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흐루쇼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Ⅰ) : 흐루쇼프의 명암

twinkoreas studycamp 2021. 4. 19. 19:23

 

 

김태항(정치학 박사)

 

니끼타 쎄르게이비치 흐루쇼프(Н. С. Хрущёв) 3

 

 

스딸린교 광신도의 이단 행위

 

1956년 2월, 소련과 세계 공산주의 역사에서 전환기적 의미를 지니는 쇼킹한 사건이 발생했다.

 

해외 55개국의 공산당 대표들도 참석한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스딸린의 ‘자본주의 포위론’과 ‘전쟁 불가피론’을 비판했는데,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아울러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을 따라야 한다는 스딸린주의를 부정하면서,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을 설파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장면은 당대회 마지막 날, 흐루쇼프가 스딸린의 전제정치와 강요된 개인숭배, 신격화를 맹렬히 비난했다는 것이다. 스딸린교의 열혈 광신도가 죽은 교주의 무덤에 침을 뱉은 격이었다.

 

사실, 당대회가 개최된 끄레믈궁 대회장에서 갑자기 스딸린의 동상과 사진들이 사라졌는데, 이는 흐루쇼프의 발언이 돌출적인 깜짝쇼가 아니었다는 반증이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이미 흐루쇼프가 스딸린 격하 연설을 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메카에서 벌어진 흐루쇼프의 설교는 각국 공산당에게 충격의 쓰나미가 되었다.

 

22차 당대회(더위키)

 

 

1956년 폴란드, 헝가리 사태

 

1956년 6월 폴란드의 뽀즈나니(Poznań)에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부패하고 무능한 스딸린주의자들의 통치에 염증을 느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스딸린에 의해 숙청되었다가, 1954년에 석방된 민족 공산주의자 고무우카(Gomułka)를 중심으로 개혁정부를 구성하였다.

 

폴란드 지도자들은 만약 모스크바가 폴란드에 고압적으로 나올 경우, 폴란드 인민들과 함께 최후의 일인까지 싸울 것임을 결의했고, 이에 모스크바는 한발 물러섰다. 고무우카 역시 격앙된 인민들을 자제시켜,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지혜롭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폴란드와 유사한 자유화 운동이 헝가리에서도 발생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었다. 폴란드의 경우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의 이탈을 주장하지 않았다. 고무우카는 소련의 국가적 이익과 폴란드의 내적 개혁 요구를 잘 조정하여, 소련의 군사개입을 회피할 수 있었다.

 

 

폴란드의 고무우카(위키피디아)

 

그러나 헝가리는 복수정당제 실시,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 헝가리의 중립화 등을 내세우며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할 기세를 보였다. 당시 주 헝가리 소련대사이자, 후일 서기장으로 등극하게 되는 유리 안드로뽀프(Ю. В. Андропов)는 소련의 무력 개입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헝가리 수상 너지 임레는 유고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루마니아로 압송돼 KGB의 비밀재판으로 처형되었다(위키백과)

 

 

결국 인내의 임계점에 도달한 소련은 6만의 병력으로 헝가리 전역을 침공했고, 수도인 부다페스트에는 1천대의 소련군 탱크가 진주했다. 헝가리 정부와 국민들은 서방, 특히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무참히 진압되었다. 동유럽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겠다던 미국의 천명(strictly verbal)은 허장성세로 드러났다.

 

헝가리 사태는, 시위대를 향한 소련 전차와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을 목격한 전 세계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참고로 소련 군대가 헝가리 정권을 붕괴시켰다는 사실은 북한 지도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미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중·소의 내정간섭을 경험한 김일성은 헝가리 사태를 계기로 북한에 주둔 중인 중공군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 커졌다. 주둔군의 각종 횡포가 심각하던 차에, 김일성은 중공 측에 철군을 요구했고, 중공군은 1958년 북한에서 전면 철수하게 된다.

 

 

보쉬찌(вождь)가 된 흐루쇼프

 

흐루쇼프는 1957년 2월, 국가계획위원회인 고스쁠란(Госплан)의 기능을 축소하고, 30여 개가 넘는 중앙의 경제 관련 부처들을 폐지하여, 신설된 지역경제위원회인 쏘브나르호스(Совнархоз)로 이관할 것을 제의했다.

