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언론간담회에서 “남과 북이 사실상의(de facto) 두 국가, 국제법적 두 국가”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정 장관은 “많게는 60%의 국민이 북한을 국가라고 답한다”면서 국민 다수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그는 남과 북을 두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실용적 관점이며, 남북관계를 유연하게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4강의 교차승인을 통해 북미수교와 북일수교를 이루는 것이 당면한 실천과제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 장관은 ‘평화적 두 국가론’이 통일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특수관계 속에서 북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북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영구분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러한 주장은 ‘평화적 두 국가론’이 조선의 ‘두 국가론’에 호응해서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 한국과 미국의 정부에서 제기되는 북핵동결과 관련해 정 장관은 “북의 우라늄 원심분리기 4곳이 가동되면서 90%이상 고농축우라늄이 2000㎏로 추정된다”고 밝히면서, “제재를 통한 북핵포기는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북핵 규모가 100개 이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재해제 및 경제적 유인 등으로 핵포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정 장관의 발언은 미국과 조선의 정상회담 및 한미조 3자협상 등을 통해 일단 핵동결에 합의하여 핵무기의 증강과 고도화를 저지하는 것이 차선책이라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김정은 위원장, “한국과 함께하지 않겠다” 선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대미·대한 전략기조를 밝히면서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이 없으며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김 위원장은 특히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흡수통일론의 역사적 연원으로 이승만 전대통령과 제헌헌법의 영토조항을 지목했고, 역대 정부와 개헌의 과정에서 영토조항이 바뀌지 않은 것을 좌우를 불문하고 공통된 흡수통일 노선의 증거로 제기했다.
“조선반도의 절반 땅에 단독정부를 조작한 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리승만과 그 패당이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문이 포함된 헌법을 공포했다. 우리 국가에 가장 적대적인 태생적 본성을 성문화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정권이 10여차나 바뀌고 헌법은 9차나 개정되었지만 우리 공화국에 대한 침략과 병탄을 목표로 한 헌법의 영토조항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자신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UN 동시가입 및 정전상태(교전국 관계)에 따른 객관적 현실을 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와 대한민국은 지난 몇십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두 개 국가로 존재해왔다. 정전협정은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반도에 두 개의 교전국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 앞에서 공식 확인했다.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완전히 두 개 국가로 고착되었다.”
접점과 돌파구(breakthrough) : 독일의 경우
김정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와 정동영 장관의 ‘사실상의 두 국가’는 한반도 국가의 존재양식(being mode)에 대한 접점을 보여준다. 김 위원장은 두 국가가 적대적 교전국이란 점을 들어 협의와 교류를 거부하지만, 정 장관은 ‘평화적 두 국가’로 전환하기 위해서 양측이 대화의 창을 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적대적인 관계에서 비적대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조건과 비적대적인 관계에서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국은 적대적 두 국가에서 비적대적 두 국가로 이행하는 것이 교착된 남북관계의 돌파구인 것이다.
50여년 전에 동·서독은 ‘두 국가’에 대한 심각한 논의와 갈등을 거쳐 일정한 타협점을 찾았다는 점에서 한반도와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나마 유익하게 참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에 동독이 ‘두 국가’를 제기하자 서독의 보수정당은 극력 반대했지만, 데탕트라는 세계정세의 급변과 사민당·자민당 연정의 새로운 동방정책에 소극적이나마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양측의 기본조약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국호를 명시했고,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1987년 9월 7일 에리히 호네커 통일사회주의노동당 서기장 겸 독일민주공화국 최고평의회 의장은 국가수반으로서 헬무트 콜 수상(기민련)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양국의 국기가 게양된 정원에서 군악대가 양국의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

(1987년 콜과 호네커. "역사 속을 거니는 신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라던 비스마르크의 말처럼 2년 후에 콜은 신의 옷자락을 잡게 된다.)
