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차토프가 이끈 개발팀이 원자로 가동에 성공하자 베리야가 흥분해서 연쇄분열이 일어나는 원자로에 뛰어들려고 했다.” (Robert J. Service의 스탈린 전기 중에서)
핵 시대의 여명기에 소연방(Soviet Union)의 핵무장을 위한 암중모색을 짚어보는 것은 북핵의 불가역성과 포기불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소연방 정부가 핵무기와 직결된 직접적 지원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소연방에 속했던 나라들에 산재했던 핵과 미사일 관련 기술 및 인력은 중국과 조선의 핵개발에서 중요한 단계마다 필수적인 외적 지원이 되었다.
제정 러시아의 기초과학 : 베르나드스키
소연방이 핵과 미사일 경쟁에서 미국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러시아의 기초과학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다. 러시아는 계몽군주 표트르의 시대에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초 표트르에 의해서 서유럽의 자연과학과 교류를 확대하고, 19세기 중반에는 러시아 학자들도 국제적 명성을 갖기 시작했다. 각종 연구기관도 외국인 학자들보다 러시아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제정 러시아의 광물학자 베르나드스키(Vladimir Vernadskii)는 1889년 파리에서 피에르 퀴리의 학생으로 연구에 참여했고,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이후 카데트(Kadet, 입헌민주당) 창당에도 관여해서 1908년부터 1918년까지 활동했다.
베르나드스키는 1910년 12월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증기와 전기가 인간사회의 구조를 바꾸었지만 방사능현상에서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 원천의 수백만배가 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원천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방사능 광물을 소유하는 것이 금, 토지, 자본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베르나드스키의 영향으로 러시아는 1911년부터 방사능 광물을 탐사했고, 1914년에 중앙아시아에서 방사능 관련 물질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 ‘페르가나 계곡’에 우라늄광산이 세워졌지만 1917년까지는 민간회사의 소유였다.
베르나드스키는 볼세비키 혁명 이후 라듐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그 목적을 원자력에 대한 완전한 이해라고 규정했다. 그는 1922년 초에 “우리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었던 인류 생활의 위대한 혁명에 접근하고 있다”면서 “인간이 원자력을 손에 넣게 되는 시기는 멀지 않을 것이다”고 썼다.
그가 남긴 기대와 우려는 적중하였다. “인간이 원자력을 사용하게 될 때 선한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기파괴로 향할 것인가? 과학자는 자신들의 작업을 인류의 가장 좋은 조직과 연결해야 한다.”
베르나드스키는 구체제와 혁명세력을 동시에 배격했던 카데트 주요인사들이 사형을 당하는 상황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파리로 망명했다. 이후 소르본대학에서 지구화학을 강의하다가 1926년에 귀국해서 ‘생물권’이라는 독창적인 저작을 완성했다.
그의 영향으로 소연방에서는 행성의 변화와 생태계를 통합해서 생물을 이해하려는 통합적 관점이 확산되면서 생명을 유전자와 분자로 세분화해서 이해하려는 환원적 관점과 대립했다.
그는 과학사상이 생물권(biosphere, 지구표면과 대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단계가 되면 인류생활권(noosphere)이란 새로운 개념이 제기된다는 주장을 담은 ‘Science Thought as a Planetary Phenomenon’(1938)을 저술했지만 스탈린체제에서 공식적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베르나드스키는 새로운 시대에서 과학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민주적으로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과학이 소연방의 민주적 기초를 강화할 것으로 믿었다. 그는 사회주의 이상을 신뢰했던 선량한 과학자였지만, 그의 이상은 후대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소연방은 1918년부터 의료용과 군사용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우라늄의 공급선을 장악했다. 독일의 위협이 가중되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공되던 우라늄을 비아트카주의 멘델레예프스키에 있는 화학공장으로 옮겨서 콜핀(Khlopin)이 고안한 과정을 통해서 최초의 러시아산 라듐을 추출했다.