 

이는 중앙집중식 경제 관리를 지방 분권화하자는 것이었는데, 당 간부회 내의 흐루쇼프 반대세력들은 지방분권 개혁안에 격렬하게 대항하면서, 흐루쇼프를 아예 권좌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말렌꼬프, 몰로또프, 까가노비치 등은 당 간부회를 소집하여, 9대 2의 다수결로 흐루쇼프를 해임하고, 농업성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사퇴 요구에 대해, 자신은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되었으므로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지 않고서는 물러설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흐루쇼프는, 30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중앙위원들을 긴급 소집한 주코프의 도움으로,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 이 문제를 회부할 수 있었다. 여기서 흐루쇼프는 오히려 이들을 반당분자로 규정하면서, 당 지도부로부터 추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흐루쇼프의 승리였다.

 

물론 이들이 당에서 완전히 축출된 것도, 투옥된 것도, 처형된 것도 아니었다. 과거에 비해 격은 낮아졌지만, 각자의 자질에 따라 걸맞은 직위를 부여받았다. 말렌꼬프의 경우 시베리아의 발전소 관리책임자로 갔고, 외교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몰로또프는 몽골 대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흐루쇼프는 자신의 측근인 불가닌과 주코프를 숙청하고, 당과 정부를 동시에 장악함으로써 소련의 보쉬찌(вождь; 수령)가 되었다. 이는 집단지도체제의 종말이자, 스딸린 시대와 같은 단일지도체제로의 복귀였다.

 

 

흐루쇼프와 까가노비치의 일화

 

까가노비치(위키피디아)

 

이미 언급했듯이 까가노비치는 원로 볼셰비키이자 흐루쇼프를 키워준 인물이다. 그가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을 당할 무렵, 까가노비치는 흐루쇼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까가노비치; “당신이 이제 넘버1 같은데,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흐루쇼프; “다 좋은데, 우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 지금 당신이 내 위치에 있고, 내가 당신의 처지라면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겠나? 당신은 아마도 나를 번개처럼 처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살아있다. 앞으로도 살아있을 것이다. 안심해도 좋다”

 

흐루쇼프는 약속을 지켰다. 1893년생인 까가노비치는 100살 가까이 장수했다. 그는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1세대 볼셰비키였다. 몰로또프 역시 스딸린 시대였다면 즉각 총살을 당했을 텐데, 96세까지 살아남았고, 말렌꼬프 역시 87세까지 살았다.

 

 

과학기술 혁명

 

흐루쇼프 집권기는 소련의 과학기술 혁명기였다. 소련은 1954년 오브닌스크(Обнинск)에서 세계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57년 8월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발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으나, 2개월 뒤 역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뿌뜨닉(Спутник) 1호 발사에 성공하자 의혹은 사라졌다. 스뿌뜨닉 1호는 83.6kg의 작은 인공위성이었다. 다음 달엔 500kg이 넘는 무게의 스뿌뜨닉 2호가 발사되었는데, 여기에는 ‘라이카’라는 유기견 출신의 개가 타고 있었다. 미국의 첫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explorer) 1호는 1958년이 되어서야 궤도에 진입했다. 무게는 고작 13kg에 불과했다.

 

서방 세계는 커다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와 관련, 쁘라브다는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소련의 미사일 위력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효과는 양날의 칼이었다. 미국의 군사적 자극을 불러일으켜 미국 정부 역시 소련의 정치적 도전에 훨씬 더 강도 높게 반응한 것이다.

 

가가린(1934~1968) : 비행훈련 중 추락사고를 당해 34세로 생애를 마쳤다.

 

1961년 4월에는 유리 가가린(Ю. А. Гагарин)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바스또크(Восток-1) 1호를 타고 지구 궤도 순항에 성공하게 되었다. 가가린은 소련과 제3세계 인민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에 미국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당시 미국은 우주에 원숭이를 쏘아 올리고 있었는데, 소련은 인간을 쏘아 올린 것이다. 특히 정권을 잡은 지 3개월도 안 된 케네디(John F. Kennedy)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는 곧 본격적인 우주경쟁의 시발이 되는데, 냉전기 미·소 간 우주경쟁은 단순한 과학기술 경쟁이 아니라,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계속>

 

 

□ <끄레믈의 서기장들>에서는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 시기의 정치사를 서기장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물론 이를 통해 오늘날의 러시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추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요 근래 한국의 외교에서 러시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주변 4강의 한 축으로써 한반도의 접경 국가이자, 트윈 코리아(Twin Koreas)의 하나인 북한을 건설한 러시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끄레믈의 서기장들>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필자 김태항은 러시아연방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철학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1998)를 받았고,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