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법 당직판사의 유일한 질문, “비상입법기구란?”
2월 18일 서부지법의 구속영장실질심사에 피의자 윤석열은 예상을 깨고 출두했다. 당시 심사과정에서 차은경 부장판사는 피의자에게 단 한번의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비상입법기구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피의자는 “김 전 장관(김용현 국방장관)이 쓴 것인지 내가 쓴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종의 동문서답인 셈이다.
이로 인해 다수 언론에서 피의자가 국회를 대체하는 입법기구를 설치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정과 이에 따라 내란 혹은 친위쿠데타의 핵심적 의도로 간주하는 논조가 나타났다.
지금의 언론은 구체적 팩트의 확인과 검증보다는 ‘내란 우두머리’라는 프레임에 사실관계를 주조(molding)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기자들의 주관적 접근은 언론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저해할 것이다.
계엄사태 이후 등장한 ‘비상입법기구’란 말은 계엄선포 당시 국무회의에서 경제부총리(최상목)가 실무자로부터 받은 메모지에 “예비비를 조속한 시일 내 확보하고 국회 관련 자금을 완전 차단하라. 비상입법기구 관련 예산을 편성하라.”고 쓰여진데서 유래한다.
23일 헌재 증언에서 김용현 전국방장관은 비상입법기구란 말이 헌법 76조 긴급재정 명령 에 관한 기재부의 준비를 뜻하며, 자신이 작성해 실무자를 통해 최 부총리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용현은 민주당의 내년도 예산안 예산삭감 및 단독처리에 격분한 윤석열에게 비상재정운영을 건의했고, 윤은 최에게 메모를 참고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는 이런 맥락을 간파하지 못한 채 다수 언론으로 하여금 비상입법기구가 박정희의 최고혁명회의와 유신정우회(유정회), 전두환의 국보위(국가보위입법회의) 같은 국회대체기구로 오인하도록 방조했다.
만약 윤이 국보위 같은 초헌법적 입법기구를 의도한 것이라면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정무라인에 지시를 내렸을 것이고, 계엄총책인 김이 굳이 최와 상의하거나 권고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수 언론은 팩트 확인 없이 예단으로 사실을 창조하는 구성의 오류를 계속하고 있다. 적을 미워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윤 일당은 국회에 대한 반격으로 국회의원 세비를 비롯한 국회 예산 전반을 차단하는 대신에 국회에서 삭감한 예산을 복원하기 위한 ‘긴급명령 및 긴급재정입법’에 관한 준비를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에게 지령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최 부총리는 계엄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비상입법기구란 말을 떠벌린 책임이 적지 않다.
여기서 ‘비상입법기구’는 헌법 제76조 제1항 긴급재정입법권 수행을 위해 기획재정부의 준비조직 구성과 예산확보에 관한 경제부처 비상기구라는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
즉 ‘긴급재정입법권’은 비상계엄의 경제 버전으로 1980년대 전두환의 군사반란에 의한 ‘국가보위입법회의’처럼 국회를 대체하는 초헌법적 기구가 아니다.
그나마 윤 대리인측은 21일 탄핵심판 변론에서 대통령이 이런 내용을 작성하거나 부총리에게 메모를 건넨 적도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헌법 제76조(비상 경제대권) : 대통령의 재정·경제 긴급처분 및 법률에 준하는 명령 권한
① 대통령은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
② 대통령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교전상태에 있어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가 불가능한 때에 한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
③ 대통령은 제1항과 제2항의 처분 또는 명령을 한 때에는 지체없이 국회에 보고하여 그 승인을 얻어야 한다.
④ 제3항의 승인을 얻지 못한 때에는 그 처분 또는 명령은 그때부터 효력을 상실한다. 이 경우 그 명령에 의하여 개정 또는 폐지되었던 법률은 그 명령이 승인을 얻지 못한 때부터 당연히 효력을 회복한다.
⑤ 대통령은 제3항과 제4항의 사유를 지체없이 공포하여야 한다.
돌이켜보면, 엉겹결에 초유의 대통령 구속영장을 심사하게 된 차은경 판사는 단 한번의 질문으로 비상계엄사태의 ‘스모킹 건’이 될만한 핵심을 찔렀지만, ‘비상입법기구’란 말이 헌법 제76조와 결부된 것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한 셈이다.
아니면 차 판사가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구성의 오류에 빠진 국내 언론의 상상력에 영합하는 유도성 질문을 던졌다는 의구심을 초래할 수 있다.
공수처가 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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