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Twin Koreas/두 국가

남북기본협정과 동서독기본조약의 새로운 접근

twinkoreas studycamp 2025. 8. 14. 22:38

13일 이재명정부의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12대 중점 전략과제 중 남북기본협정 체결은 동·서독기본조약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TV 조선)

 

 

홍현익 국정기획위 외교분과위원장은 과거에 동독과 서독이 기본조약을 통해 대화와 교류를 지속한 것처럼 남북기본협정을 통해 남북의 평화공존 원칙과 규범을 마련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국정기획위원회)

 

 

하지만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몇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의 합의문도 비슷한 내용들을 담았지만 결국은 사문화되고 말았다. 최근에 북에서는 두 개의 국가를 공식화했고, 남에서는 집권여당이 국회의 비준동의가 가능한 다수의석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시각도 있다.

 

 

사회민주당, '국가 대 국가의 보편적 관계로 전환' 주창

사회민주당은 14·서독기본조약의 핵심은 서로 독립된 국가로 인정한 것이라면서 남북의 국가 간 수교를 통해 서울과 평양에 상주대표부를 두고 국가 간 외교관계에 준하는 일상적인 정상관계로서 실용적 민간교류를 획기적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한창민 사민당 대표는 남북관계에 근원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서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했던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로는 적대적 두 국가론에 대응하고 지정학적 도전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북미수교와 남북수교 병행 추진, 새로운 평화체제를 위한 개헌 및 국가보안법 전면 재고, 통일부의 한반도평화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민당은 남과 북이 국가 대 국가라는 보편적 관계를 맺을 때 한반도의 특수한 문제도 함께 풀어나갈 수 있으며, 그간 남북관계 개선은 서로를 한국과 조선으로 각각의 독립국가로 인정할 때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남북의 국가 간 수교를 통해 판문점에서 이루어지는 일회적 관계가 아닌 영속적인 협력 관계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서울과 평양에 상주대표부를 두고 국가 간 외교관계에 준하는 일상적인 정상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연방공국(서독)1969년에 전독일문제부내독부로 개칭하고 1972년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기본협정을 맺어 본과 동베를린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또한 사민당은 평화 2국가체제가 헌법위배가 아니지만, 헌법과 충돌을 고려하여 통일(혹은 통합)에 이를 때까지 남북기본조약을 우선한다는 한정조항을 둘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두 국가체제가 장기적으로 한반도 국가연합의 비전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연합의 사례는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로 독립한 국가들이 구성한 낮은 수준의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단일화폐와 의회 및 집행부 등 높은 수준으로 연합한 유럽연합(EU), 소규모 토호국들이 대외적으로 단일국가로 내세운 아랍에미리에트(UAE)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이 대만(중화민국)에 통일대안으로 제시하는 일국양제는 일종의 연방제로 간주할 수 있으나, 홍콩의 사례처럼 실질적인 자율성이 지속되기 어렵다. 또한 자본주의체제의 북예멘과 사회주의체제의 남예멘이 지도자들의 협상으로 통일을 결정했다가 내전을 초래해 그 여파로 지금은 여러 세력에 분할돼 국가형체를 찾기 힘든 아라비아반도의 잔해가 되었다.

 

이런 케이스들을 고려하면 한반도의 국가연합은 같은 민족이지만 상이한 체제를 지닌 2개 국가의 연합이란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전례가 드물다. 일단은 매우 낮은 수준에서 공동의 경제적, 안보적 이해 등을 대변하면서 문화 및 스포츠 등 특정분야에서 국가연합 명의로 단일대표단을 구성하는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쌍방이 모두 강력한 대외적 중립성을 고리로 공동안보의 경지에 도달하면 체제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좀더 다양하고 심층적인 교류협력이 가능한 단계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합의서, 동서독기본조약, 남북기본협정 비교>

