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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의 서기장들(Ⅲ) : 병상 정치

김태항(정치학 박사) 유리 블라지미라비취 안드로뽀프(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1 끄레믈의 중환자들 18년간 끄레믈의 두목 자리를 지켰던 브레쥐네프는 1982년 11월 10일 사망했고, 그의 계승자인 안드로뽀프는 1984년 2월 9일 사망함으로써, 정확히 15개월 동안 서기장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그는 서기장으로서의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건강이 나빠 재임 전반기에는 일과 치료를 병행했고, 후반기 약 6개월 동안은 병상에 누워서 업무를 봤다. 이와 관련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역대 서기장들의 건강은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를 제외하고는 좋지 않았다. 소련을 기획하고 건설한 레닌은 말년에 여러 차례 뇌경색과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사망했다. 스딸린은 ‘강철’이..

6.25전쟁 : 전쟁외전(2) 실종(MIA), 전쟁범죄, 유해송환

“괴물들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심연도 너를 깊이 들여다 볼 것이다.”(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look to it that he himself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 - 니체 - 세계전쟁이 남긴 네 가지 교훈 2020년 2월에 타계한 이론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J. Dyson)은 평론집 ‘Scientist As Rebel’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을 네 가지로 압축했다. 수학적 재능이 출중했던 다이슨은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 공군본부에서 분석가로 활동했다...

6.25전쟁 : 전쟁외전(1) 포로, 고아, 경계인, 디아스포라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전쟁은 1년여만에 쌍방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주요한 목적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간 연장되면서 사상자수가 50% 가량 더 늘어났다. 첫 1년 동안 사상자수가 200만명이었다면, 나머지 2년 동안 추가된 100만명은 피할 수도 있었던 희생이었다. 지평리~원주전투(1951.1월~2월)에서는 중국군의 참패가 부각되었지만 초기에는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네덜란드 대대를 비롯해서 유엔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미 해병대가 반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네덜란드군 시신을 발견했고, 미 15야전포병대대 소속 128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한국군 사상자는 1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포로와 고아의 문제 전쟁에서 탄환과 포환, 총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굶주림과 정신적 충격,..

6.25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3)

정전협정 후에 김일성 수상은 “미제와 추종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이승만 괴뢰군만을 상대하여 싸웠다면 우리는 벌써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것이다”고 주장했고(1953.10.23. 조선인민군 제256군부대 연설),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녕 조국의 통일은 외세를 등에 업은 일방의 무력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전쟁이라는 수단 자체를 일체의 정치적 수단을 차단시킨 비현실적인 희원적 사고(wishful thinking)의 산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2003). 박명림은 ‘희원적 사고’를 정책 결정자들이 특정의 신념과 가치체계 때문에 자신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만 보고, 그 결과 정보기능의 실패라든가 정책실현 ..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노인정치 시대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6 게란따 끄라찌야(геронтократия ; 노인정치) 폴란드 출신의 소련 전문가인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 전 하버드대 교수는, 브레쥐네프가 집권 말년에 노인성 치매 증상을 뚜렷이 보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브레쥐네프의 건강 문제는 1971년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문제였고, 1974년 몇 차례의 뇌출혈에 이어, 1976년부터는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육체와 정신이 골고루 망가진 상황이었다. 이로부터 6년간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거의 반쯤은 죽어있는 사람이 통치한 것이다. 물론 브레쥐네프의 늙은 동료들인 안드로뽀프, 우스찌노프, 그로미코 등 끄레믈의 알리가르히(олигарх..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2)

“필자는 이 연구를 진행하며 끝없는 죽임과 시체로 인해 밤이면 자주 가위눌려 헛소리와 땀으로 범벅된 채 잠 못 이루며 집필을 중단하곤 하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이 되어가고, 끝내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죽은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변화된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서문에서, 2002.9) 전쟁의 시작 전날 새벽에 조선인민군 949군부대(의무대)는 전선에 야전병원을 설치하였다.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은 군 일선에 ‘남측의 38선 침범’에 대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한국전쟁은 서해안에서 시작되었다. 내무성 38선 경비여단(최현 소장)이 가장 먼저 옹진반도에 진입했고, 766유격대(오진우 총좌)의 일부 대대가 산악지대와 동해를 통해서 강릉, 삼척, ..

조선로동당 규약개정 : 남북관계의 새로운 접근?

김병규(트윈코리아연구소장) 조선로동당이 지난 1월 19일 제8차 당대회에서 당 규약을 개정하였는데, 몇 가지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당의 당면목적 중에서 전국적 범위에 관한 대목은 기존의 통일지상주의(통일위업)에 기초한 대남혁명론에 일대 수정을 가한 것이라는 관측을 불러 일으켰다. NLPDR의 종언? 조선로동당의 규약은 지속적으로 개정되었지만, 당의 당면목적에서 규정한 전국적 범위의 목적(대남 기본노선)은 지난 60여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특히 1980년 10월 13일 제6차 당대회에서 당규의 전국적 범위 당면목적을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 완수’(NL PDR)로 명시한 이후 40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 지난 2010년 3차 당대표자회의에서 ‘..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1)

2021년 6월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이다. 조선(DPRK)의 전후세대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선제침공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지적 정직성이 필요하고, 한국(ROK)의 전후세대는 어떤 부분들이 아니라 ‘3년 전쟁’의 전체적 실상에 대한 성찰적 접근이 필요하다. 1994년 옐친(Boris Yelchin) 러시아연방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외교전문들과 중국에서 공개된 문서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공격개시 결정은 조선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전쟁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선제공격을 준비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불리해진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에 동의한다. 소비에트체제 연구자 웨더바이(Kathryn Weathersby)는 소연..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바웬사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5 중국의 친미·반소전략 마오쩌둥은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당시 발표한 ‘상하이 공동선언’, 그리고 같은 해 일본과의 수교 공동선언에서 소련의 패권주의 저지라는 문구를 명문화하는 데 성공했다. 마오는 닉슨의 방문을 기뻐하면서, 자신의 주치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닉슨은 기탄없이 말하는 아주 솔직한 사람이야. 좌익들과는 확연히 다르지. 닉슨은 나에게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우리와의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고 했어. 이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가? 그는 눈앞에서는 도덕성을 말하면서, 돌아서면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우리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는 것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핵 사다리 치우기(3) : 저위력 핵무기의 음울한 탄생

“모든 유형의 위협에 맞게 억지할 수 있는 만능 사이즈는 없다.”(There is no one size fits all for deterrence). 아무리 급해도 모기 잡는데 소 잡는 칼을 휘두를 수는 없다. 핵무기에 의한 전쟁 억지력은 전후 70년이 넘게 장기평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전략핵과 전술핵은 국지적이고 미묘한 전쟁에서 쓸모가 없었다. 일찍이 키신저(Henry A. Kissinger)는 상호파괴의 비합리성과 도덕적 부담으로 인해 핵보유국 간의 확증파괴 위협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employable)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하고, 미국 전략핵의 대적 위협능력을 의심하였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 양안위기(대만해협 분쟁), 베트남전쟁에서 핵 위협을 가했지만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