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별세했다. 김 전 위원장은 1928년에 태어나 20대 때부터 조선로동당 국제부와 외무성에서 활동한 외교관 출신으로 3대에 걸친 권력변화 속에서 좌천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1983년에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외무상)을 맡으면서 핵심인물로 부상했고, 1998년 이후 20년 넘게 대외적으로 국가수반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연임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에는 90세의 노구를 이끌고 김여정 부부장, 최선희 외무성 부상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여 역사적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남북관계의 개선이 지속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지켜보며 이듬해 60년에 걸친 공직에서 은퇴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조문외교가 이뤄질 만하지만 연락이 두절된 남북관계로 인해 조문단이나 조전 및 조화가 모두 불가능한 상황이다. 민족 내부의 특수한 관계를 들어 아무리 통일을 강조한들 조문단이 왕래할 수 있는 '두 개의 국가'도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조선에서 김기남 국제부장 등 조문단을 보냈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도 했다. 김정일 전 위원장의 장례식에는 한국에서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참석했으며, 이희호 여사의 장례식에는 김 위원장이 조화를 보냈다.
이러한 역사적 선례에 비추어 한국 정부에서 조전을 발송하거나 조문단을 파견해야 하지만, 조문단 방북은 고사하고 남북연락전화마저 사실상 단절된 상황에서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개인 명의로 조의를 표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통상적으로 조전 및 조화를 보내거나 주요한 인연이 있는 사람을 조문특사로 보냈지만, 이제는 허공에 대고 조문하는 식이 되었다.

조선의 외교인맥과 남북의 비대칭
조선의 외교적 역량의 특징은 사회주의 국가의 공통점인 대외정책 수뇌부의 장기지속, 당이 주도하는 체계에 의한 외교관 육성 및 선발, 1990년 초에 구성된 ‘핵 상무조’(Nuclear TF)로의 역량 집중, 해외주재 외교관에 대한 감시와 통제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과거 사회주의권은 국가(정부)에 대한 당의 우월적 지위에 기반한 일당체제였기 때문에 외교를 총괄하는 수장급들이 근대이전 왕조시대의 외교가들처럼 장기재임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소연방의 그로미코, 조선의 허담이다.
그로미코는 1946년 유엔대사 겸 외무차관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래 사실상 40년 동안 외교수장으로 역할하였고, UN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5차례 행사하면서 ‘미스터 니에트’(Mr. Nyet)로 불리웠다. 이후에 중국에서는 첸지첸(錢基琛) 외교부장, 왕이 외교부장 등이 장기간 역임했다.
조선에서는 허담이 1953년 참사로 시작해서 1961년 외무성 부상을 거쳐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외무상으로 재임하면서 20년 넘게 외교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비동맹 및 사회주의 친선외교와 미국 및 UN외교를 총괄하면서 1985년 9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비밀면담과 같은 대남협상까지 관여했다.
조선은 한국전쟁 이후 외교영역의 핵심역량을 체계적으로 육성했는데, 주요한 인물들은 김일성종합대, 평양외국어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유학을 거쳐 외교관으로 입문한 경우가 많았다. 주로 소연방과 동유럽의 대사를 거쳐 본부 요직을 거쳐 외무성 수뇌부에 진입하였다.
허담 전 외무상은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유학을 거쳐 외교라인에 발탁됐고, 백남순 전 외무상도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을 거쳐 폴란드 대사를 지낸 다음에 조평통 서기국장으로 활동하다가 외무성 수장으로 중용되었다.
강석주 전 외무성 제1부상은 평양외국어대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모스크바 국제관계대(불어 전공)에서 유학을 마치고 정무원 외교부 간부로 중용됐다. 리수용 최고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도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국립 모스크바 국제관계대(불어 전공)에서 유학하고 1973년부터 외무성 국제기구국장, 스위스대사, 제네바 대표부, 네덜란드대사 등을 거친 유럽통으로 노동당 국제부장이 됐다. 스위스대사 재임중에 소년 시절의 김정은 위원장과 인연을 맺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리용호 전 외무상은 평양외국어대(영어 전공)를 졸업하고 외무성 참사로 시작해서 영국대사, 아일랜드대사를 거쳐 2004년 외무성 부상으로 중용됐다.
이에 앞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도 평양외국어대(국제관계 전공)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발탁돼 순회대사 및 참사를 거쳐 1998년 부상으로 중용돼 각종 북미협상에서 20여년 동안 대표로 활동했다.
김영남 전 위원장은 평양노농정치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유학을 거쳐 1952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당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1959년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외교분야에 입문했다. 이후 당 국제비서 및 국제부장, 외무상을 거쳐 상징적인 국가원수급 반열에 올랐다.
최선희 외무상은 1964년생으로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중고교를 나와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988년 외무성 연구원으로 출발하여 2003년 6자회담 수석대표 통역을 맡았고, 2010년 북아메리카국 부국장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국장과 외무성 제1부상을 거쳐 조선 최초의 여성 외교수장이 됐다.
조선의 외교 수장들이 한국전쟁 이후 실질적으로 10여명에 불과하지만 한국은 조현 외교부장관에 이르기까지 40명이 넘는다. 이는 임기의 차이를 넘어 여러 가지 비대칭적 차이를 초래해 남북관계의 안정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1998년 김대중정부 이후 25여년 동안 통일부장관이 20명에 육박하고, 평균 재임기간이 1.3년에 불과하다. 강인덕(1998), 임동원(1999), 박재규(1999-2001), 임동원(2001) 홍순영(2001-2002), 정세현(2002-2003) 등 5명이 임기를 6등분하였다. 노무현정부에서도 정세현(전임정부 연장) 이후 정동영, 이종석, 이재정으로 3번이나 바뀌어 총 4명이 통일부장관으로 재임했다.
통일부를 중시하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정부에서 15년 동안 통일부장관이 12번이나 바뀌었다는 것은 평균 임기가 1년 남짓이란 뜻이다. 장기성과 일관성 및 안정적 지속성을 상징해야 할 ‘통일부’라는 명칭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이런 행태는 한국정부의 대북전략이 얼마나 관성적으로 되풀이되는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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