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에 관한 문제/대국민 통일사기극

대국민 통일사기극(4) 상호 국가승인의 문제

twinkoreas studycamp 2021. 6. 20. 17:29

 

 

남과 북은 쌍방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임을 주장하면서 상대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그 배경은 복잡다단하지만 상대를 국가로 승인하면 한반도를 통일할 수 없다는 쌍방의 통일지상주의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1년 UN 동시가입으로 전세계 UN 회원국들은 한국(ROK)과 조선(DPRK)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제외한 중국, 러시아, 영국 등의 수도에는 한국과 조선의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인위적으로 분단되었던 독일과 예멘은 서로 국가로 승인하였지만 평화적인 협상으로 재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독일은 흡수통일에 대한 상이한 시각이 있고, 예멘은 재통일 이후 내전과 무력통일을 거쳐 근래에 사분오열되었다.

 

대외적으로 별개의 국가로 승인된 조건과 쌍방의 국가적 승인이 통일의 결정적 장애가 아니라는 역사적 선례에 비추어 볼 때, 남과 북이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전체로서의 한반도 국가는 키메라(Chimaera)가 되어버렸다.

 

 

해방 이전에 광복군 기관지 <광복> 창간호는 '한국'이란 국호를 표제로 실었다.(국립중앙도서관)

 

 

한국의 대북 불승인 정책

 

과거에는 남이 북의 정부를 ‘북한 괴뢰집단(북괴)’으로 부르고, 북은 남의 정부를 ‘남조선 괴뢰도당’이라고 불렀다. 남에서는 남조선이란 말이 통용되지 않았고, 북에서도 북한이란 말이 통용되지 않는 가운데 1990년대 이후 이런 험한 표현들은 퇴조하였다. 그러나 쌍방은 상대의 국호, 국기, 국가, 국화, 국경일 등을 언급하는 것조차 죄악시하는 통제사회를 구축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1973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의 평화공존과 관계개선을 다짐하는 ‘6.23 선언’을 발표하면서 맨 끝에 “결코 우리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2018년의 4.28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한 국회비준과 관련해서 청와대 대변인은 “북한은 헌법과 법률체계에서 국가가 아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군사분계선 이북의 영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헌법적 근거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국가보안법(2조)에서 “반국가단체는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는 법적 근거로 이해되고 있다.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제3조)에서도 남과 북의 관계를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남과 북의 거래를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니라 민족 내부의 거래로 표현하였다. 제4조는 남북의 합의에 대해서 ‘정부와 북한 당국 간에 문서의 형식으로 체결된 모든 합의’라고 정의하였다. 남은 정부이고, 북은 당국이라는 것이다.

 

 

북의 교차승인 반대와 UN 동시가입

 

(I Diplomat)

 

상호 국가승인의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선도적인 발상은 1970년대 김대중의 ‘4국 교차승인’이었다. 미국, 소연방(Soviet Union), 중국, 일본이 대한민국(ROK)과 조선(DPRK)을 국가로 승인하여 국교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남북이 각자 국가의 기틀을 잡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여 체제경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이러한 발상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체제경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통일한다는 입장에서 미국과 일본이 조선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조선 정부는 교차승인이 영구분단을 초래하여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으로 보고 반대하였다.

 

이처럼 남북은 '하나의 코리아'(One Korea)에 대한 동상이몽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상대적으로 교차승인에 개방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1980년대 후반 소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퇴조하면서 체제경쟁에서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자 한국은 이른바 ‘북방정책’을 통해서 소연방, 중국, 동유럽 국가들과 연쇄적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이러한 조치를 ‘두 개의 코리아’(Two Koreas)를 공식화하는 반민족적 도발로 규정하고, 특히 중국과 한국의 국교수립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중국 내부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을 지낸 홍쉐즈 등이 조선의 입장을 고려하여 한국과의 국교수립에 반대했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과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수립과 1991년 남북의 UN 동시가입의 시기는 한반도 국가의 존재양식(mode of being)과 관련해서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독 브란트 내각의 동방정책과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서독은 1955년에 소연방과 국교를 수립했지만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고수하여 동독 고립정책을 지속했다.

 

1970년 브란트 수상이 ‘새로운 접근’을 주창한 에곤 바(Egon Bahr)를 모스크바에 보냈을 때 소연방은 동독을 승인할 것과 동유럽국가와의 관계정상화를 요구했고, 이에 기초해서 서독과 소연방은 모스크바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은 쌍방의 정식 국호인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사용하고 상대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기로 약조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소연방과 중국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고 조선이 그런 변화를 원치도 않았다. 소연방과 중국은 한국을 승인했지만, 미국과 일본은 조선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러한 비대칭 상태에서 조선은 미국의 반대표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지지로 한국과 함께 UN 회원국이 되었다.