이에 앞서 1806년 파리에서 방사능(radioactivity)을 발견하였고, 1898년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의 방사능은 우라늄보다 수백만 배가 많았다. 라듐의 파괴성을 모르고 립 포인팅(lip pointing)으로 라듐 시계를 만들었던 여성 노동자 50여명이 뼈가 으스러지는 참혹한 후유증을 겪으며 사망했다(라듐 걸스 사건).
소연방은 국립라듐기금을 조성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라듐을 국유화했다. 1914년에 시작된 라듐 생산은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됐다가 1924년에 재개됐고, 다시 1930년대에 주춤했다가 1940년대부터 미국과 핵개발 경쟁이 시작되면서 증산에 박차를 가했다.
국립과학연구소의 탄생
19세기 후반 혁명기를 맞이하면서 과학발전이 미신을 몰아내고 짜르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허무는데 기여할 것이란 기대가 확산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이론이라고 믿는 볼셰비키는 과학기술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고 번성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았다.
볼세비키는 1919년 3월 제2차 당계획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자양분을 받으며 부르조아적 습관에 익숙하지만 새로운 체제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 있는 효용은 그들에 의해 창출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 과학자들이 굶주림과 질병, 각종 징발에서 벗어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도자들의 안목이 작용했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가 이룩한 과학기술과 문화를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던 레닌은 1920년에 ‘공산주의는 소비에트권력과 전기보급’(Soviet power + Electrification of the whole country)이라는 테제를 제시했다.
고리키는 그해 1월 페테르부르크에 과학자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해서 식량배급 등에서 배려하도록 했다. 과학자 알렉산더(Anatolii Aleksander)는 나중에 1930년대 연구소 기숙사 경험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연구소에서 8명이 함께 잤는데, 담요로 머리를 덮어쓰고 자야 했다. 쥐들이 귀를 갉아 먹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볼세비키는 독자적 정책노선보다는 과학자들이 요청하는 연구소를 지원하는 수준에서 그쳤지만, 국립물리기술방사선연구소(State Physicotechnical X-Ray Institute)를 비롯한 연구소들은 소연방의 핵개발에서 자생력의 원천이 되었다.
요페(Abram Ioffe)가 주도적으로 관여한 국립물리기술방사선연구소와 여기서 분화된 연구소들은 이론물리학자들의 요새였고, 장차 핵개발의 요람이 되었다. 이론물리학의 둥지이자 과학자들의 요새가 되면서 혁명과 전쟁의 격변기에 연구자들을 보호하고 연구의 지속성을 지켜주었다.
이후에 국립물리기술방사선연구소는 레닌그라드의 화학물리연구소(Leningrad Institute of Chemical Physics), 물리기술연구소(Leningrad Physicotechnical Institute), 전기물리연구소(Leningrad Institute of Electrical Physics) 등으로 분화된다. 또한 기초과학 및 핵물리학 의 연구시설들이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으로 확산됐다.
레닌의 전기보급 강조에서 드러나듯이 소연방 지도부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과 산업, 과학과 군사를 긴밀하게 연계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1930년대부터 소연방 당국은 과학자들에게 산업화에 구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요구하지만, 당시 실험적인 경제시스템에서 과학자들의 신기술 연구와 산업현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1930년대 초에 스탈린체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국제교류가 차단되었고, 1930년대 말에는 대숙청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제거되었다. 소연방이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악조건에서도 이론물리학 및 기초과학을 발전시킨 과학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요페(Ioffe)는 방사선(X선)을 발견한 독일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의 연구소에서 유전체(dielectric)의 전도성(conductivity)을 연구했다. 요페는 짜르체제를 반대하면서도 볼세비키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과학기술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투철했다.
