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오산과 미비의 전쟁

6.25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3)

twinkoreas studycamp 2021. 6. 7. 23:43

동족상잔의 비극

 

정전협정 후에 김일성 수상은 “미제와 추종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이승만 괴뢰군만을 상대하여 싸웠다면 우리는 벌써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것이다”고 주장했고(1953.10.23. 조선인민군 제256군부대 연설),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녕 조국의 통일은 외세를 등에 업은 일방의 무력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전쟁이라는 수단 자체를 일체의 정치적 수단을 차단시킨 비현실적인 희원적 사고(wishful thinking)의 산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2003).

 

박명림은 ‘희원적 사고’를 정책 결정자들이 특정의 신념과 가치체계 때문에 자신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만 보고, 그 결과 정보기능의 실패라든가 정책실현 과정에서의 장애요인들을 과소평가하며 자신들이 채택한 정책의 성공 가능성만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하고, 그러한 사고는 자신들이 채택한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정보나 경고를 외면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확전 : 제2의 전쟁 전야

 

역사적으로 여름에 시작한 전쟁을 겨울까지 연장하는 공격자는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 나치독일의 패전이다. 그런데 성하의 6월에 전쟁을 일으킨 조선은 겨울을 지나도록 생존하였다. 거꾸로 여름을 지나 가을에 대반전을 이룬 미국과 한국은 그해 겨울전쟁에서 실패하고 1.4후퇴를 맞이하였다.

 

결과적으로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는 한국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기나긴 확전으로 가는 반전이었다. 그 중심에 신생 사회주의국가로 새롭게 등장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있었다.

 

1950년 7월부터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3병단이 동북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7월 말까지 3개 군이 집결하였다. 미군이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동북지역을 견제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이었던 홍쉐즈는 “8월 하순에 미 공군기가 압록강을 넘어서 단둥과 지안까지 기총소사를 했다”고 기록했다(홍쉐즈, 항미원조전쟁회억).

 

홍쉐즈는 동북지역과 인연이 깊었다. 1948년 2월 4일 훙쉐즈가 지휘하는 동북야전군 제6종대가 랴오양을 공략해서 국부군 1만여명을 섬멸하였는데, 이 전투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참가하였다(유연산, 고구려 가는 길).

 

홍쉐즈는 한반도 진입을 앞두고 당 중앙에 “미군이 10월 7일에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고 보고하였고, 이날 B-29 전폭기와 머스탱(Mustang) 전투기가 신의주에 폭격을 가하였다.

 

한국전쟁의 ‘제2 개전’에 앞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는 피아의 장단점을 분석하면서, 미군이 현대적 장비 및 기동성과 막강한 지상화력을 갖추었고 공군과 해군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중국군은 명분과 사기, 야간전·접근전·산악전·백병전의 경험, 경보병의 기동성, 헌신성, 보급의 용이함을 가졌다고 자부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는 이러한 전력분석에 기초해서 전략적으로 지구전을 지향하면서 전술적으로 집중과 우위를 통해서 상대를 격파한다는 기조를 세웠다.

 

실제로 중국은 접근전, 야간전, 속전속결을 전개하면서, 주간이동을 최소화하여 은폐함으로써 공습을 피하고, 야간행군을 통하여 우회 및 후방침투로 육탄공세를 극대화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하였다. 또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미군의 진입을 기다렸다가 역습하였다.

 

10월 19일 미8군 1군단의 3개 사단이 평양을 점령하였고, 조선은 임시수도를 강계에 설치하였다. 이 날부터 20만명에 달하는 중국인민지원군(1진)이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장병들은 인민해방군의 모표 및 흉장을 제거하였고, 장교들은 조선인민군의 복장으로 위장하였다. 마오쩌둥은 전선 지도부에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다.

 

이를테면 “황혼 무렵에 이동해서 다음날 새벽 4시에 행군을 멈추고, 5시 이전에 은폐를 끝내고 철저히 검사하라”는 식이었다. 마오쩌둥의 세심한 지시내용은 인민지원군이 산간지대에 은밀하게 잠입해서 상대를 유입을 기다리다가 일거에 분쇄하는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조건이었다.

 

10월 21일 오전 9시 쯤에 동창 주변의 마을(대동)에서 펑더화이 사령관과 김일성 수상이 긴급회동을 가졌다. 한국전쟁에서 이른바 ‘조중연합사령부’가 등장한 것이다.

