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에 관한 문제/대국민 통일사기극

대국민 통일사기극(2) 할지론의 망령

twinkoreas studycamp 2021. 6. 18. 12:31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조선(DPRK)의 급변사태를 가정하여 ‘4국 분할통제론’과 같은 ‘할지론의 망령’이 고개를 드는 것은 남과 북의 상호 불승인이라는 한반도 국가의 무능에서 기인한다. 그 무능은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면 분단이 영구화되어 'One Korea'를 실현할 수 없다는 통일지상주의의 자연스러운 소산이다.

 

2004년 말에 중국 정부가 수립한 것으로 알려진 ‘신조선전략’은 한반도 38선 이북의 중국화 방안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었다(주간동아, 2008. 12.24).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안정은 중국과 조선의 일치된 목표이며, 조선이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되거나 급변사태로 인하여 완충지대가 상실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중앙·성(省)·지역별 경제협력을 통해서 동북 3성과 조선의 경제발전을 연계한다.

셋째, 개발위수(開發衛戍)를 통해서 조선족 사회를 한족화한다.

넷째, 황해경제권, 동해경제권에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다섯째, 신의주-평양 축선과 훈춘-원산 축선을 중심으로 남포, 평양을 포괄하는 공동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자원개발과 유통기지화 및 경제영역의 인적 인프라 구축을 병행한다.

여섯째,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병행하는 중국식 노하우를 전수한다.

 

20년 전에 중국이 세운 전략에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와 미래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중국의 대조선 전략을 고려하지 않는 통일구상은 조선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는 근본적 요인들을 간과하는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서울경제, 2009.9.9.)

 

미 펜타곤은 2009년도 ‘4년주기 국방검토 보고서’(Quadrennial Defense Review Report)에서 조선의 급변사태를 가정하고, 한국이 조기에 전역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에 중․러의 개입이 38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UN과 미․일이 평양과 평원선(평양~원산)까지 통제하는 시나리오를 제기했다.

 

이 시나리오는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와 현실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평양을 제외한 평남북과 양강·자강·함남을 중국이 통제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강원도에는 남북이 용인할 수 없는 일본의 개입을 끌어 들였다.

 

이러한 마구잡이 분할 구상은 미국이 38선을 획정하면서 드러낸 한반도의 역사지리와 지정학에 대한 무신경을 연상케 한다. 이런 망상은 한반도 국가가 용납할 수 없을뿐더러 실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여 폐기되었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확인한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를 적극 고려했다는 점에서 남과 북에 중요한 경고가 되었다.

 

남과 북이 앞뒤 생각 없이 쌍방의 국가성(stateness)을 묵살하는 것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의 전제인 것처럼 간주하는 풍토를 벗어나서 상호 국가로서 승인하는 유연한 전략으로 선회하지 않으면,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무결하게 배제할 수도 없는 어떤 사태에서 남이든 북이든 유능하게 수완을 발휘할 수 없다.

 

2015년 8월 4일 MBN 방송은 원전반대그룹으로 지칭되는 해커그룹이 공개한 자료 중에서 한국정부의 문서로 추정되는 자료에 관해서 보도했다.

 

이 문서는 2010년~2011년의 한미연합훈련과 관련된 평가서로 추정되는데, 중국의 제안이라는 명분으로 ‘4개국 분할통제 시나리오’를 소개했다.

 

(MBN, 2015.8.4.)

 

 

그 요지는 북한이 붕괴할 경우에 평양을 한․미․중․러가 공동으로 관할하고 한국은 평안남도와 황해도만 통제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남도를 중국의 통제에 맡긴다는 것이다.

 

평안북도는 한반도 지정학에서 대륙과 연계된 핵심적인 전략적 요충지인데, 이를 중국의 통제에 맡긴다는 것은 중국이 사실상 북한지역을 반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강원도, 러시아는 함경북도를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요식행위에 그친다.

