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에 관한 문제/대국민 통일사기극

대국민 통일사기극(3) 동서 파키스탄 vs 남북 예멘

twinkoreas studycamp 2021. 6. 19. 13:45

 

 

레비츠키(Levitsky)는 민주주의 수호의 핵심적 규범을 상호 관용(mutual tolare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라고 보았다(Steven Levitsky & Daniel Ziblant, How Democracies Die).

 

이러한 시각은 분열과 분단의 위기에 처한 나라들이 국제정치적 역학과 주변 강국의 지정학적 이해와 같은 외적 요인과 별개로 평화롭게 재통합하지 못한 내적 원인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겪지 않고 단일한 주권국으로 복귀하거나 재통합하였다. 분할된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한국전쟁(1950~53), 베트남전쟁(1955~75), 파키스탄전쟁(1971), 예멘전쟁(1972~73, 79)이 발생하였다. 중국과 대만은 전쟁 직전에 봉합되었지만, 아직도 전쟁의 불씨가 남아 있다.

 

예멘의 사분오열(SIPRI 2021). 기존 예멘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국제사회는 임의적으로 분할된 경계선이나 영향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무력으로 통일된 베트남을 제외하고 한반도는 전쟁 발발 71년이 되는 현재도 대치중이고, 예멘은 1990년대에 무력으로 재통합되었으나 장기내전으로 사분오열되었다.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으로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독립국가로 상호 승인하였다.

 

네 나라는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민족적), 체제 및 종교적 배경이 상이하지만 동족상잔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동·서 파키스탄과 남·북 예멘을 들 수 있다.

 

영연방에서 인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이유로 따로 독립한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이 지리적으로 격리된 조건에서 동파키스탄의 ‘내적 식민지화 논란’과 벵골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두 나라는 서로 국가로 승인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남북 예멘은 상층부의 합의에 의한 통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무력으로 국토를 완정했으나 내적 분열과 내전으로 인하여 국력을 소진하고 종국에는 사분오열의 파탄을 맞이하였다.

 

 

동·서 파키스탄의 분리 : 국가 대 국가로 상호 승인

 

동파키스탄이 자리잡은 벵골지역은 영국의 식민정책으로 힌두교 지대(서벵골)와 이슬람 지대(동벵골)로 분리될 뻔했지만, 당시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종교적 차이를 극복하고 영국의 분리정책에 저항했다.

 

하지만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힌두교 중심의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동맹의 단일국가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로써 이슬람교도들은 아프카니스탄 방면의 서파키스탄과 미얀마 방면의 동파키스탄으로 분리된 조건에서 ‘하나의 파키스탄’으로 독립국을 수립하였다.

 

진나((Muhammad A. Jinnah, 왼쪽)와 간디(위키피디아) 간디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적 차이를 넘어 단일한 연방국으로 남기를 원했고, 진나는 생각이 달랐다.

 

동·서 파키스탄은 종교적 일체성에도 불구하고 언어 및 문자, 인종적 특성, 전통문화 등에서 다른 점들이 있고 영토와 인구에서도 비대칭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서파키스탄 위주로 정부 구성이 이뤄지면서 정책결정 및 예산배분 등을 둘러싼 갈등과정에서 동파키스탄의 소외감과 자치요구가 커짐에 따라 내적 균열이 심화되었다.

 

서파키스탄에 자리잡은 중앙정부는 파키스탄의 국어를 우르두(Urdu) 어로 지정했는데, 동파키스탄에서 벵골(Bengal) 어를 국어로 인정하라는 시위가 발생하여 대학생 사망 등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파키스탄 정부가 벵골어도 공용 표준어로 인정하여 갈등을 봉합했지만 동파키스탄에 깊은 앙금을 남겼다.

 

파키스탄 국기

 

 

 

방글라데시 국기

인도와 서파키스탄은 3000㎞가 넘는 국경선에서 대치하면서 카슈미르 지역을 중심으로 세 차례 전쟁을 겪었다. 양국의 적대관계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의 무력진압에 대응해서 군사적으로 인도와 제휴했다. 인도는 동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통해서 동·서 파키스칸의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인도의 낡은 영국제 항모에서 발진한 구식 함재기들은 방글라데시에서 멀리 떨어진 본국의 항공지원을 받기 어려웠던 파키스탄 진압군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군부가 총선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내전상태에 이른 미얀마사태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라만의 사자후

 

1966년 2월 아와미연맹의 지도자인 라만(Sheikh Mujib Rahman)은 동파키스탄의 자치 등을 요구하는 ‘6개항’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벵골민족에게 ‘자유의 헌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벵골의 친구’라는 뜻의 봉고본두(Bangabandhu)로 불리웠던 벵골 민족주의자였고, 이로 인해서 파키스탄 정부의 탄압을 받아 수차례 투옥되었다.