 

 

살육전 : 군우리·장진호 동계전투의 비참

 

11월 11일자 타임지는 미군 14만명, 한국군 10만명, 영국군 2만명, 터키군을 비롯한 UN군이 패주하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이후 최악의 군사적 패배라고 평가하였다.

 

군우리전투(1950.11.27~29)는 중국인민지원군 제13병단이 운산~희천 방면에서 총공세를 취하여 미 8군의 선봉부대를 강타한 사건으로 한국군 1·6·7·8사단과 영국군 27여단 및 터키군 여단도 피해가 컸다.

 

특히 터키군의 피해가 막대해서 미 행정부가 본국에 유감과 사과를 표명하였다. 후퇴하는 부대들은 물론이고 2선을 형성하였던 미 1군단과 9군단, 한국군 2군단도 38선 이남으로 총퇴각하였다. 미군이 노획한 소책자들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지휘부는 공군기, 탱크, 대포로 무장한 미군이 기계화의 우위가 있지만 야간전투와 육박전에 취약하다고 분석하였다.

 

실제로 중국군은 산악의 야간전투에서 미군의 약점을 노렸다. 현장 지휘관들은 나팔과 피리를 이용해서 진퇴를 명령하였고, 미군 병사들은 원시적인 신호를 주술과도 같은 낯선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추위와 행군 및 대기로 지쳐가던 미군 병사들은 산세와 지형을 이용하여 후방을 차단하고 전열을 무너뜨리는 중국군의 단순한 방법에 궁지로 몰렸다.

 

페렌바크는 군우리전투가 미국의 전쟁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고,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열정이 피어나려는 시점에 청천강에서 죽여버린 사건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미군의 참패에 대해서 보병훈련의 미비와 같은 전력이 허술함을 지적하면서도 지휘부의 오만과 안이한 판단이 전술의 철저함을 결여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미군의 정규전 군사교범은 중국인민지원군의 단순하지만 변칙적이고 담대한 포위공세 앞에 무기력했다는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 38군이 주도한 군우리전투에서 선발대로 나선 113사단은 위장복도 없이 주간행군을 하면서도 본부와 교신을 단절하고 기도비닉(covert activities)를 유지하면서 14시간만에 72km를 주파하여 삼소리를 선점함으로써 군우리~용원리~삼소리~순천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퇴로를 이른바 ‘지옥터널’로 만드는 결정적 수훈을 세웠다.

 

운명의 밤에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미군의 기선을 제압한 펑더화이 사령관은 ‘38군 만세’를 제창하여 이후로 38군은 ‘만세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11월 24일 맥아더 사령관은 다음날로 예정된 미8군을 비롯한 UN군의 대공세가 전쟁을 종결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공세가 성공하면 평화와 통일이 이뤄지고 UN군의 신속한 철수가 가능해질 것이며, 한국과 한국민은 완전한 주권과 국제적 평등성을 향유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장진호 전역

 

장진호전투(1950.11.27~12.11)는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10개 사단이 미 10군단 및 해병 1사단, 영국 특전대(로얄 41 코만도), 보병 7사단 31연대 전투대대를 섬멸하려는 과정에서 미해병1사단과 혈투를 벌인 사건이다.

 

스미스(Oliver P. Smith) 해병1사단장은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흥남~함흥 방면을 장악하고 북부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찍이 독일의 군사전략가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1개의 부대가 분리되는 것보다 1개의 주(state)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당시 10군단 참모장이었던 러프너(Clark Louis Ruffner) 소장은 훗날 “장진호에서 서쪽으로 진공하라는 맥아더의 명령은 정신 나간 계획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알몬드(Edward Almond) 10군단장의 독촉으로 진격속도를 더 늦출 수 없었던 해병1사단은 7연대 B중대가 장진호의 서북방면 유담리로 깊숙하게 전진하면서 주보급로가 길게 늘어지고 말았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조그만 외딴 집과 마굿간 등에 수 백 명씩 은거하면서 지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쑹스룬

 

쑹스룬 인민지원군 부사령관 겸 제9병단 사령관은 미 10군단을 깊숙하게 끌어들여 섬멸하려고 했다. 미군이 장진호를 향해 올라오면서 진흥리, 고토리, 하갈우리, 유담리에 길게 늘어서면 각개격파하고 황초령 교각을 제거해서 통째로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인민지원군 79사단은 장진호의 왼쪽에서 해병1사단 5연대와 7연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인민지원군 59사단·58사단·60사단·89사단은 유담리에서 덕동고개를 거쳐 하갈우리로 이어지는 서남방면을 에워싸면서 미 3사단 7연대 1대대와 3사단 TF(Dog)을 분리시켜 후방을 차단하려고 했다.

