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국의 자장가에는 “못 하나 빠져 편자를 잃고, 편자가 없어 말을 잃고, 말이 없어 기수를 잃고, 기수가 없어 전쟁에 지고, 못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24일 바이든 미 대통령은 “못(nail)이 없어서 편자(horseshoe)가 사라졌고, 편자가 없다 보니 말을 잃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왕국이 파괴되었다”면서 컴퓨터와 자동차 등의 생산에 필수적인 반도체(semiconductor)를 ‘21세기 편자의 못’으로 비유하였다.
중국의 반도체 점유율은 15%이지만 급성장하고 있고,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37.5%)은 이미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희토류의 58%를 공급하고, 코로나사태 이후 백신 및 의약품에서도 세계적 지위를 높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중국과의 산업 및 무역전쟁이 첨예화되는 국면에서 반도체, 자동차용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의 글로벌 공급망에 관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는 자리에서 나왔다.
"Remember that old proverb : “For want of a nail, the shoe was lost. For want of a shoe, the horse was lost.” And it goes on and on until the kingdom was lost, all for the want of a horseshoe nail. Even small failures at one point in the supply chain can cause outside impacts further up the chain.
Recently, we’ve seen how a shortage of computer chips — computer chips like the one I have here — you can hardly see it I imagine; it’s called a “semiconductor” — has caused delays in production of automobiles that has resulted in reduced hours for American workers. A 21st century horseshoe nail."
(Remarks by President Biden at Signing of an Executive Order on Supply Chains, February 24, 2021, White House Briefing Room)
패권경쟁의 신호탄 : 미·중의 첨단기술 각축
모델스키(George Modelski)의 ‘리더십 장주기이론’(Theory of Leadership Long Cycle)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무역분쟁과 첨단기술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출되는 배격을 설명해 준다.
장주기이론의 관점에서는 경제순환이 근본적으로 선도부문(leading sector)의 기술혁신과 연관되어서 움직이고, 장기적인 경제사이클이 국제질서의 리더십주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혁신적 기술혁명에 기초해서 선도산업을 일으킨 나라가 세계적 지도국가로 부상하였고 국제질서를 주도하였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는 패권안정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에 기초하여 전간기(interwar)에 세계공황을 초래한 경제위기의 원인을 지배적 경제를 가진 세계적 지도국가의 결여에서 찾았다(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
태평양의 충격(Pacific Impulse)과 동아시아의 발흥(rising)
19세기의 세계를 ‘유럽 중심의 시대’라고 한다면, 20세기는 1,2차세계대전과 사회주의혁명을 거치면서 ‘미국과 유럽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럽중심적(Eurocentric) 관점으로는 더 이상 21세기를 설명할 수 없다.
일찍이 대소 봉쇄정책을 입안한 조지 케난(George Kennan)은 미국, 소연방(Soviet Union), 영연방, 유럽대륙, 동아시아가 전후 세계의 산업과 생산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
인도 태생이자 이슬람 계통의 마흐부바니(Kishore Mahbubani) 전 싱가폴 UN대사는 오래 전부터 21세기에 대서양의 충동(Atlantic Impulse)과 태평양의 충동(Pacific Impulse)이 경합할 것으로 전망했다. 마흐부바니는 21세기를 유럽과 북미, 그리고 동아시아가 경합하는 시대로 내다보았다.
