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경우 : 1955년 ~ 1995년
베트남전쟁(1955~1975)이 최종적으로 종료되고 2년이 지난 1977년에 카터 행정부가 미국인의 베트남 여행제한을 해제한 것을 계기로 하여 양국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월맹)은 1977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란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였다. 당시에 미국은 무조건 수교하자는 입장이었고, 베트남은 파리평화협정(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 1973)의 이행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카터 프로세스(Carter Process)를 통해서 ‘조건 없는 국교정상화–제재해제–국제금융기구의 차관제공 지원 및 최혜국대우(MFN, Most Favoured Nation treatment)를 추진했지만, 베트남은 파리평화협정에서 약속했던 전쟁복구 지원을 요구하였다.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이 파리협정을 준수하면 3억5천만 달러의 지원금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협정은 1968년부터 5년에 걸쳐 미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월맹),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 월남), 남베트남공화국 임시정부(Republic of South Vietnam, 베트콩)가 합의한 것이었으나 미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고, 미군철수 이후 전쟁이 재발하여 베트남공화국이 붕괴하면서 그 지위 및 효력이 모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협정의 내용을 선결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은 협정이 무효화되었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1978년에 베트남이 폴 포트(Pol Pot)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양국의 교섭이 중단되었다. 베트남은 소연방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MEA, 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에 가입하여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려고 했다.
1979년 중국은 캄보디아 침공을 비판하면서 베트남을 침공해서 1년이 넘도록 대치하였다. 베트남의 탈중국 및 중립적 성향이 강화되자 미국과의 재협상이 이뤄졌다. 베트남 지도부는 과거의 협상에서 복구지원금(전쟁배상금)을 앞세운 것을 전략적 패착으로 평가하고 이를 철회하였지만, 미국은 캄보디아 철수와 전쟁실종자(MIA, Missing In Action) 해결을 선행조건으로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1988년까지 전쟁포로(POW, Prisoner of War) 및 실종자에 대한 협상이 지속되었고, 이 시기에 베트남은 내부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1986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응우옌반린(Nguyễn Văn Linh)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서 활약했던 경험을 살려서 ‘새로운 사고’(1988)를 주창하였다.
반린은 주변국과의 평화공존에 기초한 경제개발과 민생개선을 추진하면서 ‘베트남의 고르바초프’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말년에 베트남이 개혁개방으로 부패와 착취를 초래했다고 보고 외국자본과 자본주의로 경도되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1991년 부시 행정부는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 방식에 기초한 관계정상화 로드맵을 제시하였고, 양국은 전쟁실종자(MIA) 조사를 위한 사무소 설치에 합의하였다. 이어서 미국인의 베트남 단체여행이 허용되었고, 미국 생필품의 수출과 함께 NGO 활동과 통신개설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기업의 베트남 투자제한을 대폭 완화하였고, 베트남 통일에 따른 베트남공화국(월남)의 채무에 대한 상환협정을 체결하였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1964년부터 시작된 베트남에 대한 경제재제를 30년만에 완전히 해제하였고, 베트남은 라오스지역의 실종자 및 유해 발굴에도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듬해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선언하고 워싱턴과 하노이에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1998년에는 미국이 베트남에게 최혜국대우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민의 자유와 기타 인권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non-market economies)는 정상적 무역관계(NTR, Normal Trade Relations)를 적용할 수 없다”는 무역연장법의 잭슨-바닉조항(Jackson-Vanik amendment, 1974)의 적용을 면제하였다.
이 조항은 군사적 강제력이 아니라 경제적 정책수단으로 소연방의 유대인 이민제한을 포기하게 만들고, 15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트남은 종교적 조형물들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고산족에 대한 정착지원사업을 강화하였고, 미국과의 국교수립 이후에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아세안개발은행(ABRD), 아태경제협의체(APEC)에 가입하였다.
하노이 당서기와 국회의장을 거쳐서 베트남 국가주석과 공산당 총서기를 겸하고 있는 응우옌 푸쩡(Nguyen Phu Trong)은 1990년대 초반에 도이머이(Doi Moi)와 당의 노선 및 주요과제에 관한 다수의 해설을 발표하였다.
푸쩡의 논점들은 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재조명되었는데, 2004년에는 영문판이 발행되었다. 주제별로 재구성된 ‘Vietnam on the Path of Renewal’은 국가발전의 필요성에 의해 도이모이가 제기된 배경과 의의에서 출발해서 제6차 당대회의 의미, 시장경제와 민주적 정치, 도시와 농촌의 문제, 산업화와 현대화의 방도, 개혁개방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교훈, 사회주의 방향성과 문제점, 자립경제(self-reliant economy)와 국제경제 통합 등을 망라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또한 당의 지도적 역할과 관련해서 인민과의 결합, 민주집중제(democractic centralism)의 원리, 소연방(Soviet Union) 공산당의 붕괴원인, 집권당의 개념과 리더십의 방법론, 시장경제와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행정개혁의 비전과 방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견지 이유, 정부와 당 안팎의 부패문제, 당원과 대중의 관계강화, 호치민사상(Ho Chi Min Thought)과 집권당, 변화의 홍수 속에서 혁신의 빈곤, 당내 민주주의 확립을 이론적으로 검토하였다.
또한 그는 소연방(Soviet Union)이 해체되는 시점인 1992년에는 ‘Why did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collapse?’라는 표제의 해설에서 소연방 공산당의 붕괴원인을 분석하였다.
