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흐루쇼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Ⅰ) : 흐루쇼프

twinkoreas studycamp 2021. 4. 5. 17:54

끄레믈의 서기장들

 

김태항(정치학 박사)

 

 

 

1. 니끼타 쎄르게이비치 흐루쇼프(Н.С.Хрущёв)

 

흐루쇼프는 1953년 3월 스딸린 사망 후 스딸린의 참모 진영에서 조용히 권력의 정점에 섰다가, 1964년 동료들과 자신의 핵심 참모들에 의해 조용히 숙청을 당한 독특한 인물이다.

 

 

흐루쇼프(사진=더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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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역사에서 정치적 격변에 따른 동료들 처형이라는 유혈 숙청의 악습을 없앤 최초의 인물이다. 물론 말렌꼬프와 손잡고 베리야(Л.П.Берия)는 처단했지만, 자신이 숙청한 나머지 세력들은 죽이지 않았다. 한직에 떠돌게 하다가 당에서 축출했을 뿐이다. 이래서인지는 몰라도 흐루쇼프 역시 실각당할 당시 투표를 통한 무혈 궁정쿠데타에 의해 신사적인(?) 방식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흐루쇼프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소련의 역대 서기장 중 가장 무식하고, 교양이 없으며, 술고래에다가 허풍쟁이, 익살스러운 광대, 공산주의 독재자의 모습을 두루 갖춘 것이었다. 물론 흐루쇼프가 키워준 브레쥐네프(Л.И.Брежнев) 역시 반문맹이었지만, 무식함에 있어서는 흐루쇼프가 한 발 더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흐루쇼프는 30살이 되어서야 겨우 러시아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흐루쇼프나 브레쥐네프 같은 인물들이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스딸린이었다. 스딸린은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대숙청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구 볼셰비키들을 제거하였다. 자연사한 볼셰비키들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씨를 말렸던 것이다.

 

인찔리겐찌야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혁명 세대를 쓸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심었다. 이들 상당수가 비천한 출신들로서 당의 과거 역사를 잘 알지 못했고, 오직 스딸린만을 위한 반려견, 경비견, 사냥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들은 이후 소비에트연방의 특권계층인 노멘끌라뚜라로 등장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국가의 소멸과 무계급 사회를 지향하는 소비에트연방에서 국가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고, 소수의 상류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스딸린과 흐루쇼프(사진=위키피디아)

 

여하튼 열렬한 스딸린주의자였던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평화공존을 언급, 소련공산당 교리를 위반하는 이단성 발언을 했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은인이었던 스딸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하였다.

 

이로 인해 수정주의 논쟁과 더불어 중․소분쟁이 본격화되었고, 티토의 독자노선 등장 등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도 이완되었으며, 스딸린 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인 북한과의 관계에도 금이 가게 되었다. 특히 소련 내 공업과 농업 분야의 생산성 감소에 따른 경제 악화, 당 기구 강화에 따른 정부 관료들의 불만,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의 미국에 대한 양보 등으로 소련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흐루쇼프의 재임 중인 1957년 8월 세계 최초로 ICBM 발사 성공, 같은 해 10월 역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뿌뜨닉 발사 성공, 1960년 5월에는, 그동안 소련 상공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녔던 미국의 고고도 전략 정찰기인 U2기를 격추함으로써 지대공 미사일의 성능을 전 세계에 알렸고, 1961년에는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는 등 지대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는 실각하게 된다.

 

 

 

흐루쇼프와 김일성(사진=RFA)

 

 

 

 

 

결국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끄림 반도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동안, 소련공산당 최고회의 간부회는 그를 몰아내기 위한 투표를 진행했다. 중앙위원회는 전광석화처럼 다음날 그 결정을 승인했다. 흐루쇼프 축출 기획은 흐루쇼프가 키워준 당내 주요 이론가이자 철저한 레닌주의자인 수슬로프(М.А.Суслов)가, 실무는 KGB가 담당했다. 흐루쇼프로서는 휴가를 즐기고 있던 상황이라 전격적인 궁정쿠데타를 막을 어떠한 방어적 수단도 강구하지 못한 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64년 10월 16일 소련공산당 기관지 쁘라브다는 당 중앙위원회가 고령과 건강 악화로 당 제1 서기직과 각료회의 의장(수상) 직을 사임하려는 흐루쇼프의 요청을 승인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는 마치 1991년 8월 19일의 장면과 오버랩 되는데, 당시 소련의 국영 방송에서는 8명의 국가 지도자들이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국가비상상황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고르바쵸프 연방 대통령은 끄림의 휴양지에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흐루쇼프의 키드(kid)라 볼 수 있는 고르바쵸프는 젊은 시절 흐루쇼프의 개혁에 따른 해빙기의 짧은 행복감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는 몰라도, 고르바쵸프 역시 흐루쇼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키워준 옐찐에 의해 축출을 당하게 된다. <계속>

 

 

소비에트연방 국기

 

 

□ <끄레믈의 서기장들>에서는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 시기의 정치사를 서기장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물론 이를 통해 오늘날의 러시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추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요 근래 한국의 외교에서 러시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주변 4강의 한 축으로써 한반도의 접경 국가이자, 트윈 코리아의 하나인 북한을 건설한 러시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끄레믈의 서기장들>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소비에트연방 사열식

 

 

□ 필자 김태항은 러시아연방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철학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1998)를 받았고,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