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브레즈네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바웬사

twinkoreas studycamp 2021. 5. 31. 22:18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5

 

 

중국의 친미·반소전략

 

마오쩌둥은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당시 발표한 ‘상하이 공동선언’, 그리고 같은 해 일본과의 수교 공동선언에서 소련의 패권주의 저지라는 문구를 명문화하는 데 성공했다. 마오는 닉슨의 방문을 기뻐하면서, 자신의 주치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닉슨은 기탄없이 말하는 아주 솔직한 사람이야. 좌익들과는 확연히 다르지. 닉슨은 나에게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우리와의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고 했어. 이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가? 그는 눈앞에서는 도덕성을 말하면서, 돌아서면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우리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는 것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가?”

 

특히 마오는 1973년 2월 17일 키신저와 회동하면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위도상에 있는 국가들인 미국, 일본, 중국, 파키스탄, 이란, 터어키, 유럽 국가들과의 협력을 추구하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른바 미·일 등 강대국들과 더불어 소련의 접경 국가들과도 손을 잡아, 소련을 봉쇄하겠다는 반소 외교전략이었다.

 

1969년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목을 매던 마오는 1970년 12월, CIA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인 기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를 초청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미국 민주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공화당을 더 좋아합니다. 나는 닉슨의 집권을 환영합니다..... 닉슨이 만약 베이징에 오고 싶어 한다면, 그에게 절대로 외부에 공개하지 말고, 비행기를 타고 와도 된다고 비밀리에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해도 좋고, 그러지 않겠다고 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로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오의 미국 사랑은 일찍이 국공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마오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발언을 했다.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 사회와 정치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미국의 국내 전쟁 시기, 링컨 대통령이 했던 노예해방과 더욱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마오는 소련과의 관계가 경직되자마자 즉각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이와 관련하여,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이 미국보다 소련을 더 두려워하는 한, 중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미국과 협력할 수밖에(impel to cooperate) 없을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른바 삼각 외교(Triangular Diplomacy)의 구도인데, 닉슨과 키신저의 의도는 중국과 소련 간의 교착 상황 하에서, 미국의 협상력(bargaining position)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중·미 관계의 해빙은 양측 공히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미 간의 모순과 차이점은 공통점보다 훨씬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혈전을 벌인 지 20년도 채 안 된 시점에 손을 잡는다는 것은, 역시 이데올로기보다 국가이익이 중요하다는, 적나라한 현실정치(Realpolitik)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아주 작은 키와 줄담배로 상징되는 덩샤오핑(邓小平)은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기에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인식은 덩샤오핑 정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데, 결국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표피적 이데올로기를 끝까지 고수하려 했던 소련은 무기력하게 붕괴했고,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에서도 나타나듯이 실용주의적, 점진적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던 중국은 오늘날 G2로 성장하게 되었다.

 

 

당에 귀속되지 않는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Solidarność)’가 그단스크에서 창설되었다. (Website of the Republic of Poland)

 

 

교황과 자유노조

 

가중되는 외채의 폭증과 경제 악화로 인해, 1980년 폴란드 공산당 정권은 식료품 가격을 전격 인상했다. 그러나 이는 곧 대규모 시위와 파업으로 이어졌고, 이른바 ‘8월 사태’를 촉발하게 되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자 이를 우려한 집권 세력은 ‘8월 타협’, 즉 독립자치노조 연대인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의 탄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에서 최초로 독립된 노동조합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사진 대신 교황의 사진을 내세웠으며, 노래는 ‘인터내셔널’가 대신에 “폴란드는 아직 빼앗기지 않았다”를 불렀다.

 

 

바웬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폴란드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Instytut Pamięci Narodowej)

 

이후 솔리다르노시치(이하 자유노조)는 반체제 저항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며, 폴란드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치면서, 동유럽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특히 1970년 파업 당시 해고되었던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는 ‘8월 타협’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뒤이어 자유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바웬사는 자유노조를 이끌고 점차 정권의 토대를 허물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1년 소련의 압박과 사주를 받은 폴란드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자유노조는 불법화되었지만, 1989년 4월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면서, 다시 합법화되었고, 4개월 뒤인 8월 24일 폴란드는 소비에트 블록 내에서 최초로 비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듬해인 1990년 바웬사는 폴란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사실 1980년 시점에, 폴란드 공산당 세력인 통일 노동당이 유화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폴란드 출신의 교황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78년 10월 16일, 카롤 요제프 보이띠와(Karol Józef Wojtyła)라는 폴란드인이 제263대 로마 교황에 즉위했다. 우리에게는 요한 바오로 2세로 익숙한 새로운 교황은 1522년 이후 최초의 비이탈리아계 교황이자, 슬라브계 혈통의 인물이었다. 히틀러에 이어 스딸린과 그의 계승자들이 폴란드에서 가톨릭 교회를 없애기 위해 성직자 학살 등 갖은 박해를 가했지만, 이제 폴란드가 명실상부한 가톨릭 중심국가가 된 것이다.

