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제재 :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경제제재(7) 제제와 관계개선의 이중주 : 중국

twinkoreas studycamp 2021. 11. 17. 14:27



미국과 사회주의 3국과의 관계개선의 역사는 실체의 인정, 제재의 해제, 국교수립, 교류협력 및 지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1단계(인정단계)에서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식적·비공식적 접촉을 통하여 기본문제 및 현안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다. 2단계(모색단계)에서 민간교류, 문화학술 교류, 정부 및 외교관의 접촉을 허용하고, 신뢰구축을 위한 조치와 현안해결을 추진하였다. 현재 북미관계는 탄력적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에서 2단계 수준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압도적인 제재국면으로 인하여 불충분한 점들이 많다.

미국은 3단계(제재완화 단계)에서 사회주의 3국에 대한 문화 및 인적 분야의 교류, 여행 및 관광, 기초적인 통신개설, 기초생필품의 선별적 거래, 기업사무소 개설 및 방문·조사를 허용하였다. 4단계(수교착수)에서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 혹은 이익대표부(interest section)의 교환설치, 각종 쟁점의 해결을 위한 창구 다양화를 모색하였다.

5단계(제재해제 단계)에서 금수조치 및 무역제한, 기업활동제한을 해제하고, 공적원조 및 각종 지원에 나섰다. 이 단계에서 미국과 상대국의 협상은 중대한 진전을 이루고 관계정상화의 분기점이 되었다. 6단계(외교관계 정상화)에서 쌍방의 주재대사관의 설치가 이뤄졌다. 제제해제 단계에서 외교관계 정상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쌍방의 최우선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에 준하는 확실한 보장 및 담보가 이뤄졌다.

마지막 단계는 전면적인 교류협력 및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는 장기적 과정으로 현재진행형이다. 돌이켜보건대 1994년 제1차북핵위기 이후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협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한국 내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북미연락사무소에 대한 전망까지 나왔지만, 미국은 중국·베트남·쿠바와의 관계정상화에서 그러한 비약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미국은 차별정책(소극적 제재)이나 무역우대, 호혜 및 특혜, 투자유치 및 국제기구 가입 지원(적극적 우대)을 마지막 정책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유보하면서 국면의 변화에 대비해 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홍콩의 특별지위를 철회하거나 중국산 제품에 2천억 달러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한 것은 마지막 단계의 확장판으로 평가할 수 있고, 9천3백만명으로 추정되는 중국공산당 당원과 그 가족의 입국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가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보여준다.

닉슨,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상하이 공동선언)



신중국과의 국교수립까지 : 1949년~1980년

한국전쟁에 중국이 개입하자 미국은 1950년 12월을 기점으로 적성국교역법(TWEA, Trading with the Enemy Act of 1917)에 따라 포괄적 경제제재에 착수해서 외화반출 및 수출입 금지와 무역상 차별 및 불이익을 부과하였다. 미국은 1953년 7월 한국전쟁 의 정전협정을 계기로 중국 본토에 대한 전략기조를 탈환지원에서 적대적 인정에 기초한 전략적 봉쇄로 선회하였다. 1955년 4월 중국이 ‘평화 5원칙’을 천명하고 금문도에 대한 포격을 중지하자, 미국은 대사급 접촉 요구에 응했다. 1956년 8월 중국은 미국 언론인들의 입국을 허용하였으나, 1957년 6월 이후 대사급 접촉이 중단되고, 미국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중국의 대약진운동(Great Leap Forward, 1958~1960)이 실패하고 기아문제가 심각해지자, 미국은 인도주의적 식량지원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핵무장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면서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공론화하였고, 1966년 민간 차원의 미중관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67년부터 양국은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1958년 대사급 접촉 재개 이후 1970년까지 63회에 달하는 협상을 벌이면서 미국을 상대로 ‘국가적 인정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국은 1969년부터 내부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결정하고 선제적으로 제재를 완화하여 미 7함대의 대만해협 순찰을 중지하였다. 2018년과 2019년에 이뤄진 미국과 조선의 정상회담은 이러한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관계발전이지만 그만큼 안정성을 결여하였다.

미국은 조선의 적대적 실체를 인정하고 비핵화협상을 벌이면서도 한반도 주변에서 전략자산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중국·베트남·쿠바의 사례보다 장기적인 게임을 예고하였다.

1970년 미국은 파키스탄을 중개자로 하여 중국과 비밀접촉을 추진하였고, 중국은 미국의 의향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면서 양국의 고위급 비밀접촉이 이뤄졌다. 1971년 미 행정부는 미국인의 중국방문을 허용하였고, 나고야 세계탁구대회에 참가했던 미국 탁구선수단이 중국에서 ‘핑퐁외교’(Ping-pong diplomacy)를 연출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격돌한지 거의 20년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해 6월에 미국은 포괄적 경제제재를 해제하였고, 7월에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국무장관이 저우언라이 수상 겸 외상과 수교회담을 시작하였다. 미국이 기존 입장을 철회함에 따라 중국은 10월 UN 총회에서 회원국 가입이 승인되었다.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은 정상회담을 갖고 ‘상하이 공동성명’(Joint Communiqué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약속했다. 1973년 워싱턴과 베이징에 연락사무소가 개설되었지만, 양국의 내정불안(워터게이트사건과 4인방사건)의 여파로 수교협상은 5년이나 지체되었다.

마오쩌둥과 닉슨


쌍방은 1978년 5월에 수교협상을 재개하여 이듬해 1월 대사급 국교수립을 천명하였고, 1979년 3월 워싱턴과 베이징의 양국 대사관에 양국의 국기가 게양되면서 절차적 차원의 관계정상화가 완성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1955년 대사급 접촉 이후 1978년 12월 국교정상화 공동성명까지 23년이 걸렸다. 1979년 양국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최혜국대우(MFN)에 합의하였고, 미국 수출입은행(EXIM)의 차관공여와 과학기술 및 문화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교류협력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과 카터


미국이 기초적인 제재완화를 취한 1969년과 포괄적인 제재완화를 단행한 것은 1971년으로 불과 2년만이었다. 양국이 수교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대만의 지위에 대한 문제가 주요하게 다뤄졌고, 쌍무적 무역협정 체결이 관계정상화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지만, 미국이 동결한 자산의 해제 등 재산권문제와 최종적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은 1980년 1월(협정발효)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1950년 이른바 ‘항미원조’ 이후 30년만에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