 

인민지원군 90사단은 장진호의 최북단에 포진했고, 80사단·81사단은 수동리 북쪽의 미 육군 7사단 32연대 1대대와 수동리 남쪽의 31연대 3대대를 내리칠 태세를 하고 76사단이 아래쪽에서 받아칠 준비를 하였다.

 

또한 76사단은 77사단과 해병1사단 1연대를 고립시켜 협공하려고 하였다. 장진호와 백두대간의 준령에 의해서 제한된 지리적 조건에서 미 해병대의 대오는 길게 늘어지고 통신마저 원활하지 않아서 합동작전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군과 강아지

 

여러 방향에서 인민지원군의 협공을 받게 된 미 해병대는 해안방면으로 혈로를 뚫고 내려와 상공과 해상을 통한 탈출을 위한 거점(사단본부)을 사수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동북부전선에서 해병대를 선봉으로 기동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8군은 서북부전선에서 압박하거나 적어도 지탱했어야 하는데 11월 25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고, 동북부전선에서 작전이 시작되는 11월27일에는 총퇴각하고 말았다.

 

중국인민지원군 9병단의 6만여명이 민가, 광산, 터널, 계곡 등에서 은신하다가 공격목표로 이동하여 집중의 우세를 꾀하였다. 미 해병의 정찰기들은 저녁 8시에 야간행군을 시작해서 새벽 3시에 은폐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시 야간행군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군기는 세계의 어느 군대와 비교해도 엄정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돌격방식은 국제적으로 인명경시 인해전술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고지를 향해서 부채살처럼 펼쳐진 시신들이 건제(tactical unity)를 유지한 모습은 믿기 어려운 기율과 용맹의 증거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장진호 전역에서 미 해병대와 10군단이 궤멸을 면한 것은 스미스 해병1사단장의 대비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공세에서도 해병 제1공병대대 D중대는 하갈우리 사단본부의 활주로 조성작업을 계속해서 퇴로를 확보하여 부상병 4천여명을 일본으로 직송할 수 있었다.

 

만약 하갈우리 본부가 함락되었다면 유담리 등에 고립되었던 7연대와 5연대는 전멸하거나 투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수 천 명에 달하는 2개 연대의 집단적 투항은 전쟁의 판세를 결정적으로 뒤집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장진호전투에서 해병대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모면하고 10군단의 결정적 위험을 막았기 때문이다.

 

미 해병1사단을 비롯한 미군의 퇴로

 

장진호전투는 과달카날전투·이오지마(유황도)전투와 함께 미 해병대 3대전투로 기록되었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스탈린그라드전투, 레닌그라드전투와 함께 3대 동계전투(winter war)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막대한 인적 손실을 감수했던 중국의 군사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후에 쑹스룬은 마오쩌둥의 군사전략에서 핵심적 전략인 ‘유적심입’(誘敵深入, 적을 영내에 깊숙이 끌어들여 역공)을 펑더화이도 강조했던 예방적 전략개념, 즉 ‘적극방어’로 전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겸 9병단 사령관 쑹스룬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옌안대장정과 중일전쟁에서 활약하였고, 한국전쟁에서 펑더화이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동북부 전선을 지휘하였다.

 

그는 조선에 입경하기 전에 중·대형 포대를 남겨 놓고 소화기,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한 대병력을 험산준령을 넘어 빠르게 이동시켰다. 그는 종렬대오로 북진하는 미군의 주보급로를 12곳에서 절단하고 선봉을 분쇄한 다음에 퇴로의 주변을 포위해서 순차적으로 섬멸하려고 했지만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펑더화이 인민지원군 사령관은 항미원조를 평가하면서 대공 방어력의 미비를 중요한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다. 펑 사령관은 적을 안(본토)이나 주변(조선)에 끌어들여 지구전으로 격퇴하는 방안을 탈피해서 현대적 무기로 예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은 본토 방어에서 선제적 예방전략으로 선회하여 해군력과 공군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하였다.

