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브레즈네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프라하의 봄

twinkoreas studycamp 2021. 5. 10. 20:52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2

 

김태항(정치학 박사)

 

 

 

두브첵과 하벨(pinterest.com)

 

 

 

알코올 중독자들의 창궐

 

전시(戰時)를 제외하고, 정치적 숙청과 정책적 실패로 스딸린이 집권 30년 동안 죽인 사람들의 숫자는 1년 평균 100만 명 이상을 상회하는데, 스딸린에 버금가는 또 다른 대량 학살자는 보드카였다. 보드카 역시 매년 100만 명 정도의 소련 인민들을 죽였다.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수명이 짧아진 나라는 소련뿐이었다.

 

루뱐까 광장(Wikipedia)

 

일반 노동자들도 술 냄새를 풍기며 일을 했지만, 근무 중 음주 전통은 까게베(КГБ; KGB) 요원들과 정보원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1930년대 스딸린의 대숙청 기간에 본격화된 근무 중 음주는, 당시 고문 기술자들과 처형 담당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날마다 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고문을 하면서, 불과 얼마 전까지 친구이자, 동료, 상관이었던 사람의 뒤통수 목덜미에 권총을 쏘기 위해서는, 진정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브레쥐네프 시기에는 루뱐까(Лубянка) 광장에 위치한 까게베 본부에서, 대부분의 장교들이 오전 10부터 그 날의 첫 잔을 기울이곤 했다.

 

 

 

브레쥐네프 통치기 동안 소련의 술 소비량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당시 평범한 깔호스(колхоз; 집단농장) 노동자의 가정은, 수입의 30% 이상을 보드카 구입에 지출했다. 물론 이러한 통계는 개별 가정에서 불법적으로 제조하여 마시는 밀주는 포함되지 않은 수치였다.

 

그러나 브레쥐네프 정권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고, 잃을 것은 오직 사슬뿐인 프롤레타리아들을 더욱 착취하기 위해, 오히려 보드카 판매를 늘렸다. 이는 식료품 등 각종 물자 부족에 대해 불평하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말고, 그냥 술에 취해 쓰러져 있으라는, 발전된 사회주의 정권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보드카(위키피디아)

 

실제로 보드카는 국가 재정을 위한 주요 수입원이었고, 국민 생활의 불만을 잠재우는 진정제이자, 체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마취제였다. 그리고 보드카는 소련에서 길게 줄을 서지 않고도 빨리 살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기 때문에, 정권으로서도 보드카의 생산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일례로 1940년부터 80년까지 40년간, 소련의 인구는 35% 늘었을 뿐인데, 알코올 생산량은 무려 7배 이상 증가했다. 이렇듯 소련 인민의 알코올 중독 문제는 국가가 조장한 측면이 컸다. 직접적인 알코올 중독사만 해도 1976년 기준, 미국의 90배에 달했다. 특히 브레쥐네프 통치시기 남성의 기대수명은 1964년 66세에서, 1980년 62세로, 급격하게(dramatically) 감소했는데, 같은 기간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71.5세였다.

 

보드카 크렘린

이렇듯 알코올 중독자가 급증하는 이유에 대해,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반체제 핵물리학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А. Д. Сахаров)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억압 아래서는 생활이 고통스럽고 불만이 많아지며, 또한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생활이 힘들 뿐이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도 없고, 인권이 존중되지 않으며, 항상 비밀경찰에 의해 감시당하고, 언제 잡혀갈지 알 수 없다는 상시적인 공포감, 게다가 오락이 없는 단조로운 생활에 지쳐있는 인민들은, 아무래도 술을 마시면서 울분을 해소하려고 한다. 술을 마시는 것 외에는 울분을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봄(Пражская весна; 쁘라쉬스까야 비쓰나)

 

 

 

노보뜨니(위키피디아)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첫 번째 요인은, 13년간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과 당 제1서기를 겸직한 안또닌 노보뜨니(Antonin Novotný)의 질식할 듯한 스딸린적 억압정치와, 이에 따른 만성적인 경제위기로부터 비롯되었다.

