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확인이 쉽지 않은 '윤석열 도피설'이 나도는가 하면, 2차 체포영장 집행시 예상되는 '윤석열 예상 도주로'까지 등장했다. 도주로에는 국가 주요안보시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헌법기관인 국회의 책임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법관은 고의성과 같은 범행의 동기를 중시하지만, 정치인은 동기보다 결과를 더욱 무겁게 여겨야 한다. 비상계엄사태가 초래된 근본적 원인도 동기를 앞세우는 신조와 신념의 윤리가 결과와 파장을 헤아리려는 책임의 윤리를 억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독 안의 쥐' 같은 조건에 놓인 현직 대통령의 '체포 놀이'도 책임의 사유가 마비되고 신조의 언행만 난무한다.
20년 동안 세계를 세차례 놀라게 한 'K-탄핵'은 한국민주주의 탄력성과 복원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장차관 가릴 것 없이 '탄핵의 일상화'라는 과잉적 양상을 드러내며 현행 대통령제의 종말을 예고한다. 현 대통령제를 더 잘해 보자는 중임제 개헌론은 '만인은 평등하지만 더 평등한 사람이 있다'는 개소리가 투영돼 있다.
'수령과 수괴'의 나라 : '반국가' 대 '내란'
수령과 수괴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용어다. 모두 우두머리란 뜻이지만 요즘 표현으로는 보스(boss)와 같다. 북한(조선)에서 수령( 首領)이란 고답적이지만 최고의 존엄과 권위를 담은 용어가 조금씩 퇴조하다가 최근에는 대외적으로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법조문의 경직성을 고려하더라도 수괴(首魁)란 용어도 괴수, 괴뢰와 같이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조선시대에서 수괴는 왕에게 반역하여 반란을 주모한 자를 비하해서 지칭한 말인데, 21세기 한국에서 법률용어란 이유로 대유행을 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12.12 군사반란 수괴는 전두환, 12.3 내란 수괴는 윤석열으로 틀이 잡힌 셈이다.
영수회담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철 지난 유행이었다.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인가, 수령인가, 수괴인가. 여하튼 수괴론의 철 지난 대유행은 현행 대통령제 시스템의 붕괴를 은유한다.
또한 민주당이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을 내란 선전·선동 혐의로 고발하자,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표 등을 무고와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발했다. 시민단체는 박종준 대통령 경호처장을 고발했고, 대통령 국가안보실은 부승찬 등 민주당 의원 13명을 고발했다. 급기야 검찰이 구속기소한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변호인이 이미선 헌법재판관을 고발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지속 가능하지 않은 '오징어 게임'을 벌이는 양상이다. 모두가 이런 저런 이유로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라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반국가'라는 말이나 '내란'이란 말로 반대세력을 고립시키고 중간세력을 분리하려는 선전선동은 20세기적 발상으로, 지금 시대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
비상계엄의 역설 : 이중권력 구조화 - 국회 재의결(2/3) 및 탄핵의 일상화 - 대통령제의 종말
비상계엄사태가 권력구조에 던지는 시사점은 역설적이다. 기존 대통령제는 제왕적이라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 국면은 야당의 압도적 의석이 대통령제를 붕괴시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통령-대통령 대행(총리)-대통령 대행의 대행(부총리)가 모두 쫓겨날 신세이고, 행안부 장관의 사퇴와 법무부장관 등의 탄핵으로 국무위원회도 대행위원회로 바뀌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발동은 표면적으로 국회와 선관위 등에 대한 위헌적 군경 동원 및 권력남용이었지만, 구조적으로는 압도적 야대여소로 인한 사실상의(de facto) 이중권력(dual powers)에서 줄탄핵에 대한 역공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더 나은 대통령제로 가는 과도기로 이해할 것인지, 기존 대통령제의 사실상 종말로 이해할 것인지는 숙고가 필요하다.
5년 대통령 단임제든, 4년 대통령 중임제든 간에 양당의 적대적 공생구조 및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적대적 정치풍토에서는 국회 과반을 차지한 여당의 대통령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대통령제의 장점이 작동하기 어렵다. 더욱이 야당이 국회의 과반 혹은 2/3 이상을 차지할 경우에는 사실상 대통령제의 종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제의 작동을 위해 여당에 의석을 몰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최근에는 유권자의 견제심리가 발동하여 야당에 의석을 몰아주는 경향이 더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개헌의 방향은 다소 명확해진다. 국회의 의석분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통령 중심제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고, 오히려 국회의 의석분포를 반영한 대통령제로의 변환이 불가피하다. 즉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으로 대통령제는 존속하되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반영하여 국회와 행정부의 이중권력 마찰을 최소화하는 제도적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법륜의 생각 : 분권형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 주문
지난해 말에 필리핀 민다나오 학교지원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법륜 스님이 중앙일보 인터뷰(12.20 보도)에서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는다’는 수행적 관점에서 위기상황을 전화위복으로 만들 것을 주문했다.
