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13

한반도 중립화 논의(2) 광복∼1970년대

1945년 광복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중립화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로 중국내전에 관한 대책을 수립한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는 미·소가 철군하면 한반도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의 ‘우측 8원칙’은 남북 및 좌우의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포함했는데, 임시정부가 미국과 소연방(Soviet Union)의 지지를 받으려면 군사적 중립화와 함께 쌍방의 이념적 접근 및 중도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도 미 국무성은 한반도의 ‘비무장중립화’를 검토하였고, 이후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조선과 중·소의 국경지대를 따라 중립 및 안전보장 지대를 설정하는 ..

한반도 중립화 논의(1) 대한제국(1897~1910)

조선의 중립화를 제기한 유길준(1856~1914)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아시아의 인후(throat)로 비유하면서 벨기에의 지정학적 조건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인후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유럽의 벨기에와 같고, 그 국제적 지위로는 중국의 공방이어서 불가리아와 터키의 관계와 같다. 불가리아는 동등지례로 세계 각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갖고 있다. 공방의 반열에서 외국의 책봉을 받는 일은 벨기에의 경우는 없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일이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체세는 실로 벨기에와 불가리아 양국의 전례를 겸하고 있다. 불가리아를 중립화한 조약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를 중립화한 조약..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조롱받는 지도자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스딸린의 적자들 1964년 10월 흐루쇼프의 핵심 측근이었던 브레쥐네프는, 휴가 중이던 흐루쇼프를 정치국 긴급회의에 소환했다. 표결 결과 보직 해임된 흐루쇼프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발적으로 은퇴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한 흐루쇼프는, 상황을 조용히 인정했다. 이후 흐루쇼프는, “아마도 내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와 같은(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결로 저를 제거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 같았으면 그 자들을 모조리 체포했을 것입니다”라고 빈정거리듯 이야기했다. 흐루쇼프가 키워준, 흐루쇼프의 부하이자, 흐루쇼프 축출의 주범인 브레쥐네프는 1906년 제정 러시아의 까멘스꼬예(현재..

중견국가(2) 미들 파워의 정의와 믹타(MIKTA)

지구상에는 강대국도 아니고 약소국도 아닌 중간지대에 다양하고 광범한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국제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힘을 가진 국가들을 중견국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중견국가의 정의는 명확하게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지만 그 뉘앙스는 국내에서 쓰이는 중견기업, 중견작가라는 말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중견은 단순히 중간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과 상당한 역량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0년 코로나사태의 초반기에 한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차별화된 퍼포먼스와 일정한 성과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방역 및 보건의료에서 기존 강대국들에 비견되는 국가로 부각된 바 있다. 이처럼 중견국의 특정한 기능을 강조하여 중개국, 글로벌 스윙 국가(global swing states)로 부르기도 한..

4.27 선언 3주년과 뫼비우스의 띠

김병규(트윈코리아연구소장) 1.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선언의 특징 1) 1․2차 정상회담과의 차이점과 한계 4.27 선언은 조선의 ‘2017년 핵무력 완성 공표’라는 중대한 변화를 반영하여 6.15선언과 10.4선언에서 부각되지 않았던 ‘한반도 비핵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비핵화와 연계해서 평화체제를 구체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각자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 등 이밖에도 상호 불가침과 적대행위 전면중지 등을 재확인하였고 경제협력..

끄레믈의 서기장들(Ⅰ) : 흐루쇼프의 실각

니끼타 쎄르게이비치 흐루쇼프(Н. С. Хрущёв) 4 김태항(정치학 박사) 중국과의 관계 악화 스딸린이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자신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공산주의 지도자라고 자부했다. 물론 흐루쇼프는 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한 살 어린 흐루쇼프를 무례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단지 벼락 출세한, 천박한 자로 취급했다. 특히 흐루쇼프가 사전 예고도 없이 스딸린식 ‘개인숭배’를 비난하면서, 전 세계 공산당원들에게 개인숭배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했다는 소식은 마오쩌둥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후 흐루쇼프는 마오를 달래기 위해,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는데, 마오는 흐루쇼프에게 “날씨도 더우니 수영장에서 회담을 하자”라고 제안했다. 마오는 양쯔강을 단숨에 헤엄쳐 건너갈 정도로 수영의 달인이었으나..

무히딘 야신 말레이시아 수상의 건설적 관여론

4월 24일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를 계기로 하여 미얀마사태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관여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무히딘 야신 말레이시아 수상이 미얀마 군부가 외부의 관여를 차단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던 ‘내정 불간섭 원칙’에 대응하여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론'를 적극적으로 피력한 대목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미얀마의 폭압적 사태는 더 이상 내정간섭이나 주권제한이라는 방패막으로 주변국과 국제사회의 관여를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조명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무히딘 야신, ‘건설적 관여'의 정당성 설파 동남아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이번 정상회의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무히딘 야신(Muhyiddin Yassin) 말레이시아 수상이다. 그는 미얀마사태에 대해서 아세..

1951년 4월 임진강전투, 가평전투 70주년

2020년에서 2023년까지는 한국전쟁 3년에 벌어졌던 일들이 차례로 7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행사, 올해는 1.4 후퇴 이후 전투와 관련된 70주년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2023년에는 정전협정 70주년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4월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는 영국과는 임진강전투, 호주․캐나다와는 가평전투의 7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951년 : 오산과 미비로 인한 전쟁 연장 1951년이 70년 후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쌍방이 1년에 끝낼 수도 있었을 전쟁을 3년 동안 연장한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1950년 9월 27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조선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최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체제로 한반도를 통일시켜라. 셋째, 소연방(..

중견국가(1) : 경항모 도입과 무위

한국의 군사적 수준은 어느 정도가 합리적일까? 한국 군대의 전략자산은 어느 수준까지 추구하는 것이 적당한 것일까? “조선의 명백한 핵무장 이전에는 조선의 전사적 협상윤리(warrior negotiation ethics)에 기초한 벼랑끝 외교(diplomacy of brinkmanship)와 한반도 지정학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조건에서 한국의 패리는 불가피성과 정당성이 존재한다. 한반도 국가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외교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국가의 평화라는 실리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핵무장이 고도화되는 시기(2017년~2020년)에도 이러한 패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70년 전 한국전쟁과 같은 동존상잔(fratricidal war)을 다시 반복..

끄레믈의 서기장들(Ⅰ) : 흐루쇼프의 명암

김태항(정치학 박사) 니끼타 쎄르게이비치 흐루쇼프(Н. С. Хрущёв) 3 스딸린교 광신도의 이단 행위 1956년 2월, 소련과 세계 공산주의 역사에서 전환기적 의미를 지니는 쇼킹한 사건이 발생했다. 해외 55개국의 공산당 대표들도 참석한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스딸린의 ‘자본주의 포위론’과 ‘전쟁 불가피론’을 비판했는데,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아울러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을 따라야 한다는 스딸린주의를 부정하면서,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을 설파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장면은 당대회 마지막 날, 흐루쇼프가 스딸린의 전제정치와 강요된 개인숭배, 신격화를 맹렬히 비난했다는 것이다. 스딸린교의 열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