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10

한반도 중립화 논의(5) 코스타리카의 적극적 중립

2018년 취임 이후 첫 아시아 국가로는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한 카를로스 알바라도(Carlos Alvarado Quesada)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국정연설에서 자국이 ‘아메리카대륙의 독일이나 한국’으로 불리길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자국이 ‘아메리카대륙의 스위스’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는 아메리카대륙의 한국(Corea del Sur de América)으로 알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남미에서도 중미에 속하는 소국인 코스타리카는 아메리카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한 중립국로서 ‘비무장 영세중립’과 ‘적극적 중립’을 견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시절부터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과 교분을 쌓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중에 코스타리카를 방문했다. 이후 이명박..

중견국가(10) 기정학적 변동과 과학기술강국론

경제선진국, 지구적 차원의 중견국의 필수적 조건이 경제, 군사, 과학기술이라면, 충분조건은 인권과 젠더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소프트 파워와 디지털을 포함하는 당대의 문화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경제선진국의 위상을 확립하고 하나의 전략국가로서 중견국으로 자리잡으려면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난 16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가 과학기술 비전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심상정 후보에게 전달했다. 한국의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과학기술 중심국가에 대한 비전을 촉구한 것은 미·중의 과학기술 패권경쟁을 둘러싼 세계질서의 변동에서 기정학적(..

핵 사다리 치우기(8) 북핵에 대한 미국의 여론

미국인들은 조선(DPRK)이 핵 개발을 유예할 경우에 평화조약 협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hicago Council on Global Affairs, CCGA)의 여론조사 보고서, ‘Americans Remain Committed to South Korea, View North Korea as an Adversary’(Karl Friedhoff, 2021.10.7)에 따르면, 응답자의 76%가 핵무기 프로그램의 유예(suspend)를 전제로 평화조약의 협상을 지지했다. 또한 응답자의 24%는 핵무기를 유지해도 평화조약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35%는 핵무기를 포기시키기 위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지지했다. 반면에 한국(ROK)을 동맹으로 인식하는 비율..

경제제재(10) 대북제재의 양면성과 북미관계 전망

1812년 미국 선원에 대한 영국의 강제징발에 대해서 갤러틴(Albert Gallatin) 재무장관이 보복조치를 단행한 이후로 미국의 재무부는 적성국가에 대해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을 집행하는 핵심적 기관이 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은 대일 원자재 금수조치(1941~1945)를 통해서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차단하여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미국의 금수조치가 발효되자 일본군 수뇌부는 임박한 미국의 공습보다 금수조치에 의한 유류보급 차질을 더 공포스럽게 받아들였다. 전후에 미국은 제재의 초점을 소연방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으로 옮겼고, 20세기 말에는 중남미와 중동의 반미국가로 초점을 이동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의 조선은 한국전쟁, 사회주의권, 핵개발국가, 테러지원국, ..

경제제재(9) 대북제재 70년

미국의 대북제재는 한국전쟁에서 시작되었다. 수출통제법(Export Control Act of 1949) 및 수출관리규정(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s)에 의해서 미국 기업의 대북 수출이 금지되었고, 트루만은 대통령 포고(Presidential Proclamation)로 조선에 적성국교역법(Trading with Enemy Act, 1917년 제정)을 적용할 것을 선포하였다(정형곤 외, 비핵화에 따른 대북경제제재 해제 : 분석과 시사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국가비상사태법(National Emergencies Act)과 국제비상경제권한법(International Emergency Economic Power Act)에 근거한 행정명령(executive orders by th..

경제제재(8) 제재와 관계개선의 이중주 : 베트남·쿠바

베트남의 경우 : 1955년 ~ 1995년 베트남전쟁(1955~1975)이 최종적으로 종료되고 2년이 지난 1977년에 카터 행정부가 미국인의 베트남 여행제한을 해제한 것을 계기로 하여 양국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월맹)은 1977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란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였다. 당시에 미국은 무조건 수교하자는 입장이었고, 베트남은 파리평화협정(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 1973)의 이행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카터 프로세스(Carter Process)를 통해서 ‘조건 없는 국교정상화–제재해제–국제금융기구의 차관제공 지원 및 최혜국대우(MFN, Most Favoured Nation treatme..

경제제재(7) 제제와 관계개선의 이중주 : 중국

미국과 사회주의 3국과의 관계개선의 역사는 실체의 인정, 제재의 해제, 국교수립, 교류협력 및 지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1단계(인정단계)에서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식적·비공식적 접촉을 통하여 기본문제 및 현안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다. 2단계(모색단계)에서 민간교류, 문화학술 교류, 정부 및 외교관의 접촉을 허용하고, 신뢰구축을 위한 조치와 현안해결을 추진하였다. 현재 북미관계는 탄력적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에서 2단계 수준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압도적인 제재국면으로 인하여 불충분한 점들이 많다. 미국은 3단계(제재완화 단계)에서 사회주의 3국에 대한 문화 및 인적 분야의 교류, 여행 및 관광, 기초적인 통신개설, 기초생필품의 선별적 거래, 기업사무소 개설 및 방문·조사를 허..

경제제재(6) 미국 금융제재의 효과와 한계

21세기 경제제재는 금융제재이고, 금융제재는 미국이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지구적 차원 경제제재는 곧 미국의 금융제재를 의미하게 되었다. 무역제재의 효과를 둘러싸고 견해가 엇갈리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무역제재는 대상이 많고, 전지구적 세계화가 심화된 조건에서 육해공을 모두 차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재의 핵심목표를 실현하지 못하고 대상국의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한다는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반면에 금융제재의 효과는 수긍하는 견해가 훨씬 많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발동한 경제제재 중에서 무역제재가 대상국의 행동에 변화를 초래한 경우는 25% 수준이지만, 금융제재는 36%에 달한다고 한다. 21세기 초입에 발생한 9.11테러 이후 미국은 UN을 거치지 않..

경제제재(5) 세컨더리 보이콧의 원조 : 영국

경제제재의 원조 : 아테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도시국가연합에 가담하지 않는 군소 도시들의 교역을 차단한 것을 국가에 의한 경제제재의 시초, 즉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 와서도 프랑스 지역에 대한 금은의 수출입 금지조치가 있었고, 중세의 종교전쟁에서는 신교와 구교의 쌍방 제재가 빈발했다.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제재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와 같은 전쟁시기를 제외하고는 주로 제후의 봉토, 일국의 영토, 혹은 방대하지만 제국의 내지(內地) 안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제1차세계대전(1914~1918) 이후 영국과 미국에 의해서 ‘국외 제재’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세컨더리 보이콧의 원조 : 영국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한반도 중립화 논의(4) 오스트리아 영세중립 재조명

분단과 전쟁 이후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 것은 허약한 완충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과 평화번영을 누릴 수 있는 국가의 존재양식으로서 영세중립국이 갖는 매력 때문이었다. 또한 영세중립은 분단과 전쟁의 원인이었던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를 하나의 국가의 틀 속에서 평화적으로 해소하고 재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매력과 매혹은 빛을 잃어갔다. 장면 정부 이후 역대 정부의 냉소 속에서 대중의 관심과 열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중립화 논의는 일부 민족지사들의 고색창연한 민족주의 담론처럼 점점 고립화되었다. 1955년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한국의 중립화 논의에서 오랫동안 하나의 대안적 모델로 인용되었다. 한반도와 오스트리아의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