 

 

분할통제론에 담긴 문제제기

 

조선의 급변사태를 가정한 ‘분할통제론’은 기존의 통일지상주의에서 벗어나 한반도에 대한 미·중의 지정학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환하는 지정학적 재탄생(Geopolitical Rebirth)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남과 북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외적으로는 각자 별도의 국가라는 국제법적 지위를 갖는 기이한 존재양식으로 인하여 가설적으로 일방의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예측불허의 불안정과 통일의 가능성이 혼재하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도전이 도사리고 있다.

 

유사시에 일방에 대한 ‘할지론의 망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남북 공동으로 혹은 남이든 북이든 평화적으로 한반도 전역을 통제하려면, 먼저 쌍방이 국제적 절차 및 조율의 근거가 되는 상호 국가승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외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면 동․서독처럼 협상으로 통합방안에 합의할 수 있는 법·제도적 기반을 준비하는 원려가 필요하다.

 

중국의 이해를 적극 반영한 것이든, 중국의 눈치를 본 것이든 간에 분할통제론의 핵심적 내용은 서북지역의 분할(평원선, 39도선)이란 점에서 중국과 조선은 사회주의 혈맹관계라는 측면과 함께 역사지리적으로 ‘천년의 숙적’이라는 역사지리적 관계가 혼재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하 트윈 코리아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 23~27쪽 참조)

 

 

한반도 할지론(division of area)의 역사

 

한반도 국가의 영토분할(territory separation)에 관한 역사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패수 이남을 약조한데서 찾을 수 있다. 패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요서의 대릉하·난하, 압록강, 청천강, 예성강, 대동강 등으로 해석이 분분하다.

 

당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점을 고려하면 당 태종이 신라에게 만주 이남을 약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 반대로 당과 원은 한반도 서북부와 동북부, 혹은 개경을 직할통치했다. 원은 철령과 자비령 이북을 1270년부터 20년 동안 직접 관장하였다.

 

한반도 국가의 내부에서 할지(division of area)를 타협의 대가로 제기한 경우들도 있었다. 서기 993년 요(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여 항복을 요구하자, 당시의 조정은 투항하자는 의견과 평양 이북의 영토를 할양(cession)하자는 할지론으로 양분되었다.

 

중군사 서희는 투항론과 할지론을 모두 거부하고 소손녕과 담판하면서 국호를 예로 들어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하고, 요와의 육상로를 차단하는 여진족이 차지한 고토를 되찾으면 사대(subservience to the stronger)의 방도를 찾겠다고 설득하였다.

 

요의 군대가 철군하자 서희는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하여 압록강 일대를 회복하는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안주와 선천을 평정하여 성곽과 보루를 설치함으로써 평북 일대를 고려의 영토로 확립하였다.

 

16세기 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다. 고대 중국의 우나라는 진나라의 가도멸괵(假道滅虢)을 허용했지만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1592년 히데요시는 평양성의 대동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을 조선의 영토로 하고 남쪽을 일본의 영토로 분할하는 방안을 강화조건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과의 강화협상이 교착되자 조선 8도를 도쿄의 각도에서 서북 4도(함경 평안 황해 경기)와 동남 4도(강원 충청 전라 경상)로 양분하자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300년 후에 한반도 중립화론을 거쳐서 한반도 할지론을 들고 나왔다. 1890년 3월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대신은 ‘외교정략론’에서 일본제국의 대외침략을 뒷받침하고 정당화하는 지정학적 논거를 제시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이 제기한 권세강역(Machtspare)과 이익강역(Interessensphare)의 개념을 ‘주권선’과 ‘이익선’으로 번안하여 대외침략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일본의 독립과 자위를 위해서는 주권선을 수호하여 타국의 침해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이익선(한반도)을 지켜서 본국의 지형적 유리함(일본열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는 일본의 국력을 고려하여 ‘한반도의 중립화’를 자국의 이익선을 지키는 현실적 방안으로 생각하였고, 중국과 열강도 호의적일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자국의 군사력이 강화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지정학은 일본의 독립은 주권선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익선을 방어하기 위해서 한반도의 내국화(식민지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선회하였다.

 

1896년 야마가타는 로바노프(Alexei B. Lobanov) 러시아 외무대신에게 북위 38도~39도를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일본의 세가 미비할 때는 한반도의 중립화를 주장하다가 국제정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분할로 선회하였다.