새로운 동아시아의 중심에는 중국이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 국가는 유럽과 북미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관점에 안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중심적(Sinocentric) 관점으로 회귀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대한민국 길을 묻다 : 미·중 경제패권 전쟁(5.15. PM 10:30)
역사적으로 기술혁신이 패권국의 지위에 변화를 초래하였다는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최근에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배터리, 미래자동차,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5G 등을 망라하여 새로운 기술표준과 원료 및 중간재를 장악하려고 경쟁하는 것은 한반도 국가에게 예고된 도전이었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5월 15일 KBS-1TV 특집 ‘대한민국 길을 묻다 : 미·중 경제패권 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반도체 부문에서 첨예화되었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으로 은유하고, “못이 없으면 왕국은 멸망한다”고 경고했다. (이하 사전공개 내용의 골자)
“반도체를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미래산업의 쌀, 반도체를 손에 넣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자동차 반도체로 끝나지 않는다. 첨단산업의 핵심전력인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 코로나발 자국중심주의 공급망 전쟁이 시작되면서 오프 쇼어링의 시대는 끝나고 리쇼어링의 시대가 왔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코로나 위기에서 마스크 생산시설의 부재로 톡톡히 곤혹을 치른 미국이 국내 생산능력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의약품 및 핵심 장비를 자국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넘어서 21세기 산업의 쌀인 반도체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해를 갖게 되었다. 최근에 바이든 행정부가 LG와 SK의 소송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자국내 투자를 지속하도록 견인하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로 하여금 반도체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유도하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미국은 자국의 GDP 40%를 넘는 도전자의 무역, 금융, 자원 등에 대한 제재조치(sanctions)를 구사했다. 일본이 그러한 수준에 접근하다가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중국은 10년 전에 그러한 수준에 접근했지만 아직 건재하다. 오히려 여러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추월에 나서고 있다.”
미 행정부는 화웨이를 제재하면서 타격을 주려고 했으나, 중국은 내수기반을 확장하고 원자재 및 중간재를 확보하는 장기주의적 대응으로 선회하면서 국제 원자재 흐름과 반도체(칲) 수급에 교란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강경정책이 중국에 예방주사로 작용해서 도리어 면역성을 높여주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이 패권경쟁을 서두르는 배경에는 미국의 상대적 쇠퇴라는 환경변화 외에도 프랑스 인구학자 아타네(Isabelle Attané)가 지적한 것처럼 급속한 노령화로 인하여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버리는 것’(未富先老)에 대한 경각심이 작용할 것일 수도 있다.
안보는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경제는 리소어링(Reshoring) ?
미국은 2020년대를 ‘거대한 힘의 경쟁’이 일어나는 연대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이 경제력을 앞세워 역내 혹은 지구적 차원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이 구축해 놓은 국제질서와 지정학적 핵심 포인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군사적 차원에서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이 재부상하고 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서 역외균형(카스트태프트 밀약)-역내균형(38선 분할점령)-역외균형(애치슨 라인)-역내균형 및 현상유지(한국전쟁~2020년)을 구사해 왔다.
지난 세기에 미국은 본토 밖의 문제에 대해서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을 지원하는 방식을 유지하다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의 경찰국가로 변모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등에 군대를 상주시키는 역내균형(Onshore Balancingy)의 비중이 급증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이후 지속된 현상유지 정책은 이라크전쟁과 아프카니스탄전쟁을 거치면서 각종 부담과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역외균형으로 선회하자는 요구에 직면하였다.
1997년에 레인(Christopher Layne)이 대외전략에서 역외균형을 강조하였고, 이후에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월트(Stephen Walt), 포터(Patrick Porter) 등이 논의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과거 영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을 유럽대륙에 대한 역외균형의 관점으로 간주하였고, 미국과 일본의 역사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났다고 보았다.
미어샤이머는 1930년대 대외정책과 1940년대 ‘무기대여원조’(Lend-Lease aid)를 통한 영국과 소연방에 대한 지원, 이란·이라크전쟁(1980~88)에 대한 접근을 역외균형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하였다. 미국은 이란이 지역의 패권국가로 부상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이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라크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던 것이다.
미국사회는 2016년 대선을 계기로 유럽과 중동에 주둔하는 군대의 철군 및 감축을 요구하는 압력이 증가하였다. 2016년 4월 퓨 리서치(Pew Reseach)의 조사결과에서 응답자의 57%가 미국은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고 타국은 가능한 최선을 다해 스스로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자는 의견에 동의함으로써 국내 여론이 전반적으로 역외균형으로 기우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해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 공화당후보와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민주당후보가 역내균형에 기초한 동맹관계 및 현상유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기할 때 많은 청중이 호응하였다.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역내(Onshore)-역외(Offshore)’의 무게중심이 달라졌으나, 최근에는 아프카니스탄전쟁의 종결과 유럽 주둔 미군의 축소 검토 등으로 중동과 유럽에서는 역외전략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드레즈너(Daniel W. Drezner)는 역외균형이 NATO, 발칸 및 우크라이나 등에 중대한 도전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The curious case of Offshore Balancing, Washington Post, 2016.6.15).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군사적 굴기(rising)에 대응하기 위한 쿼드(Quad)와 함께 주한미군 유지를 비롯한 역내균형(Onshore Balancing)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한편 경제분야에서는 중국의 굴기와 더불어 미국 내부의 일자리 논란 등 계층갈등이 심화되고, 지난해 코로나사태를 거치면서 ‘역내 회귀’(Reshoring)로 급선회하고 있다.
