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사다리 치우기의 역사
지난 70여년은 ‘핵 사다리’(Nuclear Ladder)를 치우려는 핵클럽(Nuclear Club)과 불청객(gate crasher)의 투쟁사였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미·중·러·영·프)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핵클럽을 영구히 동결하기 위해서 ‘사다리 치우기’(kicking away the ladder)를 제도화했지만,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조선은 명시적 혹은 암묵적 핵보유국이 되었다.
1956년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은 핵무장에 대한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 핵무장론으로 선회하였다. 그는 핵을 보유해야 강대국이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핵개발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고, 중소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중국은 독자개발에 나섰다.
1964년 첫 핵실험의 성공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어차피 써 먹지도 못할 물건이고 핵 보유국으로 인정만 받으면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김명호, 중국의 핵개발, 중앙 SUNDAY, 2017.3.19).
마오쩌둥의 이러한 발언은 후발국들의 핵 개발 목적이 공격적 사용(미국)보다는 강력한 무위(armed suasion)에 기초한 안보강화(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와 대외적 위상 및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국가적 인정투쟁(영국·프랑스·중국)의 일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도와 긴장이 고조되었던 1965년에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파키스탄 외무장관은 인도가 핵무장을 하면 파키스탄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파키스탄은 천년 동안 싸우고 또 싸웠다. 풀을 뜯어 먹거나 굶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질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1993년 그의 딸 부토(Benazir Bhutto) 수상이 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는데, 칸(Abdul Q. Khan)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에 원심분리기와 미사일에 대한 양국의 협력이 이뤄졌다(세계일보, 2009.12.29).
2000년에 평양을 방문했던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역사적으로 버터와 총 사이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선택한 정부는 드물었다고 술회하였다.
2017년 9월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 샤먼에서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조선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풀을 먹더라도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핵무장의 동기
일국이 핵무기를 획득하거나 포기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동기 및 요인은 국가안보, 국가적 능력(경제·과학기술·군사·외교 등), 국제규범 및 인식, 국내정치적 요인으로 집약할 수 있다.
펠로피다스(Benoit Pelopidas)에 따르면 세계 39개국이 핵무장을 모색하다가 대부분이 포기했다. 조지 퀘스터(George Quester)는 1973년 이후 핵무장을 모색한 국가들의 주요한 동기를 군사적 동기, 정치적 동기, 경제적 동기에서 찾았다.
세이건(Scott Sagan)은 핵무장 혹은 핵포기의 동기를 국가안보, 국내정치, 국제규범으로 구분하였고, 핵확산 혹은 비확산에는 국가안보, 국제기구, 국제규범, 국내환경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민주주의체제와 독재체제에 따른 상이한 영향이나 국가적 위신, 기술, 경제, 국내정치가 핵무장의 동기 혹은 핵포기의 동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국가안보, 국가적 능력, 그리고 국제적 요인이 핵무장 혹은 핵포기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핵무기 개발은 기술, 원료, 운용인력, 가용재정 등이 충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으로 보기 어려운 조건이었던 파키스탄(1998)과 조선(2006)의 핵실험은 핵 기술력의 보유 및 독점적 자원집중으로 가능했지만, 미국과 국제기구의 압박을 극복하고 기술 및 장치를 획득하는데서 외부적 저항요인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적 의지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경제적, 기술적 능력이 미비하거나 정치적 의지가 미약한 나라는 핵 구상이 있더라도 핵 게임을 지탱할 수 없다. 정치적 의지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핵무장의 동기 중에서 강대국에 대한 열망과 같은 팽창적 동기보다 안보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강조한다.
캠벨(Kurt M. Campbell)은 ‘체제 비관주의’(regime pessimism)를 핵확산의 주요한 동기로 보았다. 경제적·군사적 균형에서 열세로 기울거나 체제불안 및 쇠퇴를 맞이한 나라일수록 핵무장으로 경쟁국 혹은 적대국에게 망각되거나 무시되는 것(sinking into oblivion or being overshadowed)을 막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체제 비관주의는 피포위의식이나 강대국의 위협에 직면했다고 생각하였던 이스라엘·파키스탄·조선의 핵무장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하지만 조선이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가적 능력과 정치적 의지 외에도 국제적 규범과 인식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 지정학적 조건과 체제의 특성이 작용하였다.
조선은 중국과 혈맹관계로서 대미 최전선국가이면서 극동의 외곽에 위치한 자급지향적 은둔국(Hermit Country)의 특수성에 기초해서 국제적 외압과 무역봉쇄 및 경제제재에 대항하는 ‘장기항전’(long term fight)을 지속하고 있다.
월츠(Kenneth Waltz)는 핵무기를 원하는 이유를 일곱 가지로 집약하였다(The Spread of Nuclear Weapons : More May Better, Adelphi Papers, Number 171,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첫째, 경쟁국들은 상대의 신무기를 모방하여 대등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미국의 핵무기 개발이 소연방의 핵무기 개발을 초래하였다.
