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오산과 미비의 전쟁

6.25 전쟁 : 전쟁외전(3) 미네소타 프로젝트

twinkoreas studycamp 2021. 6. 17. 01:23

 

 

한국전쟁 당시 피살된 의사는 58명, 납치된 의사는 17명, 피살 혹은 실종된 간호사가 3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의대의 경우에는 주요 학과의 과장 8명이 납북되었고, 수십명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행방불명이 되거나 전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망하였다.

 

의료요원이 부족해지자 한국 정부는 부산(광복동), 광주(전남의대), 대구(경북의대) 등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여 의대생에 대한 교육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SNUH)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UN 등은 폐허가 된 한국을 복구하기 위한 다양한 원조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이 미군정에서 전후복구를 거쳐서 1961년까지 한국에 제공한 무상원조는 31억 3,730만 달러에 달한다.

 

이러한 전폭적 지원은 사회주의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전략적,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남과 북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각각 미국과 UN, 소연방(Soviet Union)과 중국 등의 대대적인 원조를 받았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이라는 복병(dark horse)을 만나 고전했던 미국은 조선(DPRK)에 대한 봉쇄 및 경제제재와 한국(ROK)에 대한 경제원조를 통해서 ‘한반도 냉전의 최종적 승자’가 되고자 했다.

 

서울대 간호대 이귀향 교수가 미네소타 프로젝트에서 현지 연수를 받기에 앞서 실습복을 전달 받는 장면(미네소타 주립대학)

 

 

체제경쟁의 새로운 시작

 

미국의 지원 중에서도 고등교육 원조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는 한국의 의학 및 의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1954년부터 1961년까지 7년여에 걸쳐 미국의 해외활동본부(FOA, 1955년 국제협력처(ICA)로 개편, 1959년 국제개발처(AID)로 이관)가 미네소타주립대를 주관기관으로 하여 한국 경제의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분야인 농대(농업), 공대(과학기술), 의대(보건의료)를 집중적으로 지원한 사업이다.

 

1950년대 서울대 의대 정문(SNU 사료)

 

이 사업의 경과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전쟁 발발 50년도 더 지난 시점에 이왕준 명지재단 이사장이 2006년 박사학위논문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한국 의학교육에 미친 영향 : The Influence of Minnesota Project on the Korean Medical Education, 2006)’에서 의학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왕준은 1960년대~1970년대 한국 의학계를 선도할 핵심역량을 육성한 것을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하였다. 실제로1950년대 미 행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되고 시대적으로 낙후된 한국 의학의 급격하고 신속한 변화(drastic and rapid change)의 방안을 중심대학의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전국적 파급이라고 보고, 서울대 의대 등을 전략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ICA는 미네소타주립대-서울대(의학·공학·농학), 워싱턴대-연세대·고려대(경영학), 조지 피바디 교육대-교원 및 교사훈련, 시래컷대-공공정보사무소 시청각 프로그램 등의 사업에 착수하였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교육분야의 발전을 대상국가의 총장 및 학장, 평교수에 대한 교육연수 프로그램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교환교수 프로그램, 장비 구입, 건물 및 시설 복구로 구성되었고, 서울대 의대학장, 농대학장, 공대학장에 대한 교환교수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여 평교수들로 확대되었다.

 

미국의 대학들은 자문관을 한국의 대학에 파견하였고, 한국의 대학들은 핵심역량을 미국의 현지 대학 및 교육기관에서 교육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국의 의대에서도 임상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인턴(전공의) 및 레지던트(전임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서울대 간호대 건물 착공식(미네소타주립대)

 

 

교수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전략적 집중

 

의대 부문에서 최초의 자문관으로 파견된 말로니(Maloney)는 한국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급선무는 의사 수의 확대가 아니라 의대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 의사들이 치료사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시 미국 의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성장기였다는 점과 맞물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서 한국 의학이 빠르게 현대의학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기여하게 하였다.

 

이 사업이 막바지에 달하던 1961년 4월 기준 서울대 의대 교수요원의 79%(90명)가 유학을 다녀왔는데, 이 가운데 68명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교환교수 프로그램의 수혜자였다.

 

결론적으로 서울대 의대 교수진과 의대생의 자질과 열의, 미국 자문관과 교육진의 전문성과 헌신성, 의학분야의 표준화된 특성 등으로 인하여 미네소타 프로젝트에서 의학부문이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이왕준,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한국 의학교육에 미친 영향).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은 장기간 원조를 받았던 나라(수원국)에서 1990년대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여러 대륙에 걸쳐 수많은 개발도상국, 저소득국가에 다양한 분야의 원조를 하는 나라(협력국)로 변모하였다.

 

국제협력단(KOICA)을 비롯한 공공부문, 전국의 주요대학 및 대학병원 등 관련 기관, 민간 차원의 각종 해외교류협력단체들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같은 방식으로 수원국의 보건의료 등 전문분야에 대한 핵심역량 육성과 현지 자립화를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