 

1900년 북청사변(의화단사건)이 발생하여 중국이 내분에 휩싸이자 일본 내부에서는 한반도를 3등분하여 북부의 2도를 러시아에 넘기고 중부의 3도를 조선의 영토로 유지하는 조건으로 남부 3도(충청 경상 전라)를 일본이 차지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당시 야마가타는 ‘북청사변 선후책’에서 대동강(평양)~원산항을 기준으로 한반도의 남과 북을 일본과 러시아가 양분하는 방안을 제시하였고,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과 고무라 주타로 러시아주재 대사는 분할선을 한반도(일본)와 만주(러시아)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은 잠시 한반도 중립화에 관심을 두기도 했지만, 국가적 역량의 증가에 비례해서 분할론과 합병론으로 변화하였다.

 

1903년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일본제국 어전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은 예리한 칼(利刀)과 같이 제국의 주요부를 향해 돌출한 반도로서, 다른 강국이 반도를 점령하게 되면 제국의 안전은 항상 위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흉노의 팔 vs 예리한 칼(利刀)

 

2001년 ‘새역사모임’이 제작한 역사교과서의 ‘청일전쟁과 중화질서의 붕괴’에서는 “조선반도는 일본열도를 향해 돌출한 흉기가 되었다”고 기술했다가 검정과정에서 ‘돌출한 흉기’를 ‘한 개의 팔’로 수정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를 ‘흉노의 팔’로 보았고, 한반도에서 강성한 세력이 등장하면 흉노의 팔에 베이징의 멱살이 잡힐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대륙의 예리한 칼(利刀) 혹은 대륙의 팔로 간주하였다.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과거에 여몽연합함대가 일본열도를 침공한 사건을 두고 두고 활용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대륙의 팔’을 비틀어 만주사태를 일으켜 대륙의 어깨(만주)를 장악한 뒤에 중일전쟁에서 대륙의 심장부(베이징)를 강타하였다.

 

서북지역과 관련해서 청일전쟁의 초기만 해도 일본군은 웨이하이·뤼순으로 기동하지 않고 원산과 부산을 통하여 상륙하였다.

 

일본의 신중한 접근에 따라 청의 직례총독(베이징, 허베이성, 허난성, 산둥성)이었던 리훙장은 북양함대가 서해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북상을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청은 충남 아산에 주둔한 병력을 평양으로 후진시키고, 부산에서 북상하던 일본은 충남 성환에서 약체화된 청의 군대를 상대로 서전(the beginning of a war)을 완승으로 장식하였다. 청은 평양성을 대륙방어의 최전선 기지로 설정하여 요새 27곳을 구축하고 1만 3천여명을 배치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의해 평양성을 상실하고 전쟁에 실패했던 일본은 1894년 9월 15일~16일 이틀 동안 벌어진 평양성전투에서 1만 6천여명을 투입하여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먼저 청의 방비가 철저한 대동강 서쪽 요새들을 포격하면서 동쪽 방향을 공격하고, 동시에 남쪽으로 기동하는 기만전술을 쓰면서 주력부대를 대동강 북쪽으로 도강시켰다. 중국은 평양성 함락 이후 한반도 서북부를 상실하면서 만주 방어에 실패하였고, 중일전쟁(1937~1945)에서 베이징․상하이․난징까지 유린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세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제1방면은 압록강을 건너 랴오닝반도로 진공하고, 제2방면은 보하이만을 통해서 뤼순과 웨이하이를 공략하고, 제3방면은 청 왕조의 요람이었던 선양으로 직진하였다.

 

평양~압록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서북의 육로와 주변 해로는 히데요시가 요구했던 정명가도의 핵심적 경로였다는 점에서 그의 후예들이 숙원을 푼 셈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두 번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미군과 UN군이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북진하자 중국 인민지원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서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치명적 반격을 준비하였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잊을 수 없는 대륙세력(Land Power)은 한국전쟁에서 한반도의 전체, 특히 서북지역을 해양세력(Sea Power)이 전유하는 결과를 절대로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