자이한(Peter Zeihan)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한 핵심적 이유를 체제가치의 수호와 에너지의 안정적 수급의 필요성에서 찾았다(The Absent Superpower).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에서 제이미 카터 미 대통령은 원유가격 인상과 금수조치를 단행한 산유국들에게 “에너지는 미국의 생존문제이므로 에너지 차단으로 위협하는 세력에게 군사력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였다(Carter Doctrine, 1980).
40년 쯤 지나 트럼프 행정부에서 ‘무역안보론’(Trade Security Theory)을 설파했던 나바로(Peter K. Navarro)는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축소하고, 중국의 기술패권 계획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 세계경제에서 북미와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북미가 우위에 있었지만, 지금은 북미와 동아시아의 비중이 거의 비슷해졌다.
이러한 변화를 강조하는 마흐부바니 등은 트럼프~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한 새로운 동맹전략, 즉 쿼드(Quad)가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동맹으로까지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경제적 관계가 밀접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쿼드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체계로 재정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반도 국가의 딜레마와 새로운 접근
남과 북은 안보와 경제에서 이해를 달리하고 있지만, 전체로서의 한반도 국가는 해양세력(Sea Power)과 대륙세력(Land Power)의 지정학적 이해를 완충해야 하는 딜레마를 공유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을 유지하면서 자국에 삼성, 현대, LG, SK, 롯데 등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군사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서 경제적 수단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미중갈등의 한복판에서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관계와 경제협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와의 무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과거에는 대내적으로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논리적 조합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고, 대외적으로 미국과 안보적 협력을 기하면서 중국과 경제적 협력을 발전시킨다는 이중적 대외정책이 어느 정도 통용되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이 안보와 경제를 일체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중국도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한 보복적 대응을 강화하면서 장기간의 ‘정경분리’에서 벗어나 경제를 안보 및 외교적 수단으로 구사하는 행태가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장기간 지속되었던 한반도 및 동북아의 세력균형이 동요할수록 더욱 심화되면서 한국의 경제와 안보에 심각한 딜레마와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1991년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 이후 30년 동안 지속된 ‘안보와 경제의 분리적 접근’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즉 미국의 맹방으로서 안보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경제대국 중국과의 경제협력으로 번영을 구가하겠다는 국가방략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평온했던 시기(1980년대~2000년대)에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2010년대 이후에는 약발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미·중이 한국의 선택을 양해하기 보다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지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미중의 반도체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고, 제2의 사드사태로 인한 중국의 경제보복을 예방하고 우회하는 외교적 수완도 중요하다. 하지만 남과 북이 서로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대응하더라도 한반도 국가의 지정학적 운명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지난 30년 동안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서 평화를 유지하고 성장을 추구했던 국가전략은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되면서 중대한 기로에 처했다.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반도 국가의 지정학적 구도를 사상(捨象)하고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여 접근해도 가능했던 방식들은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균열이 심화될수록 그 유효성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개의 코리아(Two Koreas)의 조건에서 남과 북이 개별적으로 전략적 지위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상위의 전략적 행위자들(strategical players)이 구축한 틀에서 각자도생을 모색하는 전술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고, 종국적으로 전술국가적 존재에서 전략국가적 존재로의 ‘존재이전’(Shift from being a tactical state to being a strategical state)을 실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국가는 지정학적 재탄생(Geopolitical Rebirth)의 조건에서 전략국가로 존재이전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 한반도 국가의 영세중립을 또 다른 상위의 목적, 즉 재통일을 위한 경로 및 수단으로 접근하면 지정학적 세력균형 및 현상유지의 규정적인 힘들에 의해서 실현 가능성도 희박해지고 경로의 불확실성이 증폭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을 평화의 수단으로 간주하거나, 영세무장중립을 통일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극복하고 그 자체로 한반도 국가의 장기적 목적으로 바라보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트윈 코리아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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