구분 남북기본합의서 동서독기본조약 남북기본협정
정식
명칭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관계의기초에 관한 조약 한국과 조선의 관계의 기초에 관한 협정?
시기 1991.12. 평양 1972.12, 동베를린 2025~. 판문점 등(예상)
환경 남북 UN 동시가입 밑 소련 붕괴 데탕트(Détente) 및 소련의 압력 적대적 두 국가론(조선)
국회 비준동의 의석확보
정부
대표
노태우정부 : 김일성정부
정원식() : 연형묵()
브란트정부 : 호네커정부
에곤 바르() : 미카엘 콜()
이재명정부 : 김정은정부
미정() : 미정()
기존
입장
한국 : 자유선거 통일
조선 : 고려연방제 통일
서독 : 할슈타인 독트린
(서독이 유일한 합법정부)
동독 : 울브리히트 독트린
(각자의 주권 및 상호 외교관계)
한국 :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
조선 :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설정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대내외적)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대내적)
국가 대 국가의 관계(대외적)
?
요지 상호인정, 불가침, 교류협력 등 상호인정, 주권 및 영토보전 등 ?
교차
승인
한소수교(1990),한중수교(1992)
조선은 미,일과 미수교
지역안보협력논의 부재
(중국의 역할 미미)
서독은 소련, 동유럽과 수교
동독은 서독과 관계정립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병행
(소련의 영향력)
?
야당
입장
민주당(김대중)의 지지 기민련(), 선택적 지지
기사련, 반대(위헌소송)
국민의힘, 반대(위헌) 예상
법적
효력
공동성명 및 신사협정 수준
(1999년 헌법재판소, 대법원)
여야 논의를 거쳐 735월 연방의회 비준동의, 조약문의 UN 기탁 및 국제적 발효

국회 비준동의 예상(다수의석)

후속
조치
판문점 연락사무소 설치 동베를린 - 서독 상주대표부 설치
- 동독 상주대표부 설치
상주대표부 추진 ?

 

 

동서독, 본과 동베를린에 상주대표부 설치

 

197211월 초에 브란트 서독 수상은 동서독기본조약을 승인했고, 조약은 이듬해 헌법재판소의 이행정지 가처분신청 기각을 거쳐 발효되었다.

 

기본조약의 요지는 두 독일국가가 무력사용을 포기하고, 기존 서로의 국경에 대한 불가침을 존중하고, 쌍방의 독립과 영토적 통합성 및 상호관계에서의 차별철폐 등에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제4조는 일방의 대외관계에서 상대방을 대표하지 않으며, 서로의 영토 내에서 법적 권한을 인정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양측은 대사급 교환보다 한 단계 낮은 상주대표부(permanent representatives)를 설치하기로 했다.

 

당시 동·서 베를린을 분할관리하던 미···프는 기본조약의 비준동의가 이뤄지면 UN 동시가입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91년 남북한은 동시에 UN가입을 하고 연말에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했다.

 

이는 동서독과 순서가 뒤바뀐 것이었고, 국회의 비준동의와 국제적 승인과정도 없었다. 이러한 패턴은 남북관계에서 고질적으로 되풀이되었고, 2000년 정상회담 이후에도 관계의 개선과 악화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한반도 국가는 관계의 제도화에 실패했다.

 

 

관계 제도화의 막전 막후

 

19691028일 빌리 브란트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수상은 의회연설에서 독일에 두 개의 국가(two states in Germany)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독일에는 오로지 하나의 합법적 정부만 존재한다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사실상 폐기하는 것이었다.

 

패전 이후 분단된 서독은 기민련/기사련(CDU/CSU)이 연속집권하면서 아데나워, 에어하르트 수상이 독일의 재통일을 원칙으로 동방정책을 추진해 왔으나, ·소의 데탕트 기류 등 국제정세와 부조화하고 동·서독 이산가족 및 주민들의 교류왕래 등 관계개선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다.

 

반면에 야당이었던 사민당은 1963년 에곤 바르의 새로운 접근을 중심으로 신동방정책 및 동서독 관계개선을 모색하다 1966년 기민련/기사련(형제정당)의 에어하르트 수상이 실각하자 헤르베르트 베너 원내대표의 대연정 전략을 통해 기민련의 키징거 내각에 브란트가 외무장관으로 입각하는 중대한 변화를 창출했다.

 

1969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된 사민당은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신동방정책을 추진했고, 브란트 수상은 모스크바조약·바르샤바조약에 이어 동·서독기본조약을 이뤄냈다. 브란트는 모스크바조약·바르샤바조약의 비준동의 과정에서 기민련/기사련의 불신임 투표에 봉착했으나 1표 차이로 모면하고, 자신의 신임에 필요한 투표(건설적 불신임제도)에서 실패하자 비준동의를 미루고 야당과 논의 및 비밀협상을 전개했다.