당시에 푸쩡은 당의 건실한 리더십이 부재했던 점, 당의 이론적 기초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부정한 점, 당 조직의 기본적 원리로서 민주집중제 원칙을 경시한 점, 그리고 인민과의 괴리와 지지의 심각한 손상,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의 포기와 인종차별 및 협량한 민족주의의 확산을 소연방 공산당의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또한 당이 국가의 역할을 대체하고 수행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보았다. 당이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면서 스스로 국가가 되었고, 국가 자체의 모든 일을 완수하려고 함으로써 실패했다는 것이다.
쿠바의 경우 : 1959년~2015년
1959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주도한 사회주의혁명으로 쿠바공화국(Republic of Cuba)이 수립되자 미국은 이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국유화조치로 미국의 자본이 대량 몰수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60년 10월을 기하여 쿠바에 대한 통상금지법을 선포하였고, 이듬해 외교단계를 단절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CIA가 지원하는 쿠바민주혁명전선(Cuban Democratic Revolutionary Front) 소속 1,400여명이 함정과 탱크를 동원하여 피그스만(Bay of Pigs)을 침공하였고, 1961년 10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카스트로를 겨냥한 몽구스작전(Operation Mongoose)을 승인하였다.
카스트로 정권을 고립시키기 위한 시나리오에는 관타나모만(Guantanamo Bay)에서 미국의 민간선박을 폭파시켜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방안까지 포함하였다. 실제로 1964년 통킹만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에서 북베트남의 2차공격은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미 의회는 가공의 2차공격에 대해서 ‘통킹만 결의’를 채택하였고, 1965년부터 지상군 파견과 전략폭격기(B-52)에 의한 북폭을 시발로 미국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서도 군사적 수단에 머물지 않고, 1962년부터 전면적 금수조치를 통해서 경제제재를 가하였다. 가장 먼저 미주기구(OAS, Organization of America States)에서 쿠바를 축출하고 교역을 금지하였다.
그로부터 36년 후에 쿠바는 남미의 사회주의 확산에 의해서 남미카리브공동체(CELAC, The Community of Latin American and Caribbean States)의 33번째 회원국으로 승인되었고, 2009년 미주기구(OAS) 총회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복귀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오바마 행정부는 중·남미의 우호적인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주기구를 운영하면서 쿠바를 고립시켰던 역대정부의 전략에서 탈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역대 정부는 1977년 카터행정부의 이익대표부 설치와 1994년 클린턴행정부의 이민협정 체결을 제외하고는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와 외교적 봉쇄에 의한 카스트로체제의 압박으로 일관하였다.
2002년 클린턴행정부 시기에 카터 전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하였고, 2004년에는 쿠바계 미국인의 모국방문(3년 1회)이 이뤄졌다. 2008년 남미와 카리브해의 국가들이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듬해 쿠바는 미주기구에 복귀하게 되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동등한 파트너십에 기초한 관계정상화를 모색하면서, 2009년 미 의회는 기존의 제제조치 중에서 여행·송금·무역 등에 관한 완화조치를 의결하였다.
구체적으로 의약품, 식품, 무역에 관한 규제 완화, 재미 쿠바인의 모국방문 횟수 및 기한의 철폐, 3천 달러까지 소지 및 송금 허용, 통신사업에 대한 규제 완화가 이뤄졌다. 2013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오마바 대통령과 카스트로 국가원수가 조우하였고, 캐나다에서 양국의 관계개선에 대한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2014년 12월 17일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공식성명을 발표하고, 존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이 쿠바와의 관계정상화 협상에 나섰다.
이듬해 4월 파나마에서 열린 미주기구 총회에서 양국의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7월에는 양국의 이익대표부가 대사관으로 격상되었다. 미국은 1982년부터 시작된 쿠바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33년만에 해제하고, 쿠바에 대한 제제를 전반적으로 완화 및 폐지하였다. 여행규제의 완화로 방문목적에 따른 12가지 비자를 발급하여 가족방문, 정부기관방문, 인도주의 프로젝트, 정보교류, 허가된 교역 등을 보장하였다.
또한 미국인의 쿠바물품 반입한도를 400달러로 상향하였고, 쿠바로의 송금한도는 분기별 2,000달러로 상향하였다. 또한 현지 방문에는 1만달러까지 허용하고, 쿠바계 미국인이 고국의 가족 및 친척에게 송금하는 경우는 무제한으로 허용하였다.
무역규제도 완화되어 농업, 건설, 자영업에 필요한 장비 및 자재의 수출, 컴퓨터 및 주변기기 등 통신기기의 수출, 인터넷망 구축 및 보수를 위한 제품의 수출, 전문적 연구에 필요한 장비의 수출을 허용하였다. 금융 부문에서는 미국의 기관이 쿠바에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고, 미국의 신용카드와 직불카드(Debit Card)를 쿠바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제3국에서 쿠바인에 대한 서비스 및 금융거래와 쿠바와 관련된 대규모 회의 및 전문가 회의를 허용하였다.
또한 미 항공사와 여행사의 양국 왕복노선과 쿠바의 국내노선 서비스를 허용하였다. 2016년 2월에 양국은 정기항공편의 1일 110회 운행에 합의하였다. 쿠바는 정치범 54명을 석방하였고, 미국은 4명을 석방하였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88년만에 쿠바를 방문하여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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