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의 핵 개발 경위는 소연방(Soviet), 중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드러났다.
1946년 베빈(Ernest Bevin) 영국 외무장관은 “내가 당한 것처럼 이 나라의 다른 외무장관이 미 국무장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비용을 불문하고 핵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틀리(Clement R. Attlee) 수상도 핵무기가 없으면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하였다. 군 최고지도부에서도 핵 자주권을 배제하여 최고의 무기를 타국에 의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1947년 애틀리 내각은 핵개발의 당위성을 간명하게 정리하였다. 핵무기 보유는 강대국의 역할과 영향력을 담보하는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고, 서유럽과 영국 본토에 대한 소연방의 의 공격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은 미국의 반대에 대해서 하이드파크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합의한 핵개발 협력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1952년 핵폭탄 1호 ‘블루 다뉴브(Blue Danube)’의 폭발실험(Code Name Hurricane)에 성공하였다.
1960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소연방도 알고 있는 핵기술을 동맹국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밝혔고, 미 의회는 핵기술 및 정보의 공유를 금지한 맥마흔법을 완화하여 미국과 영국의 핵무기 협력이 이뤄졌다.
1958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NATO 사령관에게 프랑스에 배치된 핵무기의 위치를 보고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담했다. 그는 핵무기가 없으면 주권국이 될 수 없고, 미국의 위성국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드골은 현대 군사력의 기본을 핵무장으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에 나섰지만, 미국·영국·캐나다의 우라늄공급통제조약에 의해서 견제를 받았다. 또한 UN 안보리는 프랑스 핵개발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실시한 작전명 ‘푸른 캥거루쥐(Gerboise Bleue)’의 핵실험에 성공했고, 핵무장을 통해서 미국의 영향권에서 독립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되었다.
중국, 인도, 파키스탄 : 지정학적 요인에 의한 점진적 확산
소연방(Soviet Union)과 정체성 논쟁과 국경분쟁을 겪은 이후로 중국은 소연방의 핵보유에 대해서 더 이상 무심하기 어려워졌다. 겉으로는 핵폭탄 수백개를 맞아도 끄덕 없다는 식으로 허풍을 떨었지만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여 핵 보유국 대열에 가세하였다. 원래 마오쩌둥은 핵무기에 대해서 ‘쓰지도 못할 물건’이라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지만, 중국 지도부는 양안위기와 중소분쟁 등을 겪으면서 핵 위협(외교)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절감하게 되었다.
소연방의 핵개발은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을 자극했고, 아시아에서 중국의 핵개발을 자극했다. 또한 중국의 핵개발은 국경분쟁을 겪은 인도를 자극했다. 네루(Jawaharlal Nehru) 인도 수상은 원자력 에너지를 다른 목적에 쓰이도록 강요를 받게 된다면 누구도 막을 권한이 없다는 원칙을 천명하였고, 1974년에 인도는 작전명 ‘미소 짓는 부처’(Smiling Buddha)라는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도의 핵개발은 분리독립전쟁을 치른 파키스탄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알리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은 풀을 뜯어 먹는 한이 있어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강고한 원칙을 세웠고, 그를 교수형에 처한 후임 정부도 핵개발 계획을 폐기하지 않았다.
핵무기의 '점진적 전파(gradual spread)'에서 1940년대 러시아(소연방)-1960년대 중국-1970년대 인도-1990년대 파키스탄-2010년대 조선(DPRK)의 경우는 유라시아대륙의 중심(하트랜드) 및 주변지대(림랜드)에 걸쳐 국경을 접한 국가들에게 각기 다른 지정학적 요인이 작용하면서도 지리적으로 연결된 5개국에 걸쳐 장기적이고 연쇄적인 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파키스탄과 조선의 핵개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비공식적으로 지원했다는 주장이 있다. 파키스탄과 조선은 중국을 거쳐야 했고, 쌍방은 중국의 묵인 아래 핵기술과 미사일기술을 교류했다는 것이다.
이집트, 이라크, 리비아는 실패, 이란은 ?
