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4
소련의 베트남이 된 아프가니스탄
‘세계의 지붕’이라는 별칭을 가진 ‘파미르 고원’에 걸쳐있는, 척박한 산악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북쪽으로는 끼르기즈스탄, 우즈베끼스탄, 따쥐끼스탄 등 소비에트 연방이, 서쪽은 이란, 남동쪽은 파키스탄과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소련의 가장 큰 우려는 친미 성향의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사실상 대소(對蘇) 전초기지로 사용하거나, 아프가니스탄이 이란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변질되면서, 북쪽 국경선에 위치한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에게도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1979년 9월 아민이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타라키를 살해하자, 소련 지도부는 개입을 결정했다. 당시 카불 주재 까게베(КГБ; KGB)는 아민과 미국인들의 만남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소련으로서는 미국이 이란에서 상실한 중동에서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NATO가 미국 중거리 미사일의 서독 배치를 결정하고, 미 상원 역시 전략무기 제한협상(SALT II)의 비준을 미적거리자, 소련으로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политбюро; 빨리뜨뷰로)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지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아민과 비밀 접촉을 하고 있다는, 안드로뽀프와 우스찌노프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터의 국가안보 보좌관 출신인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국 측의 역정보(disinformation)였다. 즉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 아민이 충성 대상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바꾸려 한다고 암시하는, 미국이 퍼뜨린 거짓 정보를 소련이 덥석 물은 것이다. 결국 소련 지도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정상화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무덤을 판 격이 되었다.
소련이 침공을 개시하자, 무능한 카터의 유능한 책사였던 브레진스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과 파키스탄이 아프간 반군을 지원토록 하고, 파키스탄의 핵개발도 용인해야 한다고 카터에게 보고했다. 또한 브레진스키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무자헤딘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산악전사들에게 미국 달러와 고성능 무기를 대대적으로 쏟아부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브레진스키와 CIA의 의도대로 소련의 베트남이 되었다.
소련의 무력 침공은 이슬람권의 친소적인 세속주의적 민족주의 정권으로부터도 비판을 받게 되었고, 좌익 세력들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창궐할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아랍어로 ‘성스러운 이슬람 전사’를 뜻하는 무자헤딘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산악지방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과 무기로 무장된 무자헤딘은 소련군을 효과적으로 공략했고, 결국 고르바초프 시기인 1989년 2월,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면 철수하게 된다.
중국의 친미 행보
‘프라하의 봄’ 이듬해인 1969년 3월, 러시아 극동의 하바로프스끄(Хабаровск) 이남, 즉 중국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국경 근처, 우수리강의 작은 섬인 진바오다오(珍寶島, 러시아명 다만스끼; Даманский)에서 소련과 중국 간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다. 이미 두 달 전인 1월에도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3월 2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서 본격적인 무력 대결로 비화되었다. 양측 군인들 간의 사소한 다툼이, 전차와 장갑차 등 각종 중화기가 동원된 전투로 발전되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8월 중순에는 중·소 무력충돌이 극동지역을 벗어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중국 신쨩셩(新疆省)의 경계까지 확대되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해 핵공격까지 할 수 있다고 협박을 했고, 중국은 소련의 공습에 대비하여 대대적인 지하 터널 파기 공사에 돌입했다. 베이징의 지하 터널은 베이징 전체 인민들이 수주일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방공호로 건설되었다. 중·소 양국 간의 긴장감이 고조되던 어느 날 마오쩌둥은 자신의 주치의인 리즈수이(李志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의 북서쪽에는 소련이 있고, 남쪽에는 인도가, 그리고 동쪽에는 일본이 있지. 만약 그들이 모두 단합하여 동서남북에서 공격해 들어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리즈수이가 잘 모르겠다고 하자,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일본 너머에는 미국이 있지 않은가? 우리 선조들은 인접한 국가와 전쟁을 치르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교섭하라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책략을 권하지 않았나?”
이에 리즈수이는 마오에게 “우리의 오랜 적대국인 미국과 어떻게 교섭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마오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답변을 한다.
“미국과 소련은 달라. 미국은 중국의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지, 게다가 미국의 신임 대통령 닉슨은 골수 우익이야. 나는 우익들과 협상하기를 좋아하지. 그들은 겉과 속이 확연하게 다른 좌익과는 달리,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거든.”
흐루쇼프 시절 제기된 서방과의 평화공존 노선에 대해, 제국주의에 굴복한 수정주의적 이단 행위라고 격렬하게 비난한 중국이, 지금은 서방 그것도 제국주의의 수괴라는 미국에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의 아이러니컬한 행보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에도 드러났다. 공산주의 국가라는 중국이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손을 잡고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반공 세력들을 지원한 것이다. 국제정치의 냉혹성과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워싱턴에서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닉슨은 중·소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의 패망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소련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이고, 중국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에 접근하는, 즉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한 미·중 쌍방 간의 전략적 궁합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후 미·중 관계는 1971년의 핑퐁외교,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을 거쳐,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에까지 이르게 된다. 닉슨의 충격적인 행보를 지켜보던 일본은 미국에 앞서 발 빠르게 대만과 단교하고, 1972년 9월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중·소 간 대리전인 베트남의 캄푸치아 침공
소련은 1969년 국경분쟁 이후, 중국을 고립·압박하기 위해 중·소 국경선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했다. 특히 극동함대를 강화했는데, 이는 미·중·일 협력에 대한 반발의 성격도 있지만, 사실상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8년 6월 남예멘의 친소 쿠데타도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쿠데타군은 친중 성향의 루바이 알리 대통령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978년 소련·베트남 동맹 역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베트남은 1978년 12월 25일 성탄절을 기해 친중 국가인 캄푸치아를 침공하여, 불과 2주 만인 1979년 1월 악명 높은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는 사실상 중·소 간 대리전쟁이었다.
격분한 중국은 ‘베트남 징벌’이라는 명목 하에, 30만의 대병력으로 2월 17일 베트남 북부에서 침공을 개시했으나, 오히려 말벌집을 건드린 격이 되었다. 중국의 병력수는 압도적이었으나,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훈련이 잘 된 베트남군과의 전투는 마치 민방위 부대와 특전사 간의 싸움 수준이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군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다분히 공상적인 농민 민병대를 선호한 결과였다. 스딸린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경험이 많은 군 장성들과 장교들의 씨를 말려, 붉은 군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벌집을 잘못 건드려 벌에 잔뜩 쏘인 중국은 침공 20일 만인 3월 6일 철수를 발표했고, 3월 16일 베트남에서 모두 빠져나갔다. 중국의 침공 목표는 우방인 캄푸치아를 점령한 베트남군의 축출이었는데, 베트남은 10년이 지나서야 철군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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