당시 서독에서는 동독의 국기(national flag)를 하나의 문장(emblem)으로 간주했지만,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콜 수상은 이러한 금기에 연연하지 않았다. 콜 수상은 자신이 제1독일(서독)을 대표하지만, 또 하나의 제2독일(동독)을 대표하는 자(호네커 서기장)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귀결은 사민당의 새로운 접근과 자민당의 가세, 그리고 보수연합(기민련·기사련)의 적응과 견제의 이중주 속에 이뤄진 것이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해 보수연합(기민련·기사련)은 통일이라는 문구를 고집하지 않았고, 자결권이라는 포괄적이고 은유적인 문구를 용인했다. 1973년 동독은 대사급 교환을 요구했으나 서독은 상주대표부(본과 동베를린)로 격을 낮추었다. 이에 대해 보수연합(기민련·기사련)은 상주대표부가 국가 대 국가의 외교적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1970년대에 보수연합(기민련·기사련)의 강경파 및 근본주의자들은 동독을 중부독일, 러시아점령지, 소비에트 보호령 등으로 부르거나 국호를 언급하더라도 ‘독일민주공화국’으로 인용부호를 붙였다.
조선이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지만, 조선의 공식문건과 신문방송은 2025년부터 인용부호를 빼고 한국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최근 김정은 위원장은 아무런 인용부호 없이 대한민국으로 호칭했다. 반면에 한국의 정부와 언론은 ‘조선’이란 표기를 금기시하면서 북한이란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의 비대칭을 극복하지 못하면 ‘적대적 두 국가’에서 ‘비적대적 두 국가’로 진일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976년 서독 총선에서 보수연합(기민련·기사련)이 총의석수에서 다시 진보중도연합(사민당·자민당)에 밀리자 기민련 내부에서는 동독(인)의 국적을 인정하자는 제안이 나올 정도로 유연한 적응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사민당 내에서 동독인들이 자본주의체제에 거부감을 갖고 자기가 속한 체제의 역사적 성취를 자부하면서 재통일에 대한 민족적 열망이 부차화됨에 따라 재래적 관점의 민족문제는 사실상 소멸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동독의 울브리히트·호네커 서기장이 제기했던 ‘2민족 2국가’와는 맥락이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두 개의 독일’이란 결론에서 만난다.
반면에 50년이 흐른 후에 한반도의 한국과 조선은 법적으로 서로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 조선의 변화추이로 보면 북에서는 한국이라는 국적을 사실상 인정할지도 모르지만 법적으로 확인된 사례는 없다. 반면에 한국의 현행법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국적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현재의 한국 헌법은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사람으로 간주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 동독이 서독방문객의 의무환전액 인상, 상주대표부의 대사관 승격, 동독 국적의 인정, 엘베강 중간의 국경선 인정 등을 요구할 정도로 동·서독은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협상하는 항상적인 관계로 진전되었다.
근본적 문제와 당면한 과제의 충돌
가장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문제는 통일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수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가와 이러한 과정이 남북이 두 국가로서 상호인정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것과 충돌하지 않도록 조정하는가로 집약할 수 있다.
또한 민족문제에 대한 정확한 사고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과거의 상처를 간과하지 않아야 하며, 특히 한국전쟁에 의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심정을 좌우 불문하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치의 패망으로 분단된 독일은 새로운 세계질서의 흐름을 타고 재통일되었다, 서독에서 사민당의 새로운 접근(신동방정책)은 데탕트로 인해 탄력을 받았고, 고르바초프의 구체제 개혁이 실패하면서 탈냉전의 격랑 속에서 독일은 재통일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는 탈냉전 및 동서 진영(bloc)의 해체라는 역사적 격변기에 한국과 중국·러시아의 수교만 이뤄지고 조선은 미·일과 미수교상태로 남는 비대칭구도가 형성되면서 조선의 경제적 고립 및 핵무장이 본격화됐다.
또한 초강대국 미국의 일극적 세계질서가 강화되면서 동서 수렴(East West convergence)의 한반도 버전인 남북 수렴(South North convergence)의 전망도 덩달아 소멸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내부에서 남북이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다스려 합의 가능한 형태로 재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도적·제3의 길’에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이후 20여년 동안 한국은 경제선진국 진입으로, 조선은 핵무장 국가로 제 갈 길을 갔다.
