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12

북러 동반자조약 전문 : 군사동맹의 복원

소비에트연방 해체 및 탈냉전 이후 상당히 이완되었던 조선(DPRK)과 러시아의 관계가 1980년대 수준으로 회귀하고 있다. 6월 20일 보도된 양국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 조약’은 1961년 군사동맹 조약에 준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조선은 한반도 전쟁 발발시에 중국(자동개입)에 이어 러시아의 사실상 즉각개입 및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한반도 정세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후 또 하나의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최근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재발 가능성이 심상치 않게 고조되는 추세라고 경고한 바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조약 전문에 따르면, 4조에서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

한반도 전쟁 경고에 담긴 역설 : 갈루치·헤커·프랭크

복잡한 사연을 단순하게 말하면 오해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최근 조선(DPRK)의 대남노선 대전환은 복잡한 사연을 담은 것인데, 이를 어떤 한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올바른 길잡이가 될 수 없다. 국내 언론은 해외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북의 대남전략 변화로 인해 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비상하게 증가했다고 경고한 점을 집중보도했다.  특히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는 공동기고문에서 “역사는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가장 위험한 게임을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국전쟁 전야의 상황을 환기시켰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전쟁을 억지하고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한 우려와 경계가 당연히 필요하고 강조될 필요가 있지만, 실제 원문에 담..

미군 로이 드로이터 유해, 72년만에 귀향

한국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의 최장기 송환기록이 다시 경신됐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의 유해가 4월 22일 미국 메릴랜드주 헤이커스타운에 안장됐다. 미 제7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1대대 소속 로이 드로이터(Roy DeLauter)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으나 당시에 수습되지 못했다. 미 DPAA¹⁾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2018년 7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추가송환 절차에 따라 북측이 넘긴 유해상자에 포함돼 있었다. 미 국방부는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서 4년여만에 신원을 최종 확인했다.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묘지의 실종자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그의 이름 옆에는 로제타(장미문양)이 부착됐다. 이제부터 실종자가 아니라 전사자라는 미 정부의 공식적 표식이다..

6.25 전쟁 : 전쟁외전(3) 미네소타 프로젝트

한국전쟁 당시 피살된 의사는 58명, 납치된 의사는 17명, 피살 혹은 실종된 간호사가 3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의대의 경우에는 주요 학과의 과장 8명이 납북되었고, 수십명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행방불명이 되거나 전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망하였다. 의료요원이 부족해지자 한국 정부는 부산(광복동), 광주(전남의대), 대구(경북의대) 등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여 의대생에 대한 교육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UN 등은 폐허가 된 한국을 복구하기 위한 다양한 원조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이 미군정에서 전후복구를 거쳐서 1961년까지 한국에 제공한 무상원조는 31억 3,730만 달러에 달한다. 이러한 전폭적 지원은 사회주의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

6.25전쟁 : 전쟁외전(2) 실종(MIA), 전쟁범죄, 유해송환

“괴물들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심연도 너를 깊이 들여다 볼 것이다.”(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look to it that he himself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 - 니체 - 세계전쟁이 남긴 네 가지 교훈 2020년 2월에 타계한 이론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J. Dyson)은 평론집 ‘Scientist As Rebel’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을 네 가지로 압축했다. 수학적 재능이 출중했던 다이슨은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 공군본부에서 분석가로 활동했다...

6.25전쟁 : 전쟁외전(1) 포로, 고아, 경계인, 디아스포라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전쟁은 1년여만에 쌍방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주요한 목적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간 연장되면서 사상자수가 50% 가량 더 늘어났다. 첫 1년 동안 사상자수가 200만명이었다면, 나머지 2년 동안 추가된 100만명은 피할 수도 있었던 희생이었다. 지평리~원주전투(1951.1월~2월)에서는 중국군의 참패가 부각되었지만 초기에는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네덜란드 대대를 비롯해서 유엔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미 해병대가 반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네덜란드군 시신을 발견했고, 미 15야전포병대대 소속 128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한국군 사상자는 1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포로와 고아의 문제 전쟁에서 탄환과 포환, 총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굶주림과 정신적 충격,..

6.25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3)

정전협정 후에 김일성 수상은 “미제와 추종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이승만 괴뢰군만을 상대하여 싸웠다면 우리는 벌써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것이다”고 주장했고(1953.10.23. 조선인민군 제256군부대 연설),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녕 조국의 통일은 외세를 등에 업은 일방의 무력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전쟁이라는 수단 자체를 일체의 정치적 수단을 차단시킨 비현실적인 희원적 사고(wishful thinking)의 산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2003). 박명림은 ‘희원적 사고’를 정책 결정자들이 특정의 신념과 가치체계 때문에 자신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만 보고, 그 결과 정보기능의 실패라든가 정책실현 ..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2)

“필자는 이 연구를 진행하며 끝없는 죽임과 시체로 인해 밤이면 자주 가위눌려 헛소리와 땀으로 범벅된 채 잠 못 이루며 집필을 중단하곤 하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이 되어가고, 끝내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죽은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변화된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서문에서, 2002.9) 전쟁의 시작 전날 새벽에 조선인민군 949군부대(의무대)는 전선에 야전병원을 설치하였다.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은 군 일선에 ‘남측의 38선 침범’에 대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한국전쟁은 서해안에서 시작되었다. 내무성 38선 경비여단(최현 소장)이 가장 먼저 옹진반도에 진입했고, 766유격대(오진우 총좌)의 일부 대대가 산악지대와 동해를 통해서 강릉, 삼척, ..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1)

2021년 6월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이다. 조선(DPRK)의 전후세대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선제침공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지적 정직성이 필요하고, 한국(ROK)의 전후세대는 어떤 부분들이 아니라 ‘3년 전쟁’의 전체적 실상에 대한 성찰적 접근이 필요하다. 1994년 옐친(Boris Yelchin) 러시아연방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외교전문들과 중국에서 공개된 문서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공격개시 결정은 조선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전쟁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선제공격을 준비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불리해진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에 동의한다. 소비에트체제 연구자 웨더바이(Kathryn Weathersby)는 소연..

1951년 4월 임진강전투, 가평전투 70주년

2020년에서 2023년까지는 한국전쟁 3년에 벌어졌던 일들이 차례로 7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행사, 올해는 1.4 후퇴 이후 전투와 관련된 70주년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2023년에는 정전협정 70주년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4월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는 영국과는 임진강전투, 호주․캐나다와는 가평전투의 7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951년 : 오산과 미비로 인한 전쟁 연장 1951년이 70년 후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쌍방이 1년에 끝낼 수도 있었을 전쟁을 3년 동안 연장한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1950년 9월 27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조선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최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체제로 한반도를 통일시켜라. 셋째, 소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