 

남과 북은 내부적으로 기본조약도 없이 동시에 UN에 가입하였고, 가입 이후에도 서로의 국가성(stateness)에 대한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무능과 무책임을 드러냈다. 이로써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은 상대편의 국호를 부르면 죄악시하거나 범죄로 간주하는 사회 분위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후 조선은 중국과 베트남의 개방정책과 사회주의시장경제로의 이행으로 인하여 더욱 독특한 체제로 비쳐지면서 세계적으로 고립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북핵문제가 폭발하여 남북관계는 꼬일대로 꼬여서 수 차례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국제적으로 자국이 자주적이고 도덕적 판단능력을 가졌다는 점을 다른 나라들과 동등하게 인정되기를 희망한다고 가정하면, 한반도 국가의 상호 인정에는 민족 내부의 관계라는 특수성에 따라 상이한 체제에 대한 상대성 및 복수성을 수긍하는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 어려운 목표가 중첩되어 있다.

 

 

(전남매일)

 

 

미국의 불인정과 적대 정책

 

립셋(Seymour M. Lipset)은 미국이 전쟁을 하는 이유와 태도에는 ‘신의 선택과 은총을 받은 나라’로서 미국의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가 투영되었다고 보았다.

 

미국은 상대에 대한 악마화에 기초하여 전쟁 중에는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의 원칙을 견지하고, 적이 전쟁 후에도 존속할 경우에는 불인정(non-recognition)을 고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국과 직간접으로 전쟁을 치른 적대국 중에서 중국, 조선, 베트남, 쿠바 등을 오랜 세월 동안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와서야 미국은 중국, 베트남, 쿠바 순으로 승인하였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2020년대에 와서도 승인하지 않고 있다.

 

조선은 한국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전환되는 것을 하나의 조국(One Korea)를 포기하는 반통일적 영구분단으로 간주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요구하는 일견 모순된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조선과의 외교적 협상을 강조하면서도 각종 제재조치 등 대북 적대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남과 북의 불안한 분리와 불편한 동거의 상태를 새로운 관계성으로 전환하려는 논의를 시작함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가적 인정투쟁(recognition struggle)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인정(recognition)’이라 함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인식, 즉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사회를 바람직한 공동체로 받아들일 것이다.

 

윤리적 관점에서는 ‘인정’을 서로의 특수성과 공통성에 대한 상호존중으로 이해하고, 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는 ‘인정’을 서로 다른 생활방식에 대한 가치부여와 사회적 연대를 특징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나의 국가는 상대국의 인정을 받아야 객관적 상태로서 자주적인 국가성을 갖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도록 하려는 행위(인정투쟁)와 상대의 정체성을 인정하려는 행위(인정수행)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정 수행은 상대가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지위를 부여하거나 결합시키는 행위, 이미 존재하는 지위를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악셀 호네트)

 

프라크푸르트 학파의 막내라고 하는 호네트(Axel Honneth)는 인정투쟁을 사회적 투쟁의 도덕적 형식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에게 행해지는 사회적 무시가 그의 안녕을 해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도덕적 불의이고 인정관계를 둘러싼 무시와 모욕은 도덕적 훼손이기 때문에 그러한 불의와 훼손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투쟁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보았다.

 

인정투쟁의 궁극적 목표가 서로 인정하는 주관적 상태를 상호 간에 달성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인정투쟁의 목표는 상호 국가성을 승인하는 상호 주관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국가다”

 

“남과 북의 상호인정의 문제에 대해서 이진우 포스텍(POSTEC) 석좌교수는 남이라도 먼저 북을 국가로 인정할 필요가 있고, 북의 지위에 관한 내부적 합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국민일보, 북한은 국가다, 2018.11.13).

 

이 교수는 북을 국가로 인정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익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첫째, 통일이 ‘국가 간 평화’의 문제가 되면 진보와 보수의 간극을 좁힐 수 있고, 흡수통일이나 무력통일과 같은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제도화되고 투명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국가로 통일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가 중요하게 다뤄지게 된다. 이에 따라 체제의 경계와 단계적 접근, 장기적으로 체제수렴에 관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논의가 활성화될 것이다.

 

셋째, 민족통일을 최고선으로 생각하면 그에 수반되는 많은 문제점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게 되지만, 북의 국가성을 인정하면 통일지상주의에 잠복된 편향과 위험을 견제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을 국가로 인정함으로써 한반도의 국가이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는 것이다.”(김병규, 트윈 코리아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 3~4쪽)

 

2021년은 UN 동시가입(1991)의 30주년이다. 지난 30년 동안 평행선을 그은 쌍방의 국가 불승인 정책에 대한 냉정한 반성과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