독일의 경우에 두 개의 국가에 관한 역설적인 명제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프랑스 작가 모리악의 농담과 1980년대 이탈리아 외무장관 안드레오티의 진담을 들 수 있다. 모두 서독이 ‘하나의 독일’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쓴소리였다. 모리악은 자신이 좋아하는 독일이 두 개나 있으면 더 좋은 것이라고 했고, 안드레오티는 2개의 독일국가가 존재하며 2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시민단체의 연목구어(緣木求魚) : 두 국가론에 대한 '내재적 패싱?'
이재명 대통령 유엔총회 연설에서 제기된 ‘END 이니셔티브’(교류-정상화-비핵화)에 대해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대화재개의 여건이나 평화를 위한 구체적 방안이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의 핵심적 문제제기는 한미연합군사연습, 한미핵협의그룹(NCG), 한미일 군사협력이 관성적 유지된다는 점과 3단계 비핵화(중단(동결)-감축-폐기)에 대한 단계별 이니셔티브가 미비하다는 점이다.
한편, 경실련의 ‘남북관계 정책방향 전문가 조사’는 포괄적 단계적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실질적 진전, 한반도 군사긴장 완화와 평화 분위기 조성,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전방위적 억제능력 확보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추진, 남북 인도주의 협력 및 교류협력 모색 등을 제시했다.
이 조사는 통일부의 명칭변경은 불필요하다는 것과 판문점선언·9·19 군사합의 등의 이행을 위한 법제화 및 규범화가 필요하고, 남북경제협력(관광·개성공단) 재개는 장기적으로 가능하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한때 한국사회를 대표했던 두 단체는 공통적으로 한미연합훈련의 축소·폐지와 전시작전통제권의 조속한 전환 등을 남북대화의 선결요건으로 지목했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사안에 대한 관성적 접근으로는 정당성 여부와 별개로 북의 장기전략과 미·중의 지정학적 이해를 반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비현실적 통일론과 같이 21세기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기 어렵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두 국가'에 관한 합의가 어려운 까닭
'두 국가'가 하나의 민족(nation)에서 존재하는 두 국가(two states)인지, 이러한 경계를 넘어 완전히 다른 두 국가(two countries)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현재로선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에 서독 보수정당은 두 국가(two states)와 언젠가 하나로 될 나라( country)와 구분하려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선례는 '두 국가'와 통일담론(조국은 하나다)을 둘러싼 한국 내부의 퇴행적 갈등을 이완시키는데 참고가 될 수 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대내적으로 예상되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동영 장관이 제기한 ‘평화적 혹은 화해적' 두 국가론을 진전시키려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현실적 문제들이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축적된 조선의 주요 담론과 조치에 비추어 조선은 한국이 자신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실제적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면 말장난으로 간주하여 더 배타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통일부의 자기변화는 불가피하다. 이런 교착상태의 장기화에서 고급인력과 국가예산의 잠식을 방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국정운영이고, 대북전략의 새로운 접근을 위해 외교부의 외청(남북연락청)으로 재편하는 방식을 포함한 혁신적 발상이 필요하다.
또한 본격적인 접촉이전에 상호 국호에 대한 문제를 진솔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북은 명시적으로 국호를 호칭할 것을 국내 언론에 요구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여 헌법개정 이전에라도 쌍방의 국호에 관한 불필요한 신경전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배경이야 어떻든 간에 북은 남의 국호를 정식으로 지칭하는 추세에서 남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
내년 지방선거에 예상되는 개헌 국민투표에서도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위한 실용적인 관점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두 국가론의 긍정적 변화(비적대화 및 우호적 관계로의 변화)를 도모하려면 영토조항의 수정 혹은 새로운 조항의 신설 등을 통해 대북협상의 헌법적 근거 및 대항력을 생성하는 창의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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