 10월 흐루쇼프의 핵심 측근이었던 브레쥐네프는, 휴가 중이던 흐루쇼프를 정치국 긴급회의에 소환했다. 표결 결과 보직 해임된 흐루쇼프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발적으로 은퇴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한 흐루쇼프는, 상황을 조용히 인정했다.

 

이후 흐루쇼프는, “아마도 내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와 같은(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결로 저를 제거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 같았으면 그 자들을 모조리 체포했을 것입니다”라고 빈정거리듯 이야기했다.

 

흐루쇼프가 키워준, 흐루쇼프의 부하이자, 흐루쇼프 축출의 주범인 브레쥐네프는 1906년 제정 러시아의 까멘스꼬예(현재는 우끄라이나 지역)에서 금속노동자의 아들로 입에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야금 노동자로 잠깐 일하면서 기술 교육을 받았고, 1931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스딸린이 1세대 볼셰비키들의 씨를 말릴 때, 빈자리가 많이 나자, 브레쥐네프는 수혜자가 되어 벼락출세를 하게 된다. 이때의 동료들이 나중에 흐루쇼프를 몰아내고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는데, 알렉쎄이 까씌긴(А. Н. Косыгин)의 경우 1939년, 35세의 나이로 섬유산업을 관장하는 인민위원(장관급)이 됐고, 드미뜨리 우스찌노프(Д. Ф. Устинов)는 군수공장 책임자를 거쳐, 33세 때인 1941년 무기 인민위원이 됐다.

 

젊은 나이에, 그것도 스딸린의 대숙청 기간에 초고속 출세를 했으니, 이들이 스딸린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흐루쇼프와는 결이 다른 스딸린의 적자들이었다.

 

브레쥐네프와 호네커(동독 서기장)

 

 

브레쥐네프의 정체

 

소련 및 서구의 역사학자들을 비롯하여,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 역시 ‘정체의 시대(эпоха застоя; 에뽀하 자스또야)’라고 규정했듯이, 브레쥐네프의 집권기는 숨 막힐 듯한 침체의 시대, 스딸린주의의 부활, 무기력과 부정부패의 만연, 알코올 중독자들의 급증 등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물론 소비에트 체제의 귀족집단인 ‘노멘끌라뚜라’에게는 지상천국이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출신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미국·캐나다 연구소장’을 역임한 게오르기 아르바또프(Г. А. Арбатов)는 브레쥐네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브레쥐네프는 반(半) 문맹에 가까운 지적 수준을 보유했고,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읽는 것도 대단히 싫어했다. 그는 실제로 평생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명확한 개인적 특성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편협된 시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정치적 소양 및 지식 부족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스딸린에 관한 정치적 지식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내의 권력게임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도자였다.”

 

우둔함과 노쇠함으로, 소련 사회에서 농담의 표적이 된 브레쥐네프는 1994년에 출간된 자신의 일기에서 자신의 지적 수준과 정체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다촤에 있었다. 점심으로 신선한 채소와 보르쉬(борщ)*를 먹었다. 정원에서 쉬면서 자료를 읽었다. 하키 경기를 보고, 저녁 뉴스를 시청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잤다.”

 

소련군 예비역 대장 출신이자 역사학자인 드미뜨리 볼꼬고노프(Д. А. Волкогонов)는 브레쥐네프의 일기에 대해서 “이것을 읽었을 때 브레쥐네프가 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이끄는 국민이 더 딱하다고 생각되었다.”라고 언급했다.

 

브레쥐네프는 인민들과의 접촉을 꺼렸으나, 사전에 연출된, 초상화까지 동원된 환영 집회를 보면 너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인민들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고 믿었다.

 

점차 브레쥐네프는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확신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통제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미미한 활동으로 인해 훈장도 많이 받지 못했고, 소장 계급을 끝으로 평범하게 군 생활을 마쳤는데, 1976년 서기장의 탄생 70주년을 맞이하여, 국방성에서는 브레쥐네프에게 소비에트 연방 원수의 칭호를 부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방 원수가 되려면 영웅 훈장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후 원수의 제복에 연방 영웅 훈장이 하나씩 매달리게 되었는데, 결국 브레쥐네프는 스딸린과 흐루쇼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메달과 훈장을 받았고, 위대한 조국전쟁의 영웅인 주꼬프 원수보다 더 많은 군사 훈장을 획득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브레쥐네프는 누가 대신 써준 회고록으로 레닌 문학상까지 받았다. 무엇보다도 우스운 일은 브레쥐네프가 직접 자신에게 수여한 수많은 훈장들을, 한결같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명예롭고 공정하게 획득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1974년 몇 차례의 뇌경색에 따른 뇌출혈을 겪은 이후, 알코올 성분의 약물과 담배 등에 의존하면서 그의 어린아이 같은 편집증적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1976년에 재차 심각한 발작을 일으킨 뒤엔, 말이 어눌해졌으며,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워졌다. 사실상 육체와 정신 모두가 망가져서,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에 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1974년 이후 약 8년간, 소련 인민들은 기본적인 업무도 이행하지 못하는, 반쯤은 살아있고 반쯤은 죽어있는, 나약하고 눈물이 많으며, 귀가 얇은 지도자가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영웅 훈장을 주렁주렁 다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브레쥐네프는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와중에도, 수십 채의 다촤(дача; 별장)를 보유했고, 취미는 사냥과 더불어 편집광적인 자동차 수집이었다.

