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사기(fraud)를 의도하지 않더라도 사기죄가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사기의 여부는 주관적 동기보다 객관적 결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사기란 진실한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이미 착오에 빠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누군가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을 때에 숨기면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
아무리 정치적 동기가 좋더라도 다수를 위험과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일을 하자는 동기가 어떤 수단이나 행위들이 초래한 결과를 모두 정당화할 수 없고, 동기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도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과 군사적 충돌 및 긴장, 그리고 상호 국가로서 불인정, 민간인의 교류왕래에 대한 국가주의적 억압은 통일지상주의의 일그러진 뒷모습이다.
우리의 소원? 섬뜩해지는 이유
고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우리의 소원’을 부르거나 들을 때, 남북이 원하는 통일체제 성격이 완전히 달라 가슴이 섬뜩해 진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한겨레신문, 통일 노래의 이중성 : 이데올로기 된 ‘통일’ 공허한 열창, 1998.12.10.)
영국주재 공사를 하다가 망명한 태영호(태구민) 의원은 “이 한 몸 통일에 바친 몸인데 테러에 죽는다면 그것이 되레 통일에 기폭제가 되고, 더 많은 동료에게 기폭제가 될 것이다”고 한 적이 있다.
탈북자나 월북자가 통일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쪽의 체제가 다른 쪽의 체제를 흡수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존의 한반도 평화담론은 평화정착, 평화공존, 평화체제 등을 거쳐서 결국은 평화통일을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평화주의로 분칠해도 통일에 대한 쌍방의 동상이몽이 하나로 합쳐질 수는 없다.
해방정국에서 적어도 1980년대까지의 통일지상주의는 비록 국제정세와 지정학적 구조의 규정성을 간과한 낭만적 민족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민족의 주체적 의지와 열의를 담은 진정성이 있었다.
하지만 1991년 UN 동시가입 이후 상대의 불인정을 고수하는 '반쪽의 국가주의(statism of half a country)'가 통일의 외피를 쓴 가식적인 통일지상주의가 자리잡았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개발독재의 후예들과 민주화세대가 대북정책에 관하여 가까운 장래에 어떤 획기적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비근한 예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4.27 판문점선언을 비준하는 방안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남북의 체제문제, 혹은 한반도 국가의 ‘제3의 대안체제’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전쟁과 이후 지속된 갈등으로 인하여 남북관계에 대한 이성적 논의가 이뤄지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남북협력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반대 편을 ‘반북․반통일’로 매도하고, 반대 편에서는 남북협력을 강조하는 쪽을 ‘친북․용공’으로 매도하였다.
하물며 체제와 의사결정체계가 상이한 남과 북이 평화통일로 가는 과도적 합의라도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선언, 10.4선언, 4.27선언 등을 열거하여 어떤 긍정적 측면만 강조한다면, 그 동기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대국민 통일사기극이 될 수 있다.
통일지상주의 기원 : 분단, 단정에 반대한 중도파
통일지상주의(統一至上主義)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남북의 체제차이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한반도 통일을 최선으로 여기는 맹목적 입장’이라고 한다(Naver, Daum, Zum 국어사전).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틀린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맹목에 관한 금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는 “직관 없는 내용은 공허하고 내용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는 칸트의 언명이다. 또한 비혼자였던 칸트는 “결혼으로 여자는 자유로워지고 남자는 자유를 잃는다”고 했는데, 맹목과 결혼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반도 국가의 발전적 현상타파의 방향에 대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가 분할점령되고 양쪽에서 단독정부가 추진되면서 ‘두 개의 민족국가’에 대한 거센 저항이 일어났다. 당시에 백범 김구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나 하나의 편안함을 위해 갈라진 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한반도를 압도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지정학적 원심력으로 인하여 ‘단일민족 단일국가’의 열망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모든 책임이 외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새로운 국가를 추진함에 있어서 전체 민족의 실력과 덕성이 분열과 분단을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절호의 해방공간에서 미․소의 이해대립을 절충하고 극복하여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것은 내적 균열이 외부 간섭 못지 않게 심각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백범이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 위의 38선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한 까닭이다.
