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오산과 미비의 전쟁

6.25전쟁 : 전쟁외전(2) 실종(MIA), 전쟁범죄, 유해송환

twinkoreas studycamp 2021. 6. 9. 15:58

 

 

“괴물들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심연도 너를 깊이 들여다 볼 것이다.”(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look to it that he himself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 - 니체 -

 

 

모리슨 이병(WDIO-TV)

 

 

세계전쟁이 남긴 네 가지 교훈

 

20202월에 타계한 이론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J. Dyson)은 평론집 ‘Scientist As Rebel’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을 네 가지로 압축했다. 수학적 재능이 출중했던 다이슨은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 공군본부에서 분석가로 활동했다.

 

첫째는 전쟁포로(POW)에 관한 제네바협정의 중요성이다. 전쟁포로에 대한 세계적 준칙이 없으면 포로에 대한 학대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제네바협정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포로수용소는 영국군 포로들이 점호를 거부하자 급식을 중단했고,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영국군 포로수용소도 독일군 포로들이 점호를 거부하자 급식을 중단하였다.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국 병사들은 당시 보급 수준이 열악했던 중국인민지원군의 식량을 나눠 먹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귀환한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허약한 포로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숨지는 경우가 많았고, 영양실조에 빠진 포로들은 어쩔 수 없이 떠돌이 개를 잡아 먹기도 했다.

 

둘째는 나치독일의 우월한 전투력을 미화하는 것은 독일 군인들이 군국주의의 산물이란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다이슨은 나치의 군인처럼 경직되고 획일화된 전쟁기계보다 잘 싸우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셋째는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이다. 실제로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국가의 함락에 대응하여 영국이 연대했고, 영국이 고전하자 미국이 가세하였고, 나중에는 소연방(Soviet Union)이 히틀러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일본의 동남아 석권에 대응하여 미국, 영연방(캐나다 포함), 프랑스, 중국, 영연방의 호주와 인도 등이 연대하였다.

 

넷째는 전쟁의 대의명분과 전쟁수행에서 벌어진 일이 커다란 괴리를 드러냈다는 점이다전쟁수행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는 전쟁포로, 사망자의 처리 및 유해송환, 부상자, 실종자(MIA),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폭격, 가족의 해체와 고아, 소년병,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전쟁범죄 등이다.

 

 

전쟁범죄 : 중국인민지원군의 경우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민간인 오폭, 오인사살, 포로 등에 대한 학살, 부녀자 강간 등 전쟁범죄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함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지옥의 기록'이다. 수많은 기록과 증언, 체험에 의해서 드러난 인간성 파괴의 처참함을 다시 열거하는 것은 여기서 생략한다. 다만 몇 가지 특이점 중에서 중국인민지원군에 관한 내용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참전군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민지원군이 남쪽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거나 들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인민해방군의 기율이 어느 정도 엄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대 기율은 기본원칙을 강조했다. 1) 일체의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2) 인민들의 물건은 한 개의 바늘, 한 가닥의 실이라도 갖지 않는다. 3) 일체의 노획은 나라에 바친다. 8항 주의는 좀더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담았다. 1) 인민에 대한 말은 부드럽게 한다. 2) 물건은 공평하게 사고 판다. 3) 빌린 물건은 돌려주어야 한다. 4) 물건을 깨뜨렸으면 배상해야 한다. 5) 사람을 때리고 욕하지 않는다. 6) 경작물을 손상하지 않는다. 7) 부녀자들을 희롱하지 않는다. 8)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인민군이나 미군 혹은 한국군에 비해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율을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전쟁자료가 발굴되었지만 민간인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의 학대, 학살, 강간 등 전쟁범죄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실종과 유해송환

 

미 육군 제24보병사단 제34보병연대 1대대 B중대 1소대 소속의 모리슨(Edward M. Morrison, 1930~1950) 이병은 한국전쟁 초기에 전사하였다.

 

1949년 데파두아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입대한 모리슨은 평택 전투에서 숨졌는데, 위스콘신주에서 최초의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그의 유해는 19514월 부산 유엔군묘지(UN military cemetery)에 가매장했다가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에 안장되었다. 그 이후에도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다가 2019년에 유골의 주인공이 밝혀지면서 7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해병1사단 5연대 군의관 리트빈은 ‘그렇게 많은 나이 어린 해병들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 일생에 가장 마음 아픈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전쟁터에서 그렇듯이 숨져가던 어린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에 엄마를 찾았다. 1950년 12월 2일 중화기중대의 기관총 대원이었던 18세 일병은 한반도 북단의 황량한 겨울산에서 멈추어섰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 이상 행군을 거부했다. 선임병들이 누워서 버티는 그를 폭스힐(Fox Hill)의 구급실로 옮겼지만, 그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3시간만에 숨졌다.”(마틴 러스, 브레이크 아웃(임상균 역), 재구성)

 

 

 

“한국전쟁은 결국 고아원을 만들기 위해 발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고아가 많이 생겨났다. 싸울 것을 준비하지 않은 국민은 패배할 도덕적인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고, 제한된 유혈 지상전에 대하여 군인과 시민이 마음을 준비하지 못한 채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범죄적인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다.”(T.R. Fehrenbach, This Kind of War).

 

1953년 미군의 전선 지휘부는 한국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거의 범죄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뚜렷한 전략적 이득도 없이 본국에서 온 젊은 병사들이 죽거나 신체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시신 운송 : 전사자에 대한 규범의 문제

 

재미동포 한준석은 193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시기에 군에 입대했다. 그의 부대는 낙동강전투에서 패퇴하고 산악지대로 도피한 조선인민군을 수색하면서 백운산과 지리산 일대의 토벌작전에 참여하였는데, 당시에 겪은 참담한 일을 후대에 전했다.

 

“산 속에서 발견한 인민군 장교로 보이는 시신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이송이 어렵게 되자 한국군 장교가 시신의 목을 자를 것을 지시했다. 병사들이 주저하자 한 사람을 지목해서 목을 자르게 했지만, 자른 목을 누가 들고 갈 것인가를 놓고 병사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목을 자른 병사가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잘랐으니 제가 갖고 가겠습니다.”(미국 북텍사스 이북도민회, 집으로 : 6.25전쟁 수기집).

 

미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최대 8만 3천명 이상의 미군이 실종되었고, 5천 5백명은 38선 이북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명살상을 중지시키는 휴전이 지체된 것은 북방 3각동맹(조, 중, 러)의 이해가 엇갈린 점도 작용했다. 피폐해진 조선과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38선 이북을 확보하자 휴전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였지만, 스탈린과 소연방(Soviet Union)의 생각은 상당히 달랐다.

 

소연방(Soviet Union)은 제한적인 전쟁을 지속해서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둠으로써 미국의 힘을 소진시키고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여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한국전쟁의 지루하게 연장됨으로써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이해상충을 촉발할 수 있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미군의 전쟁수행 방식을 관찰하고 포로심문 등을 통해서 각종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52년 8월과 9월에 주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은 두 차례 소연방을 방문해서 휴전한 다음에 포로문제 등을 협상하자고 제안하였고, 1952년 10월 인도가 포로를 자국을 비롯한 중립국으로 보내는 결의안을 UN에 제출하자 중국은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조선은 1954년에 2234구의 미군 유해를 송환하였고, 1988년 12월 유해송환협상과 1993년 미군 유해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서 유해 발굴 및 송환을 지속해 왔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양국은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229구의 유해를 추가로 발굴했다. 2018년 싱가폴 정상회담 이후 유해송환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