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윤리철학자이자 국내에서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의 저자로 알려진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94) 명예교수가 지난 7월 16일 타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가 평생에 걸쳐 인간의 의지와 기만에 관해 탐구했다고 전했다. 그를 세계에 널리 알린 소책자, ‘On Bullshit'에 관한 대목에서는 ’부정직(dishonesty)’을 키워드로 다루었다.
프랭크퍼트는 1929년에 미국의 어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유대계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됐으나, 어린 시절에 미국의 대공황이 덮쳐 양아버지가 실직하면서 가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언어학자의 딸이자 미국 템플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어릴 적에 배울 수 있었고, 유대인학교에 진학해서 히브리 언어와 역사에 정통하게 됐다고 한다.
과거에 그는 인터뷰에서 ‘On Bullshit'을 짧게 쓴 이유에 대해 “짧은 책에도 많은 개소리가 담길 수 있지만 긴 책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개소리가 포함되기 때문이다.”고 밝힌 적이 있다. 말이 많으면 개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가?
또한 그는 정치권에 개소리가 많다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학계에서 중요한 사상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모호하게 한다고 힐난했다.
철학계의 ‘개소리’에 관한 논의는 분석철학자 블랙(Max Black, 1909~1988)의 ‘The Prevalence of Humbug(1980)’에서 촉발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대계 후손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난 영국계 미국인 블랙은 수학철학, 예술철학, 언어철학 등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미국 코넬대 의대에서 ‘개소리(Humbug)’에 관한 구체적 예화들을 들어 강연했는데,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소리와 기만 및 자기기만에 관한 그의 통찰에 비추어 볼 때, 의대에서 개소리에 관한 강연이 이뤄졌다는 것은 개소리가 철학적, 윤리적 문제이자 정신의학적 탐구대상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개소리가 된다. 누군가 증인에게 진실만을 말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누군가’가 판사와 같이 중립적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경우와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바라는 피의자인 경우에 따라 ‘진실’이란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만약 피의자가 증인에게 ‘진실만을 말하라’고 촉구한다면, 그 의미는 더 이상 객관적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피의자 자신의 가치나 이해에 부합하거나 적어도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은 진술을 해달라는 메시지로 읽혀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진실만을 말해달라”는 것은 “진실만은 덮어달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거짓말을 해달라는 의도를 진실을 밝히라는 말로 둔갑시키는 것이 개소리의 신통한 매력이다. 모호한 언술로 부정직을 은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리어 타자를 적극적으로 기만하는 것이 정치적 개소리의 반전이다.
'개소리란 무엇인가'
카인의 동문서답이 개소리의 발화(utterance)에 관한 기원이라면, 장자의 ‘啍啍(tūn tūn)’은 명명에 관한 기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13p)
오웰의《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는 구절은 개소리의 본질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정치풍자의 명문이다. (67p)
'개소리란 무엇인가'에서는 타자에게 개소리를 하는 것이야말로 타자를 부드럽게 기만하거나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또한 개소리에 관한 문제는 결국 기만과 혐오, 가짜(fake)에 관한 문제라고 본다. 그러면서 우리 정치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풍자들 당해야 할 당사자가 세상을 훈계하고 풍자하려 드는 것이라고 질타하고, 과오의 대가를 치러야 할 당사자가 도리어 세상을 조롱하고 호통치는 것이야말로 개소리의 매력이라고 비꼰다.
대중은 사실 자체보다 그럴싸한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거짓말을 믿으려는 사람이나 거짓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보다 진지하고 충분하게 거짓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33p)
'개소리란 무엇인가'는 이런 행태가 횡행하는 근본적 원인을 진실 자체보다 진실해 보이는 것,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 그런 척하는 것을 더 실재적이라고 느끼는 대중의 인식론적 취약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적 맥락에서 개소리는 교묘하게 대중을 기만하려는 모호한 말들이지만, 노골적인 정치선전보다 연성화된 풍자적 언사로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개소리는 일회적인 실언으로 간주할 수 없는 습관성 기만의 언어적 표현이고, 대중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는 흑기가 연성화된 암수다. (83p)
특히 정치적 개소리의 특징을 동문서답, 책임전가, 아시타비, 허장성세로 프레이밍했다.
동문서답은 개소리의 모호성과 기만성을 포괄하면서도 뻔뻔함을 잘 드러낸다. 책임전가는 개소리에 내포된 기만적 의도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다. 아시타비는 자신은 명언으로 생각하지만 남들은 망언으로 여길 만한 개소리를 가리키는데 적절하다. 허장성세는 호언장담과 호가호위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을 상징한다. 즉 개소리의 종착역이다.
집단적 아시타비의 수혜자는 적대적 공생구조를 지탱하면서 진영논리로 적대하는 세력들이고, 중도적 해법이나 완충지대는 협살을 당하기 쉽다. 탈식민지·민주화 이후 집단적 아시타비는 정치적 정신이상을 부추겨서 좌우를 불문하고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성향의 집단적 부화 및 서식의 온상이 되었다.(72p)
결론적으로, 정치적 개소리는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한 결정권자가 대중을 부드럽게 기만하기 위해 연성화시킨 모호한 언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정신질환적 특성들을 용인하고 독려하는 것을 넘어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 헤어(Robert D. Hare)
‘개소리’는 정치적 행실이 형편없는 자들을 통렬하게 야유하는 뉘앙스를 담은 말인데, 도리어 사회적으로 유해한 말처럼 금기시하는 것은 개소리의 발화자들에 대한 풍자를 억압하는 것이다. (1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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