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흐루쇼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Ⅰ) : 흐루쇼프와 베리야

twinkoreas studycamp 2021. 4. 12. 20:51

 

 

김태항(정치학 박사)

 

 

니끼타 쎄르게이비치 흐루쇼프(Н. С. Хрущёв) - 2

 

 

흙수저 흐루쇼프의 인간승리

 

흐루쇼프는 1894년 우끄라이나 접경지역인 제정 러시아의 꾸르스크주 깔리노프카에서 전형적인 하층계급의 흙수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파트타임 광부였고, 할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다. 어린 흐루쇼프는 빈한한 가정환경 때문에 동네 지주의 소와 돼지들을 돌보면서 푼돈을 벌었다.

 

흐루쇼프가 14세가 되던 해인 1908년, 가족은 석탄과 철강산업이 발달한 우끄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중심지인 유조프카(오늘날 도네츠크) 부근으로 이사 갔다. 이 때문에 일부 문헌에서는 흐루쇼프를 우끄라이나 출생으로 소개하지만, 러시아 출신이 맞다.

 

배관공, 석탄 광부 등을 전전하던 흐루쇼프는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는데, 이때까지 그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소련은 물론 해외에서도 지적받았던 흐루쇼프의 저급한 언어 구사는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의 하찮은 경력과 천박함 때문에 동료들과 세상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고 하대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끼예프 지방 탄광의 관리로 일할 때, 우끄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인 까가노비치(Л. М. Каганович)의 눈에 들게 된다. 1929년 까가노비치가 모스크바로 갈 때 흐루쇼프를 참모로 데리고 간다. 그렇게 흐루쇼프는 출세의 가속페달을 밟는다.

 

1935년 모스크바 시당·주당 제1서기, 1938년 우끄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이듬해인 1939년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등극하게 된다.

 

 

흐루쇼프는 스딸린그라드 전투에서 긴급 파견된 특명 야전사령관이었던 추이꼬프(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와 함께 20세기 ‘세계 3대 동계전투(레닌그란드·스딸린그라드·장진호)’를 승전을 이끈 정치위원으로 부각되면서 주꼬프 총사령관을 위시한 소연방(Soviet Union) 군부와의 관계에서 일정한 정통성을 갖게 되었고, 스딸린 사후 베리야를 숙청하는데서 군부와의 협력이 원활하게 이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 때는 중장 계급장을 달고 정치위원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Enemy at the Gates’라는,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흐루쇼프를 꼭 닮은 배우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Enemy at the Gates'에 등장한 흐루쇼프(대역)

 

 

1930년대~40년대 기간 동안 흐루쇼프는 열혈 스딸린주의자였다. 스딸린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을 성공적으로 관리·감독했고, 우끄라이나에서의 숙청 작업, 스딸린의 대숙청 작업에도 적극 동참했다.

 

특히 그는 1939년 8월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에 따른 폴란드 동부지역의 우끄라이나로의 병합 과정에서 야기된 소요, 전후(postwar) 시기에 격화된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실각 후 “내 손은 팔뚝까지 피에 잠겼었다. 당시 나는 스딸린을 믿었고, 무슨 짓이든 다했다”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했다.

 

 

스딸린의 사망과 권력투쟁

 

1953년 3월 5일 스딸린의 사망 사실이 공식 발표되자 레닌 사후에서와 마찬가지로 권력투쟁이 개시되었다. 선두에 선 인물은 말렌꼬프였다.

 

스딸린 사망 발표 직후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각료회의,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에서 말렌꼬프는 각료회의 의장이자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말렌꼬프의 가까운 동료인 베리야는 각료회의 부의장이자 막강한 국가보안부(MГБ; 엠게베)를 흡수한 내무성(МВД; 엠베데)의 수장이 되었다. 외무상으로 복귀한 몰로또프와 불가닌, 까가노비치 역시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특히 스딸린 장례식 때의 유해 운구 장면을 보면, 운구 행렬 맨 앞에 말렌꼬프와 베리야가 등장하는데, 말렌꼬프가 사실상의 넘버1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스딸린이 사망한 직후의 각종 추모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반복되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소련 각료회의 의장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인 스딸린 동지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으라! 또한 현 소련 각료회의 의장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인 말렌꼬프 동지 만세!”

 

흐루쇼프의 경우 정부의 직책은 맡지 못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2인자로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했다.

 

인간 도살자이자 위선자, 교묘한 아첨꾼으로 평가받는 베리야는 흐루쇼프를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경멸했다. 흐루쇼프의 상관이었던 까가노비치 역시 자신의 참모였던 흐루쇼프의 부상을 원치 않았다.

 

말렌꼬프와 몰로또프 또한 그를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멸시했다. 흐루쇼프는 이 모든 상황을 모조리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이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흐루쇼프는 말렌꼬프가 스딸린 사후 9일 만에 당 제1서기직을 넘겨주겠다고 하자, 권력 장악의 고삐를 당기기 시작했다. 말렌꼬프가 무슨 이유로 이랬는지는 분명치 않다.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서기직과 각료회의 의장직 겸임이 집단지도체제에 맞지 않아 말렌꼬프를 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분석도 있고, 약점이 많아서 강요당했다는 지적도 있다. 아니면 말렌꼬프가 흐루쇼프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했거나, 충분히 통제 가능한 인물이라고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다.

 

결국 스딸린의 사실상의 후계자였던 말렌꼬프는 당 제1서기의 자리를 양보한 후 점차 권력으로부터 밀려나게 된다. 소비에트 체제의 권력구조 특성상 당을 장악한 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라브렌티 베리야 (위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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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의 당면과제는 베리야 제거였다. 베리야는 전제군주였던 스딸린조차도 경계할 정도로 최고위층 인물들에 대해 너무나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딸린이 베리야를 제거하려고 하자, 베리야가 선수를 쳐서 스딸린을 독살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은 풍문일 뿐이다. 여하튼 베리야라는 존재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기를 원치 않는,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흐루쇼프는 막강한 비밀경찰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베리야를 제거하기 위해 군부의 힘을 빌린다. '위대한 조국전쟁의 영웅'으로 통하는 주꼬프(Г. К. Жуков) 원수와 방공부대 총사령관인 모스깔롄코(К. С. Москаленко) 장군을 동원해서 베리야 숙청에 성공한다.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체포되어 12월에 총살당하는데, 죄목은 ‘인민의 적’이자 ‘영국의 첩자’였으며, 수많은 부녀자 납치·강간 등이었다. 사실 베리야는 스딸린이 사망하자마자 굴라크(Гулаг)의 정치범들을 풀어주는 등 신속하게 정치적 해빙을 주도하는 행보를 취했으나, 해빙기 깨진 얼음 조각 사이로 신속하게 빠져 죽게 되었다. <계속>

 

 

□ <끄레믈의 서기장들>에서는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 시기의 정치사를 서기장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물론 이를 통해 오늘날의 러시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추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요 근래 한국의 외교에서 러시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주변 4강의 한 축으로써 한반도의 접경 국가이자, 트윈 코리아의 하나인 북한을 건설한 러시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끄레믈의 서기장들>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필자 김태항은 러시아연방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철학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1998)를 받았고,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