 

 

UN의 회심 : 휴전 여론의 부상

 

두 전투의 여파로 UN군의 총퇴각과 1.4후퇴를 겪으면서 휴전 여론이 부상하였다. 1951년 2월 UN총회에서 교전행위 중지 및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5월 26일 UN총회 의장 피어슨(Lester B. Pearson) 캐나다 수상은 전쟁종식을 위해서 침략자에게 항복을 요구하지 말고 침략을 저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6월 1일에는 리(Trygve H. Lie) UN 사무총장이 중국과 조선에게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UN 사무총장의 견해에 동의하고, 6월 23일 말리크(Yakov A. Malik) 소연방 UN대표가 휴전을 위해 쌍방이 38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1년만에 UN, 미국, 소연방이 휴전의 필요성에 동의한 것이다.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사령관은 중국과 조선의 사령관에게 해상에서 휴전회담을 갖자고 제안하였고, 이에 대해 7월 1일 김일성 조선인민군 총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개성에서 만나자고 수정제안을 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 8일부터 정전협상이 시작되었지만, 1953년 7월까지 2년 동안 159회에 달하는 회담이 지속되었다. 정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7월부터 정전협정이 타결된 1953년 7월까지 육상에서는 소모적인 고지전이 반복되었다.

 

해상에서는 서해와 동해의 섬들은 미 해군이 장악하고 해상봉쇄 및 보급선 차단, 육지에 대한 포격, 게릴라전 지원 등을 수행하였다. 정전협정 이전에는 서해 5도와 남포에서 가까운 석도 및 초도를 장악하였고, 동해에서는 원산항 전면의 모도, 신도, 대도, 송도, 사도, 웅도, 여도, 황토도, 난도의 제해권을 유지하였다.

 

남일 등 정전협정 북측 대표단

 

 

펑더화이의 ‘멈춤’과 미국의 새로운 전쟁관

 

동계전투의 승리에 탄력을 받은 중국인민지원군은 UN군의 총퇴각을 뒤쫓아 무인지경으로 평양-서울을 점령했고, 미군과 한국군은 전쟁 초기처럼 수원~평택~삼척 저지선(37도선)으로 리셋(reset)이 되었다.

 

여기서 펑더화이는 멈춤을 선택했다. 그가 내건 이유는 병사들의 손실과 피로누적, 공급선의 연장으로 인한 충전의 필요성이었다. 또한 적어도 38선까지 영토를 복구하려는 미국과 한국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남진할수록 더욱 거센 저항을 받으면서 지평리 전투를 비롯한 혈전을 거듭하였고 사상자가 증가하면서 예봉이 둔화되었다.

 

미군의 후퇴에 고무된 소연방의 신임대사와 인민군 내부에서는 끝까지 밀어부쳐 미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반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펑은 전쟁 초기의 낙동강전선처럼 미군이 다시 응축해서 결사저지선을 구축하면 더 이상 밀고 나갈 도리가 없다고 보았다.

 

펑은 38선 이북을 회복하고 서울 점령으로 중국의 힘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간주하였고, UN군이 총반격에 나서자 서울을 내주고 다시 38선을 경계로 저지선을 구축하는 현상유지로 선회했다.

 

1951년 1.4후퇴과 펑의 추격정지 명령을 통해서 한국과 미국, 조선과 중국은 서로 일방에 의한 한반도 통일(독점)을 허용할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과 어느 일방도 그럴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이 미비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펑더화이는 회고록에 '멈춤'(추격정지명령)의 근거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적 기계화부대는 매일 우리가 하룻밤에 추격할 수 있는 거리인 30km씩만 후퇴하였다. 적의 계획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유인하여 자신들의 강력한 진지를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연후 우리가 지친 다음에 우리를 향하여 정면공격을 개시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부대를 우리의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우리의 측방으로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에 들어온 지난 3개월 동안 혹한 속에서 연속 3번의 전역을 치렀다. 우리는 공군력도 없었고 적의 폭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충분한 고사포도 없었다. 적은 주야로 항공폭격과 장거리 포격을 가하였다. 우리 부대는 주간에는 이동할 수 없었다. 또한 지난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충분히 쉬지 못하였다. 그들이 얼마나 피곤하였는가를 쉬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병참선이 길어짐에 따라 보급문제도 매우 어려워졌다. 전투와 비전투요인에 따른 손실로 인해 우리의 병력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재차 공격에 앞서 병력보강, 휴식, 그리고 재정비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Peng Dehuai, Memoirs of a Chinese Marshal - The Autobiographical Notes of Peng Dehuai(1898~1974), 478쪽. 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713쪽 재인용)

 

 

펑의 판단에 대해서는 북방 3각동맹 내부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그의 판단을 존중하고 최고의 전략가로 격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펑의 ‘멈춤’은 전술적 판단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를 미·중의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지정학적 갈등구조를 고려한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를 대변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의 멈춤이 정전협상으로 이어진 것은 미국의 핵 위협 및 확전 경고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한 상황적 산물임과 동시에 미국의 새로운 전쟁관과 맞물린 결과였다.