 

제2차 대전 종전 후 스딸린은 소비에트 경제모델을 동유럽 국가들에게 강제 이식했는데,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급격히 하락하였고, 소비재 물품의 부족과 함께 물가마저 급등하게 되었다. 결국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1차 폭발이 일어났고, 프라하에서 2차 폭발을 향한 인민의 분노가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저발전 상태였던 발칸 국가들의 경우 스딸린식 처방이 일부 긍정적 효과(positive results)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독과 체코와 같이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룬(industrialized) 국가들에게 소비에트 경제 모델은, 마치 고성능 PC에 386 컴퓨터 부품을 끼운 것처럼,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프라하의 봄’을 가져온 두 번째 요인은, 대외적 상황변화였다. 1967년 1월 서독과 루마니아가 국교를 수립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동방정책(Ostpolitik)’의 모태가 되었고, 이로 인해 동유럽 지역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더 위키)

 

가장 큰 파도가 몰아친 곳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각종 언론과 방송에서 사회 전반의 민주화 문제, 정치적 다원주의, 소련과의 대등한 관계 설정 요구 등이 적극적으로 개진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브레쥐네프는 1967년 말에 프라하를 방문했고, 인기가 없던 노보뜨니는 개혁적인 두브첵(Alexander Dubček)으로 교체되었다. 체코 출신인 노보뜨니의 노골적인 친체코 정책으로 인해, 슬로바키아 및 기타 소수민족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브레쥐네프는 슬로바키아 출신인 두브첵을 제1서기로 임명했던 것이다.

 

두브첵은 과거 스딸린이 체코에 심어 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소련에서 출생한 엔지니어 출신으로, 유년기와 청년기를 소련에서 보낸, 그야말로 스딸린이 믿을만한, 성분이 좋은 진정한 머스코바이트(loyal Muscovite)*였다. 실제로 두브첵은 성실하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했으며, 소련군의 헝가리침공 사태를 반면교사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스딸린주의의 악습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 과도한 검열의 폐지, 비밀경찰의 권한 축소, 경제 분야에서 시장 자유의 확대, 점진적 자유 선거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두브첵의 개혁 작업은 모스크바의 비잔틴 공산주의자들(the oligarchs of Byzantine communism)의 심기를 거슬렀다.

 

두브첵의 결정적인 오류는 공산주의 국가 역시 민주적일 수도 있다고 순진하게 믿은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개혁 시점도 모스크바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소련에서 보수주의와 네오스딸린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던 것이다. 단적으로 브레쥐네프는 체코의 국경이 소련의 국경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정상화(нормализация положения; 나르말리자찌야 빨라줴니야)’란 용어는 해당 국가에 대한 소련의 통제, 그리고 그 사회에서의 공산당의 신뢰와 통제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상화’는 공공연한 폭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완수되는 것이었다.

 

결국 ‘프라하의 봄’에 활짝 핀 꽃들은 1968년 8월 21일, 소련제 탱크의 캐터필러에 짓뭉개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체코 정부가 쓰나미 같은 ‘민주화’의 물결을 통제하지 못하자, 소련과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수십만의 바르샤바 조약군이 탱크를 몰고 체코를 ‘정상화’ 하기 위해 침공했다.

 

 

브레쥐네프의 제한주권론(principle of limited sovereignty)

 

‘프라하의 봄’의 비극은 전략적 측면에서, 미·소 양국의 이심전심이 통한 결과이기도 했다.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서독과 외교 관계를 맺은 루마니아에 대해 소련이 개입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한 경고를 보냈지만, 체코에 대해서는 이른바 소련의 ‘나와바리(縄張り)’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즉 소련의 영향권 내에서의 안보문제(the needs of Soviet security)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워싱턴은 베트남이라는 블랙홀에 깊이 빠져있었고, 모스크바는 미국과 대등한 핵전력 강화라는 목표 때문에, 미·소간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쌍방 간의 전략적 궁합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1968년 9월 26일, 소련 공산당 기관지 쁘라브다는 사회주의에 이르는 여러 가지의 길을 재확인하면서도, “다만 사회주의 대의의 근본적인 이익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국가에 대해, 사회주의를 보전하기 위한 개입은 소련의 고유한 권리이다.”라고 보도했다. 이른바 ‘제한 주권론’ 또는 ‘브레쥐네프 독트린(Доктрина Брежнева; 닥뜨리나 브레쥐네바)’으로 알려진 이 궤변으로, 브레쥐네프는 거센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루마니아는 체코 침공에의 동참을 거부했고,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이스라엘, 호주, 일본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을 격하게 비난했다.

 

소련 탱크에 의해 ‘프라하의 봄’이 진압되자, 사람들의 이중심리 또는 이중생활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소련과 동유럽 인민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 교리에 겉으로는 복종을 하는 척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믿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소위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구분되는 일본식 ‘혼네, 다떼마에(本音と建前)’ 문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계속>

 

 

*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되었다. 참고로 한국 외교부는 2018년 11월, 공식 영문 트위터에 대통령의 순방국인 체코를 체코슬로바키아라고 표기하는 외교적 비례(非禮)를 범했다가, 네티즌들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

 

* 머스코바이트(Muscovites)는 소련에서 출생했거나, 소련에서 오랜 기간 체류한 사람들 중, 모스크바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를 것으로 기대되는, 정치적 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