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경쟁

그로미코 회고록 : 마오쩌둥의 핵전쟁 구상

twinkoreas studycamp 2021. 3. 28. 14:07

중국의 핵개발을 둘러싼 비화 중에서 중·소의 갈등을 잘 드러낸 사례로는 소연방(Soviet Union)의 최장기 외상(1957~1985)이었던 그로미코(Andrei A. Gromyko)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을 들 수 있다.

 

1988년 2월 22일 뉴욕타임스(NYT)는 ‘Gromyko Says Mao Wanted Soviet A-Bomb Used on G.I.'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로미코 회고록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였다.

 

 

 

그로미코 회고록에 따르면 1958년 8월 양안(兩岸)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에서 마오쩌둥은 미군을 중국 대륙으로 유인해서 핵공격을 가하는 방안을 흐루쇼프에게 제안하였다. 하지만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한 그로미코 외상은 소연방의 리더십을 위해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알려지자 소연방의 역사학자들은 중국 지도자가 3억명의 인민을 잃더라도 재래전으로 자본주의자들을 끝장내고 핵전쟁에서 살아남는다고 믿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마오는 그로미코에게 중국군이 후퇴하면서 미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면 소연방이 수단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그로미코는 마오의 대담한 계획과 핵 논의에 관한 그의 무신경한 태도에 놀랐으며, 중국측에 소연방의 긍정적 반응이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그로미코의 회고가 사실이라면, 1958년 9월 진먼과 마쭈(the islands of Quemoy and Matsu)를 둘러싼 충돌이 국제적 위기로 고조되었다는 점에서 마오는 사전에 미국과 대만을 겨냥한 원대한 전쟁구상을 시도했다가 소연방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1958년에 중국은 독자적인 핵 억지력을 갖기를 원했고, 소연방은 중국에 핵무기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가 1959년에 이를 철회하였다.

 

소연방은 마오를 무모하다고 비난하였고, 중국은 소연방이 양국의 협력관계를 저버렸다고 힐책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64년에 중국은 독자적인 핵개발에 성공하였고, 다시 5년 후인 1969년에 중소 국경분쟁이 발생하였다.

 

그로미코의 회고 중에서 마오가 자국의 영토에 핵폭탄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는 내용에 대해서 진위 논란이 일었다. 실제로 마오의 인민중심 국제정치관은 핵폭탄의 위력을 대륙 인민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주관주의가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과 그러한 제안이 사실이라도 진의는 소연방과 미국에 대한 블러핑(bluffing)이라는 견해가 혼재하였다.

 

 

NYT(1988.2.22)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취재에 응한 케넌(George F. Kennan) 전 소연방주재 대사는 마오의 계획에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그로미코가 날조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견해를 밝혔다.

 

케넌은 그로미코를 사실적이고 정확하며 진지한 인물로 평가하고, 마오의 제안에 대한 그로미코의 거절은 1958년 당시 중소관계가 악화되는 국면에서 중국에 대한 소연방의 심원한 불신이 투영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MBC

 

 

※ G.I : Gromyko Says Mao Wanted Soviet A-Bomb Used on G.I.'s (NYT)

 

흔히 G.I Joe는 미군을 집단적으로, 혹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을 망라하는 불특정한 미군을 통칭한다. 1차세계대전 당시에 참전한 미군들이 독일군의 포탄을 'G.I. cans'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G.I는 미군의 각종 군수품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Galvanized Iron'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점차 Government Issue, General Issue(군수품 일반), Ground Infantry(지상군) 등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종국에는 미 육군과 공군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2차대전에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최고사령관은 “이 전쟁의 진정한 영웅은 G.I. Joe와 상공의 파트너인 공군과 해군, 그리고 연합국들의 상선(商船)이다”고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