그가 1918년 9월 볼세비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소연방은 핵개발의 여정에서 ‘운명의 강’을 건넜다. 1921년 요페가 6개월 일정의 서유럽 출장을 준비할 때 소연방의 신인도가 낮았기 때문에 루블화가 아니라 경화(硬貨)의 결제가 필요했는데, 레닌이 이를 승인하면서 나중에 다른 과학자들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26년 미 버클리대학은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요페는 조국에 남아 반도체(semiconductor) 물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 및 지원에 전념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지켜낸 국립물리기술방사선연구소는 ‘요페의 유치원’으로 통할 정도로 젊은 과학도와 연구원들을 양성하는데 기여했고, 여기서 배출된 학자 중에서 카피차(Peter Kapitsa)와 세메노프(Nikolai Semenov)는 노벨 과학상을 받았다.
과학자들에게 필요했던 과학자 : 요페
서유럽 과학자들과 소연방 후학들의 가교 역할을 했던 요페는 1933년 이후 1956년까지 학술교류를 위한 해외출장을 나갈 수 없었다. 이론물리학자 가모프(Georgii Gamov)가 1933년 벨기에 학회에 참석해서 부인과 함께 망명하고,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당서기 키로프(Sergei Kirov)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과학자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해 일시 귀국한 저온물리학 연구자 카피차(Peter Kapitsa)는 영국 캠브리지대학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카피차는 런던에 남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연방이 정치와 경제에서 강하더라도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관해서는 서유럽의 완벽한 식민지라고 썼다.
대숙청(1937년~1938년)으로 7백만명~8백만이 체포되는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내무인민위원회(NKVD)가 정해준 시한폭탄을 달고 다니는 신세였다. 소연방에 머물렀던 영국 물리학자는 당시의 공포를 흑사병에 비유할 정도로 총살을 당하는 과학자, 수용소에서 사망하는 과학자가 속출했다.
페테르부크르, 모스크바와 함께 주요한 연구거점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물리기술연구소는 초토화되었다. 웨이스버그(Alexander Weissberg)는 ‘The Accused’라는 저서에서 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가 1935년까지 ‘스탈린의 사막에서 자유의 오아시스’라고 칭송했지만, 1937년~1938년의 대숙청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에 체포된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는 1939년 모스크바에서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과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한 직후 독일 비밀경찰(게쉬타포)에 넘겨졌다.
원폭의 아버지 : 쿠르차토프
러시아의 원자력박물관에는 원형잠수정과 비슷한 최초의 핵폭탄을 비롯해서 1951년에 시험된 40 kiloton 핵폭탄, 1953년 시험된 핵폭탄(Layer Cake)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연방의 역사에서 ‘원폭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르차토프(Igor Kurchatov)도 국립물리기술방사선연구소 출신이다.
쿠르차토프는 1924년 파블로프 실험연구소에서 눈(snow)의 방사능에 관한 논문을 썼고, 그 후에 국립물리기술방사선연구소에 합류했다. 그는 1930년대부터 연구의 초점을 핵물리학으로 선회하였다. 요페는 1932년 말에 핵물리학 연구팀을 구축하고, 연구설비 구입을 위해 중공업인민위원회로부터 10만 루블을 받았다.
1933년 9월에는 원자핵에 관한 소연방 전국회의가 열리자 페르미(Enrico Fermi)와 해외 핵물리학자들이 참석했고, 이 자리에는 젊은 연구진으로 쿠르차토프를 비롯해 하리톤(Iulii Khariton), 알치모비치(Lev Artsimovich), 레이푼스키(Aleksander Leipunskii) 등이 참석했다.
쿠르차토프는 이듬해 연구에 필요한 자료분석과 실험설비 구축에 매진했다. 요페는 1930년에 원자력이 200년~300년 후에 인류에게 닥칠 에너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메모를 남겼다.