 

 

1990년대 끄레믈 광장

 

 

 

1990년대 끄레믈 광장

 

 

브레쥐네프 정권의 슬로건

 

새로운 지도부는 흐루쇼프 시대의 혼란과 무능, 거짓 약속들을 단죄함으로써 지지를 얻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 등 절대다수의 인민들은 생활 수준이 나름 향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지냈다. 그러나 7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경제 성장이 둔화되자 불평불만이 심화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소련의 귀족들인 ‘노멘끌라뚜라’에게는 그야말로 ‘황금시대’였다. 전체 인구의 2% 이하인 ‘노멘끌라뚜라’의 봉급은 근로자 평균 급여의 거의 25배에 달했다. 이들이 누리는 특권에는 고소득 외에도 고급주택, 특별 상점과 병원, 으리으리한 다촤,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 뇌물에 의한 대학 입학 등이 포함되었다.

 

실제로 소련 당국의 주장과 현실과의 괴리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이 국가의 공식적인 발표를 믿지 않았을 정도로 컸다. 이러한 불신을 야기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발전된 사회주의(развитой социализм; 라즈비또이 싸찌알리즘)’ 노선을 들고나온, 심오한 보수주의자인 브레쥐네프였다.

 

영문 자료에서는 ‘성숙한 사회주의(mature socialism)’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브레쥐네프 정권의 국정기조였다. 그는 “전 인민의 사회인 발전된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평화와 자유, 모든 노동 대중의 평등과 복지가 정착되는 방향으로 전진할 것이다”라면서, “이는 유토피아나 아름다운 환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전망이다”라고 언급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미 사회주의 사회가 성공적으로 창조됐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성과를 굳히기만 하면 된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소련 정치의 특성인, ‘캠페인’ 정치였던 것이다.

 

 

The New Class : An Analysis of the Communist System(Milovan Djilas, 1957)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브레쥐네프의 장밋빛 전망은 ‘노멘끌라뚜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브레쥐네프 시대에는 각종 부정부패, 독직 사건이 만연했다. 브레쥐네프 자신부터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좋은 자리를 나눠 주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소련 사회를 일종의 공산주의 마피아 조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볼셰비키들이 타도했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부산물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이러한 부정부패, 독직 사건은 당과 정부의 탑 레벨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 전체에 널리 만연된 풍조였다. 물론 마피아 조직원에 해당되지 않는 절대다수의 인민들은 삶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알코올이라는 마취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까게베(КГБ; KGB) 의장을 15년간 수행한 유리 안드로뽀프는 누가 부정부패에 연루됐는지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서기장이 되자마자 의욕적으로 이들을 퇴치하고자 했으나, 당과 정부의 상층부 사람들이 거의다가 브레쥐네프가 심은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저항이 워낙 강해서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한 화병 때문인지는 몰라도, 안드로뽀프는 집권 1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사실 안드로뽀프는 집권 15개월 중 절반을 병원과 휴양소에서 보낸 중환자였다.

 

이어 브레쥐네프의 직계이자 충실한 복심이었던 체르녠까(К. У. Черненко)가 서기장이 되자, 부정부패 퇴치 작업은 감쪽같이 사라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체르녠까 자신도 범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안드로뽀프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중절모조차 들고 서 있기가 버거웠던 체르녠까 역시 1년 뒤 안드로뽀프의 뒤를 따라갔다. <계속>

 

* 보르쉬(борщ) : 쇠고기와 비트, 당근, 감자, 양배추 등을 넣고 끓인 수프로 러시아, 우끄라이나, 동유럽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보통 수프 위에 스미따나(сметана; sour cream)를 뿌린 후 먹는데, 술 마신 뒤 해장용으로도 좋다.

 

 

▶ <끄레믈의 서기장들>에서는 소련 시기의 정치사를 서기장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한반도 주변 4강의 한 축이자, 한반도의 접경 국가인 러시아는 트윈 코리아의 하나인 북한을 건설한 당사자이자, 우리에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웃 국가다. 본 연재가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싶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필자의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 필자는 한양대 정외과에서 학사·석사를, 러시아 연방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철학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1998)를 받았다. 귀국 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연구교수 등을 지냈으며, 주요 연구로는 <고려사람, 우리는 누구인가>(번역서), <현대 러시아 정치론>(공저), <현대 러시아학>(공저), “러·일 영토분쟁의 연원”(논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