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이 90대 원로시인의 작품활동 재개에 관해 “(문단)권력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문학계 미투’와 관련해서 고은 시인은 최 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과 2심에서 패소하자 대법원에 항고하지 않았다. 당시 2심 재판부는 최 시인의 일기장을 핵심증거로 채택하고, “최 시인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돼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최 시인은 <헤럴드경제>에 기고한 글에서 고 시인의 작품활동 재개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문단 권력과 관계된 구조적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특히 문단의 모호한 태도 속에 뻔뻔함이 가득하다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지난 월요일 아침부터 고은 시인의 문단 복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문자와 이메일이 쏟아졌다. 등단 65주년 기념 시집과 대담집을 출간하며 “5번의 가을을 보내는 동안 시의 시간을 살았다”고 고은 시인은 지난 5년을 회고했다고 한다. 고은은 2018년 여름 나를 상대로 뻔뻔스럽게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고, 1, 2심에서 내가 모두 승소하였다. 원고 고은의 대법원 상고 포기로 나의 승소가 확정되었으나, 2019년 겨울에 재판이 끝나기까지 나는 두 번의 가을을 보내며 고통의 시간을 살았다.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진실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실을 증명해야 했다.
‘가족과 부인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고은의 발언에 충격과 참담함을 느낀다. 젊은 여성에게 치욕적인 추행을 하여도 성관계를 맺지 않았으면 가족과 부인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성인식이란 말인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 뒤에 숨더니 이제는 출판사 뒤에 숨어 현란한 말의 잔치를 벌이는 그가 나는 두렵지 않다.
고은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시인인지 그간의 경력과 활동을 소장에 길게 열거하였다. 소장을 읽으며 나는 내가 싸워야 할 상대가 원고 고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거대한 네트워크, 그를 키운 문단 권력과 그 밑에서 이런저런 자리를 차지하고 이익을 챙긴 사람들, 작가, 평론가, 교수, 출판사 편집위원, 번역가들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전체라는 사실을 알았다. 몇십 년 전에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탈퇴한 뒤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확실한 진실’이라는 버팀목이 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여성 문인 등에 행한 그의 성추행에 대하여 피해자나 목격자를 특정하거나, 때와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원고 고은의 성추행 증거들을 적어 재판부에 제출했다. 나는 1심도 이겼고 항소심에서도 이겼다. 대법원까지 갈 줄 알았는데 원고가 상고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면서도 허망했다.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하더니 끝까지 싸울 배포도 없었나?
원고 고은은 재판정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고, 당사자 신문 신청에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았다. 나는 1심과 항소심의 모든 재판기일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상황을 기억에 의존하여 모두 법정에서 진실하게 진술했다. 자신이 제기한 소송인데 법정에 나올 배짱도 없는 비겁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란 말인가? 진실을 말한 후배 시인의 글에 대하여 명예를 훼손당하였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그가 전(全) 지구적 시인 맞나?
그의 시집에 어느 대학의 명예교수인 K선생이 아름답고 모호한 해설을 썼다고 한다. K처럼 해외문학을 전공한 먹물들, 최루탄이 쏟아지는 화염의 시대에 외국으로 도피했던 그들에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감옥에 간 시인’은 빛나는 존재였으리. 얌전한 샌님인 평론가들에게 술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여자를 욕보이는 고은의 요란하고 대담무쌍한 말과 추행은 멋있어 보였을 게다.
내가 경제적으로 가난해 노이즈 마케팅을 한다는 원고 고은의 거지 같은 주장을 반박하려 세무서에 가서 지난 10년간 소득금액증명원을 떼며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시는 그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없을 줄 알았는데… 권력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권력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나는 지켜볼 것이다.”
최 시인이 저명한 원로 비평가가 아름답고 모호한 추천사를 썼다고 은근하게 꼬집은 시집 <무의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속은 겉이 아니란다. 다 겉이면 속 없는 겉뿐이란다. 껍데기여 오라. 껍데기여 오라. 나 보수반동으로 사뢴다 돌이켜보건대. 이 세상은 드러내기보다 덮어두기 꼭꼭 숨기가 더 많다. 숨은 것 꼭꼭 숨어라 감춘 것 제발 들키지 마라 어미가 새끼 숨긴다” (‘숨은 꽃’ 중에서)
겉과 속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한 세상에서 이런 구절이 은유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시를 발간한 출판사의 이름이 실천문학사인데, 최 시인이 기고문의 제목을 ‘위선을 실천하는 문학’이라고 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원로시인의 작품활동 재개에 대한 시중의 부정적 여론이 만만치 않다. 인터넷 문학전문지 뉴스페이퍼가 트위터를 통해 1월 7일~8일 동안 고은 시인의 문단복귀 적절성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1989명(문인 172명/독자 1817명) 중에서 복귀반대(1973명, 99.2%)가 복귀찬성(16명, 0.8%)을 답도했다.
반면에 뉴스토마토가 <서치통>을 통해 10일~12일 온라인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는 1899명 중에서 복귀찬성과 복귀반대가 각각 50%씩 나왔다. 하지만 고 시인의 신간작품을 읽어볼 의향에 대해서는 70.6%가 거부의사를 드러냈다.
최 시인은 풍자시집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2006년)을 수상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유종호 교수는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의 급소를 찌르며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이유를 구현했다”고 평가했다.
"화가는 화가 나지 않고, 시인은 시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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