 

1970년 총선에서 중도좌파 노선과 친인도 성향의 아와미연맹(Banlgadesh Awami League)이 동파키스탄에 할당된 의석 162석 중에서 160석을 석권하자, 파키스탄 정부는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파키스탄에서 사실상 집권세력이 된 아와미연맹은 서파키스탄에서 1석도 얻지 못하였다.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처형된 라만(Sheikh Mujib Rahman)은 방글라데시의 국부로 기억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이 방글라데시에 수출한 2천톤급 호위함은 ‘BNS 봉고본두’로 명명되었다.)

 

 

 

1971년 3월 26일 라만은 아히야 칸 대통령과 알리 부토 수상이 이끄는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파키스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그를 체포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파키스탄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벵골인들이 대량 살상을 당하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발발하였다. 1971년 연말에 인도군이 가세하여 마치 총독부의 군대처럼 군림하던 파키스탄 정부군을 패퇴시켰다.

 

동파키스탄을 내적 식민지로 취급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파키스탄 정부가 마침내 항복하고, 군대가 물러나자 이듬해 부토 수상이 라만의 석방을 발표하였다.

 

파키스탄 정부군(서파키스탄)의 항복 조인식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 정부가 2개의 전선(서부, 동부)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은 동부전선에 등장한 인도의 항공모함이 예상치 못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에 발진한 낡은 전투기들이 동파키스탄의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2개의 전선으로 갈라진 파키스탄군의 전력에 파열구를 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벵골 독립주의자들의 독립의지를 고양시켰다.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를 승인하지 않다가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전환했다. 1985년 지아울하크 파키스탄 대통령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기념비를 참배하고 “당신들의 영웅은 우리의 영웅이다”고 밝혔다. 이듬해 엘사드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파키스탄을 답방하였다.

 

지리적 격리, 벵갈 민족주의라는 차별성을 고려하더라도 동·서 파키스탄이 전쟁을 1년 이상 끌지 않고, 상호 불승인을 조속히 포기하고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전환한 것은 장기내전과 무력통일의 후유증으로 사분오열된 남·북 예멘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남북예멘의 비극 : 내전과 사분오열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예멘은 19세기에 영국의 남예멘 점령으로 분리되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북예멘은 예멘아랍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남예멘은 소연방(Soviet Union)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성향의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북예멘 국기

 

 

남예멘 국기

 

남·북예멘은 이념갈등과 국경문제로 세 차례 전쟁을 벌였고, 협상과정에서 북예멘의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반목이 심화되었다. 1990년대 세계적인 탈냉전 기류를 타고 쌍방은 통일에 합의했으나 권력배분의 조화, 즉 ‘이익의 균형’에 실패하여 내전이 발생했다.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한 북예멘이 승리하여 예멘공화국을 선포했으나, 결과적으로 무력통일은 비극의 종식이 아니라 더 큰 비극의 개막이었다.

 

 

2004년 시아파 무장단체 후티(Houthi)가 서북부에서 할거하다가 10년 동안 세력을 키워서 마침내 수도 사나를 함락시키고 대통령궁을 차지했다. 후티는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나 남예멘지역을 중심으로 정부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일방의 우세를 허용하지 않는 지리한 내전으로 UN은 물론이고 이란·사우디아라비아·UAE 등 역내 국가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갖고 개입하면서 전국토가 사분오열되었다.

 

2018년 UN의 중재로 휴전이 이뤄지고 주변국의 개입으로 하디 정부가 대표성을 회복하였으나 후티 반군과의 군사적 충돌이 종식되지 않고 있다. 많은 국가에서 예멘은 여행금지구역으로 관리하고 있다.

 

역사와 조건이 다른 해외 사례들은 한반도 국가에 대한 논의에서 제한적인 의미를 갖지만, 동서 파키스탄과 남북 예멘의 극명한 대비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방의 힘이 확고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고려하지 않고 완력에 의한 통일은 그 동기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시기에 완력에 의한 통일이 이뤄지더라도 쌍방이 진정으로 내적 균열을 치유할 역량이 미비할 경우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에 의해서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예멘은 기존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는데 그치지 않고 재앙적 파탄을 초래하였다.

 

이런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 수호의 핵심규범일 뿐만 아니라 분단되거나 분열된 나라가 재통합을 모색하는데서 어떠한 역량과 덕성을 준비해야 하는지, 또한 그러한 역량과 덕성이 미비할 경우에 어떠한 한계설정이 필요한 지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