 

페렌바크(Theodore R. Fehrenbach)에 따르면 미국의 전쟁지휘부 내부에서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전쟁관이 충돌했다(This Kind of War).

 

윌슨-루즈벨트-마샬-맥아더로 이어지는 전통적 관점은 한반도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반면에 애치슨·러스크·브래들리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새로운 위상을 고려하여 사회주의 중국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정의로운 승전’을 중시하는 반면에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서유럽과 일본의 안전보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한국전쟁을 그 하위개념으로 바라보았다.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전되지 않은 것과 38선 복구로 귀결된 것은 상황적으로 펑더화이의 멈춤과 미국의 새로운 전쟁관이 타협한 결과이자, 구조적으로 지정학적 완충지대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하나의 코리아’(One Korea)에 대한 희원적 사고(wishful thinking)에서 비롯된 전쟁의 도발과 확전은 ‘두 개의 코리아’(Two Koreas)를 지정학적으로 강력하게 구조화하고, 반국적(半國的) 국가주의(statism)를 공고히 하는 불가역적(irreversible) 역설을 초래하였다.

 

결론적으로, 한반도국가(남·북)의 내적 전쟁은 동족상잔을 겪지 않은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화를 통한 독립과 동·서독 재통일에 비교되는 천추의 아픔으로 남게 되었고, 동시에 동족상잔의 전쟁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광범한 공감대가 ‘한반도의 국가이성’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정전협정 서명 : 김일성 펑더화이 클라크 남일 해리슨(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

 

 

□ ‘Chosin Reservoir’에 담긴 지정학 : 중국 한자→일본어 독음→미국 영문표기

 

장진호전투에서 생환한 병사들이 드물었다는 뜻으로 ‘Chosin Few’라고 하는데, ‘Chosin’은 ‘장진’의 한자를 일본말로 발음하여 표기한 일본군의 지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미군의 작전지도에는 장진의 한자(長津)를 Chosin(ちょうしん)으로 표기했는데, 장진호에 대한 영문표기(Chosin Reservoir)는 한반도에 투영된 미·중·일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드러낸다.

 

중국과 일본은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청일전쟁에 이어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을 중간에 두고 한반도 북부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일본을 패망시킨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는 동안에 중국 한자를 일본어로 번역해 놓은 지명을 다시 영어로 표기한 지도를 보면서 중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 1952년~1953년 확전 : 고지전투의 영웅들인가, 무고한 희생양들인가?

 

철원~김화~평강의 ‘철의 삼각지’와 피의 능선(Ridge) 등에서 쌍방의 인적 피해가 컸다. 미 종군기자들과 미군 관계자들은 고지쟁탈전이 벌어진 곳에 해리(Harry), 이리(Eerie), 후크(Hook), 폭찹(Pork Chop), 펀치볼(Punch Bowl), 베티(Betti), 벙커힐(Bunker Hill), 볼모(Old Baldy), 티본(T-Bone), 트라이앵글(Triangle), 화이트호스(Whitehorse), 에로우헤드(Arrowhead), 캐피탈(Capital), 크리스마스(Christmas), 잭슨 하잇츠(Jackson Heights), 앵커(Anchor), 박(Bak), 베를린이스트(Berlin East), 베를린(Berlin), 부메랑(Boomerang), 카슨(Carson), 딕(Dick), 엘코(Elko), 한나(Hannah), 하이디(Hedy), 호스슈(Horseshoe), 제인러셀(Jane Russel), 켈리(Kelly), 노리 빅(Nori Big), 노리 스몰(Nori Little), 파파산(Papa-San), 파이크 피크(Pike peak), 퀸(Queen), 리노(Reno), 샌디(Sandy), 스타(Star), 톰(Tom), 테시(Tessie), 론손(Ronson), 나부리(Naburi), 스카치(Scotch), 요크·엉클(York·Uncle) 등으로 무수한 별칭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