이스라엘의 핵개발도 이슬람국가에 포위된 지정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핵개발이 가능했던 것은 닉슨(Richard Nixon) 미 대통령과 메이어(Golda Meir) 이스라엘 수상의 비밀협상에 의한 묵인과 프랑스의 기술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른 아랍 국가들의 핵보유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고, 이란은 갈림길에 서 있다.
“2007년 1월 핵물리학자 아르데시르 하산푸르의 가스중독 사망, 2009년 핵물리학자 샤흐람 아미리의 실종, 2010년 핵물리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와 이란 원자력기구의 책임자 마지드 샤흐리아리의 폭사, 2011년 핵물리학자 다르이시 레자에이의 총격 피살, 2012년 핵물리학자 모스타파 아흐마디 로샨의 폭사, 2020년 모센 파크리자데의 총격 피살이 이어지고 있다. 2018년에는 이스라엘의 모사드(Mossad)가 테헤란의 비밀시설을 급습해서 비밀문건들을 확보했고,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이스라엘 수상은 그 자료들을 이란의 핵개발 증거라고 밝혔다. 이러한 연유로 이란 정부는 과학자들에 대한 테러의 배후로 이스라엘과 미국을 의심하고 있다.
2020년 11월에 피살된 모센 파크리자데는 이란의 핵개발 프로젝트에서 미국의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소연방의 이고르 쿠르차토프(Igor Kurchatov), 프랑스의 베르트랑 골드슈미트(Bertrand Goldschmidt), 이스라엘의 데이비드 에른스트(Ernst D. Bergmann), 중국의 덩자셴(Deng Jiaxian), 인도의 아불 압둘 칼람(Avul P. J. Abdul Kalam) 전 대통령, 파키스탄의 압둘 칸(Abdul Q. Kahn)과 같은 지도적 위상을 가진 과학자로 알려졌다.”(트윈 코리아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 중에서)
공격적 현실주의자인 미어세이머(John J. Mearsheimer)는 조선(DPRK)이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 뒤에는 중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중동의 반미국가들처럼 미국이 막 다룰 수도 없는 조건에서 체제변화(regime change)와 비핵화라는 모순된 목표를 병행 추진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미국은 조선의 기존체제에 대한 안전보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제재와 핵협상의 이중적인 전략을 지속함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핵보유국과 전쟁을 꺼리는 미국’에게서 체제를 수호하려면 핵 포기보다는 핵 보유의 동기를 강화시켰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조선의 기존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체제의 안전보장을 담보로 하는 비핵화 협상을 반복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모든 악의 근원을 북핵에서 찾는 피상적인 생각이나 제재를 최고로 강화하면 굴복할 것이라는 주관주의로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 셔먼(Brad Sherman)은 조선의 핵과 미사일을 동결하는 ‘부분적 비핵화’가 현실적인 목표라고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리비어(Evans J.R. Revere)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수석부차관보는 중국이 조선의 비핵화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핵 동결 및 확산 방지로 중심을 이동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북핵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후 75년 동안 강대국 간의 전쟁을 피하고 장기평화(long term of peace)를 이룬 것은 핵무기의 역할이 컸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마오쩌둥이 ‘쓰지도 못할 물건’이라고 보았거나, 키신저 등이 지적했던 것처럼 전략핵이 사실상 사용불능으로 인하여 억지력 논리가 공허해졌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핵은 전략적 무기로서 전쟁의 억제에 기여했다는 분석들이 많다.
핵무기 사용에 대한 파멸의 공포가 강대국 사이의 전쟁 대신에 장벽구축(베를린, 38선, 철의 장막, 죽의 장막 등)과 재래식 대리전(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으로 축소되었고, 이러한 기초 위에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면서 제한적으로 지역패권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냉전이 구조화되고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핵독점이 깨지고 핵보유국이 9개국(조선 포함)으로 늘어나면서 ‘공포의 균형’에 기초한 지구적 세력균형이 형성됨으로써 강대국의 전면전이 초래할 제3차 세계대전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나 전략핵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전술핵을 개발했던 핵 보유국들은 전술핵도 실제 사용이 어려워지자 최근에 저위력 핵무기를 도입하고 있다. 미국은 최저 0.3kt 수준의 핵탄두를 중장거리 미사일에 탑재하는 새로운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핵 없는 시대'는 고사하고 ‘제2의 핵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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