법륜은 “다음 선거 전에 개헌을 통해 더 나은 시스템을 꾸린다면, (비상계엄사태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고 역설했다. 구체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분산을 통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제시했다. 즉 외교ㆍ안보ㆍ국방은 대통령이 하고, 나머지는 총리와 내각이 맡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민적 합의 위에서 대통령의 권력분산과 지방분권을 담은 개헌과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개편을 이끌어내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인터뷰 내용이다.
계엄사태에 대한 생각 : 불행 중 다행
“한 마디로 ‘불행 중 다행’이다. 불행은 21세기 대한민국에 계엄령 선포라니. 국가적으로 볼 때 창피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 하나 안 다치고, 6시간 만에 끝났다. 다행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다른 나라는 삼일 천하는 가지 않나. 대한민국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거고, 동시에 민주주의가 단단하다는 말이다. 한국의 정치는 후진적이지만, 한국의 국민은 시위문화와 뒷정리 등에서 세계가 부러워할 선진적 모범을 보였다. 성숙했다는 이야기다.”
초당적 협력으로 '불행 반복' 시스템 바꿔야
“비상사태라서 계엄이 선포된 게 아니고, 계엄을 잘못 선포해서 비상사태가 됐다. 여야는 초당적으로 협력해 이 문제를 이른 시일에 해결해야 한다. 왜 이런 불행이 반복되는가. 결국 시스템 문제다. 이 리스크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개편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외교ㆍ안보ㆍ국방은 대통령이 하고, 나머지는 총리와 내각이 맡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국민적 합의 위에서 대통령의 권력 분산과 지방 분권을 담은 개헌과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개편을 이끌어내길 바란다.”
현 국가상황에 대한 수행적 관점 :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는다.
“내가 실수를 했다. 그럼 이미 일어난 실수를 받아들이고, 실수를 안 했을 때보다 더 낫게 만들면 된다. 똥을 방에 두면 오물이지만, 밭에 두면 거름이 될 수 있다.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는다고 하지 않나. 다음 선거 전에 개헌을 통해 더 나은 시스템을 꾸린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이게 수행적 관점이다.”
안철수 의원도 2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그 대안으로 선거구제 개편과 대통령 권한축소 개헌을 제시했다.
여야의 극단적 대립의 원인은 정치 양극화
정치 양극화가 고착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설 때가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국민통합의 최적기였지만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 등을 통해 국민을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고, 그때를 기점으로 양 진영 간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이 심화돼 양극화 경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치양극화의 대안 : 독일식 혹은 중대선거구제, 대통령 권한축소
소선거구제는 거대 양당에 극도로 유리한 제도로서 양당 후보 중 한 사람을 뽑는 셈이다. 내가 정의당 후보를 찍고 싶어도 당선 가능성이 없으니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찍게 된다. 사표가 거의 60~70%는 되는 것 같다. 이러다 보니 투표 비율과 국회 의원구성 비율이 너무 다르다. 국민의 의사가 반영이 안 된 국회를 누가 신뢰할 수 있는가.
사표를 줄여야 한다. 일단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가장 좋은 방안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당이면 아무리 작은 당을 찍어도 그 표가 계산돼서 의원이 배출된다. 다당제가 될 수밖에 없고, 제1당이 과반을 못 얻으니 연정을 할 수밖에 없다. 타협, 양보, 합의가 필요하고, 중도적인 정치로 이어진다. 국민 생각의 구성과 의회 구성의 비율이 같으니 국회에서 합의가 되면 국민이 받아들인다.
중대선거구제를 고려할 수도 있다. 한 지역구에 2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는 지금의 양당구조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3명 이상을 뽑아야 제3의 정당이 나온다. 중대선거구제로 간다면 최소 3~4명을 뽑는 식으로 가야 한다.
한국 대통령은 행정권에다가 인사권, 예산권, 정부입법권을 갖고 있고, 감사원까지 행정부 소속으로 두고 있다. 이런 권력의 절대반지를 끼면 누구든 완전히 눈이 돌아가게 된다. 개헌의 방향은 대통령의 이런 권력을 축소하는 게 핵심이다. 의원내각제는 안된다. 국민은 대통령보다 국회의원을 더 신뢰하지 않는다. 선거제 개편 없이 다수당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자동으로 총리가 되는데, 이것은 지금보다 더 최악이다. 이원집정부제는 윤석열 대통령에 이재명 총리가 되는데 국정운영이 되겠나. 사람들이 제일 잘못 생각하는 게 4년 중임제다. 대통령 권한을 그대로 둔 채 4년 중임제를 하면 ‘5년짜리 왕’을 ‘8년짜리 왕’으로 만드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래서 권력축소형 대통령제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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