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흐루쇼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Ⅰ) : 흐루쇼프의 실각

twinkoreas studycamp 2021. 4. 26. 22:58

 

 

니끼타 쎄르게이비치 흐루쇼프(Н. С. Хрущёв) 4

 

김태항(정치학 박사)

 

 

 

 

흐루쇼프 묘지(위키피디아)

 

 

 

 

 

중국과의 관계 악화

 

스딸린이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자신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공산주의 지도자라고 자부했다. 물론 흐루쇼프는 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한 살 어린 흐루쇼프를 무례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단지 벼락 출세한, 천박한 자로 취급했다. 특히 흐루쇼프가 사전 예고도 없이 스딸린식 ‘개인숭배’를 비난하면서, 전 세계 공산당원들에게 개인숭배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했다는 소식은 마오쩌둥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후 흐루쇼프는 마오를 달래기 위해,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는데, 마오는 흐루쇼프에게 “날씨도 더우니 수영장에서 회담을 하자”라고 제안했다. 마오는 양쯔강을 단숨에 헤엄쳐 건너갈 정도로 수영의 달인이었으나, 흐루쇼프는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다. 흐루쇼프는 구명대를 걸치고, 물개처럼 헤엄쳐 다니는 마오를 따라다니면서 “미사일 한 두발이면 중국군을 거의 격파할 수 있다”라고 떠들었으나, 마오는 흐루쇼프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돌아간 후, 마오는 흐루쇼프의 비밀 방중을 전 세계에 공개했다.

 

마오쩌둥과 흐루쇼프(위키피디아)

 

여하튼 흐루쇼프의 스딸린 격하 이후 불거진 중·소간의 갈등 조짐은, 1958년 중국의 ‘대약진 운동’이 전개되면서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고, 1960년부터는 이념적 갈등이 루비콘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른바 30년 중·소 냉전(cold war)이 시작된 것이다.

 

1958년, ‘대약진 운동’에 따른 국내 경제의 파탄으로부터 인민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중국이 대만의 영토인 금문도, 마조도를 포격하자, 소련은 중국의 모험주의자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특히 소련은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 엄청난 분쟁을 야기할 것이라고 확신, 1959년부터 중국에 대한 핵무기 개발 지원을 전면 중단했다. 이듬해 소련은 중국에서 핵 전문가들을 모두 소환했고, 원조도 중단했다.

 

이와 관련, 1960년대 초, 다음과 같은 오싹한 이야기가 모스크바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핵전쟁의 공포에 대해 마오는, “그렇습니다. 핵전쟁이 발발하면 중국인 2억 명, 소련인 2억 명, 미국인 2억 명이 죽겠지만, 그래도 중국에는 6억 명이나 남아 있겠죠”

 

1962년 중국·인도 간의 국경분쟁이 벌어졌을 때, 소련이 인도를 지지하자 중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소련의 투항주의적 자세에 대해 중국은 흐루쇼프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과거 스딸린으로부터 ‘마가린(Margarine) 공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는 등 여러 차례 하대를 받았던 마오쩌둥은 스딸린을 싫어했지만, 스딸린의 통치방식은 환영했다. 마오는 객관적인 현실을 무시하는 지독한 주관주의자였다. 동양의 스딸린이자 히틀러였으며, 황제이자 니체적 초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전쟁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3억 명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전쟁은 전쟁입니다. 전쟁의 날들은 흘러갑니다. 나무는 자라고,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물고기들은 여전히 물속을 헤엄칠 겁니다.”

 

1958년 ‘대약진 운동’ 기간 중에 벼의 낱알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고 격분한 마오쩌둥이 “참새야말로 유해조류다”라고 지적하자 중국 전역에서 참새의 씨가 말랐다고 한다. 곤충을 잡아먹는 천적이 사라지자 농경지에서는 각종 해충들이 창궐하면서 대흉년을 초래하여 1959년에만 약 4천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미·소 데땅트(Détente)의 도래

 

1962년 4월에 흐루쇼프는 국방장관인 로지온 말리노프스끼(Р. Я. Малиновский) 원수로부터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이 10분 안에 모스크바를 강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흐루쇼프는 미국으로부터 불과 65km 떨어진 섬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여 큰 비용 없이(Cost effective) 전략 핵무기의 세력균형, 즉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이루고자 했다.

 

케네디는 여러 가지 대응 방안들을 고려했으나, 진주만 기습공격처럼 미사일 기지를 분쇄하는(pulverizing) 것은 대안에서 제외했다. 케네디는 섬에 더 이상의 소련제 탄두가 반입되지 않도록 쿠바 봉쇄를 지시하였다.

 

이후 흐루쇼프는 미국이 섬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케네디 역시 쿠바를 공격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흐루쇼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한 케네디는 터키에서 미국 미사일들을 제거하라는 흐루쇼프의 요청을 수락했다. 마치 두 사람이 가파른 절벽의 낭떠러지로 달려가다가 갑자기 겁에 질려 뒷걸음친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전후 냉전기 미·소 간에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핵전쟁의 위기를 경험한 양국이 대결보다 협상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1963년 6월 20일 미·소 양국은 모스크바와 워싱턴을 잇는 ‘핫 라인(hotline)’ 설치에 합의했고, 8월에는 ‘부분 핵실험 금지조약(the Partial Test-Ban Treaty)’이 미·소·영 3국 사이에 조인되었다.