둘째, 강대국의 침공에 대해 동맹관계의 강대국이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핵개발을 하게 되었다.
셋째, 주변국이 핵무장을 하면 핵개발을 하게 된다. 중국의 핵개발은 인도의 핵개발을 초래하였고, 인도의 핵개발은 파키스탄의 핵개발로 이어졌다.
넷째, 주변국의 현재 혹은 미래의 재래식 무력을 우려하여 핵무기를 개발한다.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의 군비증강을 의식하여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확보하였다.
다섯째, 재래식 군비증강보다 핵보유를 통하여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고 적정한 비용으로 안보와 독립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공격의 목적으로 핵보유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1940년대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타격하고 전쟁을 종결하려는 의도로 최초의 핵실험과 핵공격을 감행하였다.
일곱째, 핵보유를 통해서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으면 미국에게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예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북핵의 오랜 예고편 : 중국 핵개발 저지의 무산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로스토우(Walt W. Rostow) 정책협의회의장이 1964년 4월 번디(McGeorge Bundy)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는 케네디·존슨 행정부가 중국 핵시설에 대한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을 검토한 사실이 담겨 있다(An Exploration of the Possible Bases for Action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 Nuclear Facilities).
핵개발 징후를 감지한 미국이 핵개발 시설을 타격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대만 침공의 명분이 될 수 있고 전면전으로 비화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실행하지 않았다. 존슨이 대안으로 준비시킨 특수부대 침투작전도 실행하지 못했다.
미국 지도부는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대만해협 사태로 이어진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중국 본토의 핵시설을 공습하는 것은 도발적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시기적으로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의 실체를 인정하고 국교수립에 나섬으로써 미국이 중국을 일방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는 단계가 이미 지났다는 점도 정밀타격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중국은 미국의 공격 가능성에서 벗어나자 핵무기체계를 본격화했다.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자 1966년에 둥펑 제1여단(전략미사일부대 예하)을 창설하고 허난성 쑹산에 지하기지를 구축하였다.
1970년 1월 30일 괌을 사정권으로 하는 ‘둥펑-4’의 시험발사에서 성공했고, 4월 24일 인공위성 ‘둥팡홍-1호’를 탑재한 ‘창정-1호’(위성운반 로켓)를 발사함으로써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의 여파로 지체되었으나, 1980년 5월 18일 미국 본토를 사정권으로 하는 둥펑-5를 시험 발사했다.
FUN vs NFU, 미사일 요격 vs 지하요새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핵 선제사용(FUN, First-Use of Nuclear weapons) 원칙을 견지하고 있지만, 중국은 1964년에 천명한 핵무기의 선제불사용(NFU, No First Use)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도 평시에는 핵탄두와 미사일을 분리하여 중앙보관소에 보관하고, 전략핵잠수함도 평시에는 핵탄두를 탑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중국보다 30배 이상 많은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은 핵 요격 및 반격의 능력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지하요새화를 중시하고, 미국은 중장거리 미사일을 중도에 파괴하는 미사일방어체계(MD)를 중시한다.
현재 북극 방면으로 종단하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알래스카 기지와 태평양 방면으로 횡단하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캘리포니아 기지를 운용하고 있지만, 2017년 북한의 핵무력 완성 공포를 계기로 본토에 요격기지를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018년 미 전략항공우주군의 미사일방어국은 미시간주의 포트 커스터 기지, 오하이오주의 제임스 가필드 훈련센터, 뉴욕의 포트 드럼 기지를 후보지로 선정했다.
미국은 운반체 762개에 1,538기의 핵탄두를 실전배치하고 핵무기 3원체제(triad)를 운용하고 있다. 즉각적 대응이 가능한 대륙간탄도탄(ICBM), 뛰어난 은폐와 이동성으로 생존력을 높인 잠수함발사탄도탄(SLBM), 발사명령의 변경 및 취소도 가능한 전략폭격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였다.(Department of States, 2016
이에 대해 중국은 미국의 선제적인 핵공격을 회피하거나 견디고 반격할 수 있는 ‘보복능력의 보존’을 안보의 핵심과제로 삼아 발사기지의 지하화 및 이동발사대 개발을 추진해 왔다.
또한 핵전력을 담당하던 제2포대(the Second Artillery Force)를 로켓부대(The PLA Rocket Force)로 재편 및 승격하였다. 이로써 지상군의 부속부대로 운영되었던 핵전력이 인민해방군의 육해공군과 별개로 제4의 전략군이 되었고, 지상발사 위주의 미사일체계에서 해상과 공중을 아우르는 3차원의 핵전력 개발과 운영을 맡게 되었다.
이와 함께 타이항산맥(Taihang Mountains)을 중심으로 장대한 거리의 지하기지를 구축하고, 지상에는 위장용을 포함해서 수 백 개에 달하는 미사일 발사구를 뚫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미사일발사구를 통해서 핵탄두를 탑재를 가정한 ICBM를 발사하는 장면을 공개하였고, 외부의 핵공격에 대해서 10분 안에 보복공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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