백범의 호소는 감상적인 발상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통일(統一 : 하나로 합치는 것)에 앞서 통일(通一 :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 이뤄져야 한다는 통찰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의 통일지상주의는 정당한 공통의 근거가 있었지만, 쌍방은 지난 70여년 동안 통일(通一)을 이루려는 노력보다는 서로 배타적으로 한반도에서 유일하고 정통성 있는 단일국가임을 주장하며 일방에 의한 국토의 완정을 추구하였다.
남과 북은 통일문제를 민족주의적 정치동원에 이용하면서 기존체제를 강화하고 반국적(half a country) 국가주의(statism)를 공고히 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되었고, 1991년 UN 동시가입으로 ‘두 개의 코리아’가 세계적으로 승인되었다.
변질된 통일지상주의 : 일방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화
애초에 통일지상주의는 중도(좌․우) 진영에서 남북의 분열을 막으려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 조봉암 등의 노선에서 잘 드러났고, 이들은 남과 북에서 모두 폭력적으로 거세되었다.
장준하도 의문사를 당하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박정희체제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거세되었다고 의심하였다. 1972년 9월 장준하는 <씨알의 소리>에 기고한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모든 통일은 좋다”고 하면서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역설하였다.
장준하는 민족이 분단되면 역사의 실천 단위로서 하나의 주체적 자기 존재를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둘로 나누어진 그 한 쪽은 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 단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장준하문집 1, 54~59쪽)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애국지사들이 분단을 반대하고 ‘하나의 독립국가’를 지향한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남쪽의 통일관은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남진통일과 북진통일의 기세는 통일지상주의가 애초의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기존 체제의 국가주의적 동기에 자리를 내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전쟁에서 실현되지 못한 통일에 대한 욕구는 상대를 거세해야 충족할 수 있다는 적대적 원리를 강화시켰다.
1960년대 이후 쌍방의 체제경쟁이 본격화되고 냉전체제가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의한 통일’은 점차 비현실적인 목표가 되었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에 더하여 인구증가와 도시화, 경제성장에 의한 발전은 전쟁이 초래할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통일 캠페인은 더욱 강화되었다. 남과 북은 평화적 통일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대에게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유형의 통일(남진 vs 북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립화통일론과 연방제론 : ‘차이와 다름’의 공존
여러 갈래의 중립화통일론이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차이와 다름’의 공존을 강조하고, 단계적으로 접근하여 장기적으로 체제수렴의 과정을 거쳐서 완전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대체로 영세중립과 군축 혹은 비무장을 핵심적 요소로 삼았고, 점차 중립화와 연방제적 요소를 결합하는 방안으로 체계화되었다.
1988년 9월 문익환 목사는 ‘연방제 통일의 3단계 과정’(사회와 사상)에서 “7.4 공동성명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민주 원칙 위에서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를 알고, 서로의 다른 것을 용납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하자는 것”이라면서 ‘다름의 공존’을 강조했다.
독일통일 이후 강만길 교수는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고려하여 독일식 흡수통일이 아니라 ‘체제상승적이고 중화적인’ 통일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쌍방이 자신의 체제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살려서 제3의 체제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리영희 교수는 “50년 동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온 두 개의 사회가 다시 하나가 되자는데, 어떻게 한쪽만 변하고 다른 한쪽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리 교수는 남북이 서로의 변화와 이질화를 고려하되 절대화시키지 말고 수천년 동안 공유한 좋은 전통과 정신과 관습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접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차이와 다름의 인정’에 기초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게 동질성을 발전시키자는 민족주의적 동기와 미래 지향적 통일관을 담았다.
결국은 꽝
그러나 ... 영세중립과 체제수렴에 관한 논의는 쌍방의 ‘국가승인 문제’를 간과하고, 국내적으로 헌법적 과제에 대한 도전을 주저함으로써 점차 실천적 의미와 사회적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과 북이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조건에서 이른바 '통일학'이 등장한 것은 역설적으로 대국민 통일사기극이 보다 체계화되고 관념의 향연을 계속할 것을 암시하는 징조로 읽혀질 수 있다.
쌍방은 국민 혹은 인민의 사고를 어릴 적부터 ‘일방에 의한 국가주도형 통일’의 프레임에 가두려고 했지만, 국민과 인민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키워 왔다. 1991년 UN 동시가입 이후 30년이 흐르는 동안 남북관계가 여러 차례 요동을 치며 극적인 상황들을 연출했지만 결국은 ‘꽝’이라는 것을 국민과 인민은 거듭 확인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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