이 시기에 크로크포드와 월톤(Cockcroft and Walton)은 진화된 양성자가속기를 만들고, 버클리대학의 로렌스(Ernest O. Lawrence)도 원통형가속기(cyclotron)를 개량했다. 소연방 우크라이나 물리과학연구소(Ukraina Physicotechnical Institute)는 크로크포드와 월톤의 실험을 반복적으로 시도했고, 라듐연구소에서 원통형가속기를 제작했다.
쿠르차토프는 나중에 ‘원폭의 설계자’로 불리워지는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의 연구팀이 1934년에 중성자 폭발에 의한 핵반응을 정리한 내용을 접하고, 양성자선(proton beam)의 실험을 중단하면서 중성자에 의한 방사로 몇 가지 동위원소 안에서 생겨나는 인공 방사능을 연구했다.
이 과정(1934년~1936년)에서 쿠르차토프는 인공 방사능과 관련된 논문 17편을 출간해서 국제 물리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요페는 사이클로톤 제작을 위해서 물리학자 2명을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파견할 것을 중공업인민위원회에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쿠르차토프는 1937년부터 일주일에 하루씩 라듐연구소의 사이클로톤을 이용해서 연구했고, 2년 후에는 자신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1943년 쿠르차토프는 소연방 핵 프로그램 과학담당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핵개발의 핵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알리하노프(Abram Alikhanov) 형제도 방사선 물리학에서 핵물리학으로 이동해서 베타 스펙트럼(beta spectra)을 연구했고, 1930년대 말기에 하리톤(Khariton)과 젤도비치(Yakov Zeldovich)는 핵분열 연쇄반응에 성공했다.
과학자들에 대한 레닌의 예우는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대숙청으로 퇴조하였고, 과학계는 부르주아적 풍조와 회색분자들의 온상으로 매도되었다.
스푸트니크(Sputinik) 프로젝트를 지휘해서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코롤료프(Sergey Pavlovich Korolyov)는 1938년에 숙청되면서 6년간 수감되었고, 시베리아 코르마광산의 노동수용소(Gulag)에서 노역을 했다.
코를료프는 치아를 모두 잃고 턱이 골절되었고, 괴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소연방은 나치독일과 존망을 건 사투를 전개하면서 로켓을 비롯한 군사기술의 낙후성을 절감하면서, 과학자의 인간개조에서 과학적 능력의 활용으로 선회하였다.
그는 스탈린의 사망 이후에 ICBM 개발과 ‘보스토크 계획’(유리 가가린) 등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코롤료프는 쿠르차토프, 그리고 아카보 자동소총(AK-47)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와 함께 ‘소비에트 군사기술의 3대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소연방의 핵 및 ICBM 개발 등과 관련해서 알렉산드로프, 쿠르차토프, 하리톤, 사하로프(Andrei Sakharov), 코롤료프 등이 여러 번에 걸쳐 국가훈장을 받았다. 특히 사하로프는 1948년부터 쿠르차토프, 예브게니예비치 등과 원자폭탄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1949년 8월 29일 핵폭탄 실험(RDS-1)에 성공했고, 1955년 11월 22일 수소폭탄 실험(RDS-37)에도 성공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1956년 레닌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많은 레닌훈장과 스탈린훈장을 받은 자가 리센코(Trofim D. Lysenko)였다. 그는 소연방의 과학계에 씻을 수 없는 오명과 폐해를 남겼다.
1940년 우라늄위원회 설치
소연방은 1940년 6월에 우라늄위원회를 설치해서 핵분열 연구에 착수했고, 1943년에 나중에 핵개발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쿠르차토프(Igor Kurchatov)가 참여하는 원폭연구팀(50명)을 가동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4년 9월에 하이드파크 밀약을 통해서 일본에 대한 원폭공격을 합의했고, 미 공군은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핵공격의 막대한 파괴력을 깨달은 스탈린은 2주 후에 ‘핵개발 긴급계획’에 서명하고, 국가 최우선사업으로 책정해서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베리야에게 총책임을 맡겼다.