 

사민당의 타협적 노력으로 두 조약의 비준동의가 결국은 이뤄졌지만, 브란트는 더 큰 난관인 동·서독기본조약을 가조인 상태로 두고 1972년 총선에서 비준동의에 필요한 다수의석을 확보하여 선거 후에 최종서명했다.

 

기민련/기사련은 기본조약의 내용 중에서 동서독이 서로 독립과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조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총선결과로 인해 비준동의를 저지하지 못했다. 또한 기사련의 거점인 바이에른주의 기본조약 이행중지 가처분 신청이 헌법재판소에서 두 차례 기각되면서 기민련/기사련은 기존의 동독정책을 관철할 동력을 잃게 되었다.

 

바이에른주는 기본조약이 독일 영토에 두 개의 주권국가를 인정함으로써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전체 독일민족을 대표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기본법(헌법)에서 동독을 연방공화국에 편입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독일 헌재는 이러한 논거에 의한 가처분신청을 기각했지만, 기본조약에서 독일 내부의 경계를 국가(country)의 경계가 아니라 주(state)의 경계와 유사한 것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또한 기본조약의 성격에 대해 기민련/기사련 지도부는 동서독 관계를 외교적 관계보다 낮은 차원으로 설정할 것을 요구했고, 당내 개혁파도 독일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규정이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독의 국가성(stateness)에 대한 사실상의(de facto) 인정(acknowledge)과 법적 공식승인(recognition)의 의미론적 차이는 모호한 것이어서 서독 내부의 오랜 논쟁과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발상의 전환과 제3당의 역할

 

동서독 관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풍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독일을 매우 좋아한다. 그 독일이 두 개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요구하는 동독과 민족내부의 특수한 관계를 고수하려는 서독의 지루한 평행선에 대한 반어법이지만, 때론 역발상이 교착된 현실의 진일보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본조약의 서독 대표자였던 바르가 동독 인정이 독일통일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현상유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상유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르는 반발하는 야당을 향해 기본조약을 잠정협정으로 규정하면서 향후 변경이 가능하다고 역설했고, 동시에 소연방과 동독을 향해 현상을 승인하지 않더라도 인정함으로써 존재하는 현실을 수용할 의향이 있다는 신호를 분명히 했다.

 

기본조약 체결의 배경에서 독일 다당제 및 제3(자유민주당)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의 발터 쉘 외무장관 등은 기민련/기사련의 고루한 원칙론이 실제로는 아무런 개선도 가져올 수 없다고 여겼다.

 

기민련/기사련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한반도에서도 남과 북이 서로 국가로 인정하면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아데나워를 비롯한 기민련/기사련 지도자들이 동서독관계에 대해 모 아니면 도식으로 접근하면서 실제 개선은 전무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외부세계와 민심의 변화와 괴리가 생겼고, 반면에 사민당의 트리오(브란트, 베너, 바르)는 새로운 접근으로 변화와 개선을 바라는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역대 기민련/기사련 지도자들은 동맹국들과 소연방을 압박하여 서독이 주도하는 독일통일을 용인하도록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냉전의 장기화로 이런 기대는 실현성이 희박했고, 데탕트의 전환기를 맞이하자 동맹국들은 동독을 불인정하는 노선의 고수에 대해 피로감을 드러냈다.

 

기민련/기사련의 강경파는 독일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보시키는 것이 소연방의 영향권 확대를 억제하고 미래의 재통일에 유리하다고 믿었지만, 자민당 지도부는 재통일이나 중립적 국가연합 혹은 양 체제의 수렴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기민련/기사련에서도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헬무트 콜 등 개혁파는 자민당을 사민당과 분리시키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변화에 수동적이나마 적응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분단체제 및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할 구체적 조치를 외면하고 먼 훗날의 재통일만 강조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피로감과 의구심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에서 잠정협정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수긍했다.

 

반면에 사민당의 트리오는 서독이 동독의 국가지위를 인정함으로써 분단의 고통을 완화하고 교류왕래 등 개선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사민당이 서독 기본법(헌법)의 장벽(동독 불승인)을 넘어 기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서 내적으로 발상의 전환과 함께 외적으로 데탕트 등 유리한 정황 및 소연방(Soviet Union)과 효과적 협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민당 정부는 소연방이 서독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동독을 움직일 수 있는 압도적 후견자라는 점을 적극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정치적으로는 독일의 다당제 및 제3(자유민주당)이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고, 기민련의 개혁파(폰 바이체커, 콜 등)의 실용주의적 자세도 소모적 논쟁을 완화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