 

새로운 교황인 카롤 보이띠와는 배우이자 시인이었고, 극작가이자 운동선수이며 철학자였다.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지만, 26세 때인 1946년 가톨릭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19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될 당시, 폴란드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데, 이는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치였다. 폴란드 공산당은 향후 자신들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마치 저승사자와도 같은 인물을 열렬히 환영한 것이다.

 

불길한 기운을 느낀 안드로뽀프 까게베(KGB) 의장은 바르샤바의 까게베 지부장에게 “당신들은 어찌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시민이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이오?”라고 질타를 했지만, 아무리 조작과 공작의 달인이라는 까게베라 할지라도 교황 선출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요한 바오로 2세

 

1979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르샤바 공항에 내리면서 땅에 입을 맞추는 드라마틱한 장면은 폴란드를 비롯하여,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무신론을 세뇌받은 폴란드 시민 수백만 명이, 유신론의 두목인 교황을 열렬히 환영한 것이다.

 

1981년 1월에는 교황이 자유노조 위원장인 바웬사와 노조 집행부를 로마의 바티칸으로 초청했다. 교황청 미사에서 교황이 공개적으로 자유노조를 지지한다고 언급하자, 수많은 폴란드인이 자유노조에 가입하였다.

 

 

야루젤스키(W. W. Jaruzelski) 군사정권의 등장

 

야루젤스키(위키피디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브레쥐네프와 그의 늙은 동료들은 폴란드의 자유노조 사태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우스찌노프 국방장관을 필두로 끄레믈의 매파는 군사개입 카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자유노조 출범 이후 물러난 기에레크(Edward Gierek)의 뒤를 이어 당 제1서기가 된, 폴란드 군부의 최고 실세인 야루젤스키 대장은 폴란드의 내부 혼란과 소련의 압력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해 있었다.

 

모스크바는 지속적으로 야루젤스키에게 상황을 통제하라고 압박했고, 야루젤스키는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처럼 소련군이 개입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서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전 세계적 비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제2의 프라하를 고려할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브레쥐네프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군사개입 카드를 보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신에 모스크바는 폴란드 군부가 스스로 사태를 ‘정상화’하도록 촉구했다.

 

1981년 12월 13일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구국군사위원회(Military Council for National Salvation)를 출범시켰다. 자유노조는 파괴되었고, 바웬사와 노조 간부들, 반체제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그러나 1년이 채 안 된 시점인 1982년 11월 12일 바웬사는 석방되었다. 나아가 이듬해 10월, 스웨덴 한림원이 바웬사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자, 폴란드 군사정권은 발끈하여 노벨상 위원회에 공식 항의서를 보내는 한편, 수상 소식 관련 언론보도가 최소화되도록 통제를 했다. 계엄령은 이미 1983년 7월에 해제됐지만, 군부 세력의 확대와 함께, 정치 활동(political activities)에 대한 많은 규제는 지속되었다.

 

야루젤스키는 자유노조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바웬사를 제거하지 않았고, 고압적인 구체제(ancien régime)로 복귀하지도 않았다. 사실 바웬사의 자유노조는 자기 제한적(self-limiting) 혁명을 추진했었고, 야루젤스키의 군사 쿠데타 역시 자기 제한적 반혁명(counter-revolution)의 성격을 띠었다.

 

쿠데타 이후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를 강조한 데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야루젤스키는 이른바 이단의 씨를 말리지도 않았고, 가톨릭 교회와의 협상을 추구함으로써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교황의 역할이 컸음은 불문가지이다. 아울러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대해 동독, 루마니아, 체코는 저항했지만, 야루젤스키는 환영했듯이, 폴란드는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러진 이빨을 가진 전체주의 체제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