이때부터 소연방은 미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핵개발에 관한 정보와 동향을 ‘철의 장막’ 속에 은폐했다. 미국은 소연방의 핵개발 의향을 탐지하고 모든 핵무기의 국제관리 및 사찰을 제안했지만, 소연방은 역으로 ‘그로미코 플랜’(1946년)을 제안했다. 미국과 소연방이 협정을 체결해서 3개월 이내에 ‘지상의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로미코는 핵무기를 독점하는 미국이 이러한 제안을 동의할 리가 없다고 보고, 미국의 어정쩡한 대응을 기회로 삼아 국제사찰을 요구하는 국제적 압력을 분산시켰다.
소연방은 1949년 암호명 ‘최초의 번개(First Lightning)’로 불려진 플로투늄 원자폭탄(RDS-1)의 폭발실험에 성공했다. 그해 9월에 조선(DPRK)의 직업총동맹과 민청 중앙위원장은 “쏘련의 핵실험이 인류행복에 기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박창옥 당시 북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은 “쏘련의 원자무기 소유는 전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로동신문, 1949.9.29~30).
카자흐스탄 동부의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의 지명은 나중에 쿠르차토프를 기념하여 쿠르차토프시로 도시명이 바뀌었다. 세미팔라틴스크-16 구역에서는 1949년 8월 29일 오전 7시부터 1990년까지 456회에 달하는 핵실험이 행해졌다(소연방 전체 715회).
당시 카자흐스탄 인민들은 최초의 핵실험을 소연방의 안보를 담보하는 쾌거로 이해했지만, 1957년에서 1960년까지 3년 동안 방사능피폭으로 인한 환자가 160만명이 발생하고 그 중에서 50만명이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서 1989년 10월 19일에 실시된 ‘최후의 핵폭발 실험’ 직후에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여러 도시에서 반핵시위가 발생하였다.
소연방의 해체로 카자흐스탄공화국은 SS-18(ICBM) 52기, TU-95(전략폭격기) 40기, 이동식 핵탄두 순항미사일 370기를 망라하여 총 1410기에 달하는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서 하루 아침에 4대 핵보유국(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으로 둔갑하였다.
서유럽 및 미국과 달리 산업혁명 및 산업화과정이 지체되었던 러시아에서 혁명을 통해 등장한 소연방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집요한 모방과 추격의 산물이었다.
소연방은 1947년 5월에 미국의 전폭기(B-29)를 복사한 ‘Tu-4’를 시험비행하는데 성공했고, 최초의 원자폭탄(RDS-1)도 미국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폭(Fat Man)의 복사판이었다. 이어서 1953년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 ICBM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1959년에 ‘달 탐사 로켓’을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군사기술에 대한 소연방의 적응능력은 2차세계대전 당시 1943년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쿠르스크(Kursk) 기갑전에서 잘 드러났다. 소연방은 나치 독일의 탱크를 획득해서 분석하고 모방 및 개량하는 방식으로 독자적 모델의 탱크를 양산했다.
지상최대의 기갑전에서 패퇴한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부는 소연방의 탱크 수준과 전술이 빠르게 진화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소연방은 항공기, 원폭, ICBM의 개발에서도 미국의 기술을 복사하고 모방하는 추격방식을 이어갔다.
미 전폭기 B-29가 소연방에 세 차례 불시착했는데, 소연방은 세 번 모두 기체를 반환하지 않고 해체과정을 통해서 기술을 습득했다. 미국은 항속거리 6100km의 B-29를 7886km까지 연장한 ‘B-50’을 개발했고, 소연방은 핵무기를 싣고 미국 본토까지 이동하는 전략폭격기보다 핵무기를 탑재하고 날아가는 ICBM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탄도탄(Ballistic Missile)은 30분~40분 안에 전 세계에 걸쳐 타격이 가능하고, ICBM 수백기만 있으면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연방과 미국은 ICBM 성능 향상과 핵무기의 경량화를 놓고 일대 경쟁을 벌이게 됐다. 또한 상대방의 ICBM 발사대(silo, launch facility)를 선제적으로 파괴하는 능력을 개발하고, 상대의 감시로부터 이동 및 은폐가 용이한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개발에 주력했다. 미국은 폴라리스(Polalis), 포세이돈(Poseidon), 피스키퍼(Peacekeeper). 트라이던트(Trident) 등으로 이어지는 잠수함미사일 시대를 열었다.