 

 

동아일보 헤드라인

 

 

흐루쇼프의 실각

 

1964년 10월 5일, 흐루쇼프는 ‘영구 휴가(permanent vacation)’에 들어가게 된다. 흐루쇼프의 갑작스러운 실각이 서구에서는 충격이었지만, 소련 정치권에서는 예견된 사건이었다. 이미 흐루쇼프는 자신을 둘러싼 두 번의 궁정 쿠데타 음모 경고를 보고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사실 서구와의 평화공존,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 농업 및 소비재 산업의 강화는 말렌꼬프가 제시한 정책들이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흐루쇼프는 중공업 중심을 강조했지만, 그 역시 말렌꼬프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곧 국방예산 삭감을 초래하면서 군부 강경파들의 득세 요인이 되었다. 아울러 제국주의 진영의 수괴인 미국과의 데땅트 추구, 그리고 중국과의 이념적 경쟁구도 전개는 이데올로기적 원리주의 세력들의 분노를 야기했다.

 

국내적 요인으로 흐루쇼프가 농업전문가임을 자처했지만 무분별하고 즉흥적인 개혁으로 역효과를 초래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시베리아의 처녀지 개간 소동, 옥수수 심기 운동의 실패에 이어서 1963년에는 대흉작으로 외국에서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흐루쇼프는 이와 관련해서 “동무들! 최근 소련 과학의 기적은 우끄라이나에서 밀을 파종하여 캐나다에서 수확한다던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설상가상으로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에 도시 인구는 16%나 증가한 반면에 농업 생산량은 6.6%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이에 흐루쇼프는 생산 단가를 현실화하기 위해 육류와 버터 가격을 인상했지만, 이는 인민들의 폭동을 유발했고 시위대를 향한 군의 발포로 비무장 시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흐루쇼프의 실각 이유가 무례함, 주의 산만, 오만, 과대망상, 예측 불가능이었듯이 그는 정책 결정에 있어서 전횡과 방종으로 많은 충돌과 혼란을 야기했다.

 

일례로 모스크바 농업 대학의 몇몇 교수들이 흐루쇼프의 농업정책을 비판하자, 발끈한 흐루쇼프는 대학을 모스크바로부터 퇴거하라고 명령했다. 이유는 “농업 대학이 도심지의 아스팔트 위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소련 통계국 관리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똥으로 총알도 만들어낼 인간들이다”라고 규정했다.

 

흐루쇼프 시대의 배급행렬(Quora.com)

 

그가 1964년 개최된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에서 “두 번에 걸친 5개년 계획기간 동안(자신의 재직 기간 동안) 곡물 생산은 77%, 육류는 두 배, 우유 76%, 버터 82%의 생산증가를 가져왔다”라고 보고했을 때 빵 배급표를 받아 들고 오랫동안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많은 사람들은 분노를 느꼈다.

 

당시에 국영 마가진(магазин ; 상점)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결국 전 공화국 사람들은 부족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몰려왔고, 이들이 타고 돌아가는 열차 주변에서 소시지 냄새가 진하게 풍기자 사람들은 이를 소시지 열차라고 불렀다.

 

흐루쇼프는 용기 있게 스딸린의 대학살과 폭정을 공개했고, 정치적 해빙의 물꼬를 텄다. 1962년에는 핵전쟁을 유발할 수 있었던 위기로부터 현명하게 후퇴하면서 냉전의 한 축이었던 미국과의 평화공존의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는 점점 허영심이 강해졌고 아첨에 약해졌으며, 사람들의 조롱을 야기한 개인적 성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실각 후 야인 시절에 흐루쇼프는 식사나 여자, 보드카로부터는 초월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부족한 것은 오직 권력뿐이었다고 언급하곤 했다.

 

1971년에 흐루쇼프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강경 보수세력의 일원이자 고르바쵸프와 서기장 자리를 두고 경쟁을 했던, 즉 흐루쇼프와는 정치적 정향(political orientation)에서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정치국원 출신의 빅또르 그리쉰(В. В. Гришин)은 흐루쇼프에 대해 “비록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으나, 그는 조직의 달인이었고 엄청난 지혜를 보유했으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끝없는 열정과 용기를 겸비한 혁신가였다.”라고 회고했다.

 

 

<흐루쇼프 끝>

 

 

▶ <끄레믈의 서기장들>에서는 소련 시기의 정치사를 서기장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주변 4강의 한 축이자, 한반도의 접경 국가인 러시아는 트윈 코리아의 하나인 북한을 건설한 당사자이자, 우리에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웃 국가다. 최근 한국의 외교에서 러시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끄레믈의 서기장들>이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싶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필자 김태항은 러시아연방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철학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1998)를 받았고,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주요 연구로는 <고려사람, 우리는 누구인가>(역서), <현대 러시아정치론>(공저), <현대 러시아학>(공저), “러·일 영토분쟁의 연원”(논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