ICBM의 지정학적 배경
소연방이 ICBM에 몰두한 이유는 세계 경제에서 10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 저소득국가인 조선이 핵무기와 ICMB 개발에 골몰한 것과 똑같은 ‘지정학적 비대칭성’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유라시아에 걸쳐 동맹국에서 소연방으로 전폭기가 발진할 수 있기 때문에 2~3 시간 정도면 모스크바 등에 대한 핵 공격이 가능하다. 소연방은 미국 주변에 동맹국 및 발진기지가 없기 때문에 폭격기가 10시간 이상 비행하는 동안에 자국의 주요 방어목표가 노출되고 폭격기의 임무완수도 불확실하다.
미국은 전폭기를 통한 직접투하가 ICBM보다 명중도가 높고, 소연방 주변에서 발진이 가능했기 때문에 ICBM에 대한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핵경쟁 초기에는 핵폭탄의 무게가 100kt에 달했기 때문에 폭격기의 명중도(CEP)가 ICBM보다 우월했다.
CEP(Circle of Error Probable, 원형공산오차)는 전폭기로 발사 및 투하된 원폭이나 ICBM 탄도탄의 절반이 명중하는 원의 반경을 의미한다. 즉 10발을 발사해서 5발이 들어가는 원의 반경이 5m이면 ‘CEP 5m’가 된다.
명중도와 함께 유사시에 실질적으로 유효한 핵탄두의 탑재량(Payload)이 중요해지면서, 소연방과 미국은 핵폭탄의 경량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피 및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수소폭탄 개발에 몰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52년에 수소폭탄 설계에 성공했고, 소연방은 한국전쟁이 휴전하던 1953년에 최초의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미소 양국은 1954년부터 ICMB 양산 경쟁에 나섰다.
소연방은 1953년 5월 20일 ‘R-7계획’ 수립했고, 미국은 9월 13일 ‘아틀라스 프로젝트’ 수립하고 국가 최우선권을 부여했다. 양국은 이후로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ICBM 치킨게임’을 지속하면서, 핵전쟁으로 가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83년 소연방의 인공위성이 햇빛을 미국이 발사한 ICBM으로 오인하는 사건이 발생해서 소연방의 군부가 전쟁 돌입을 심각하게 검토하게 됐다. 핵무기를 탑재한 ICBM으로 반격에 나서려는 긴박한 순간에 소연방 방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Stanislav Petrov)가 인공위성의 신호를 컴퓨터 오류로 판단하고 ‘핵전쟁 취소코드’를 입력해서 오인 응사를 막았다고 한다.
이 내막은 1998년에 기밀이 해제된 문서를 독일 <빌트>지가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UN은 페트로프에게 세계시민상을 수여했다. 소연방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전폭기가 미국의 항공통제 및 요격망을 뚫고 미 본토까지 접근하는 것은 어렵지만, 미 전폭기는 한국의 공군기지를 비롯해서 오키나와·괌 등에서 출격하면 빠르게 평양 상공에 도착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비대칭성은 조선으로 하여금 ICBM 개발에 몰두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다.
소연방은 미국과의 지리적 비대칭성을 장거리미사일로 만회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inik)를 발사했고, 미국 내부에서 소연방과의 ‘미사일 갭(gap)’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1962년 전폭기 항속거리의 2배에 달하는 소형·경량 미사일, ‘미니트맨’(항속거리 13,000km)을 실전배치했다. 이에 소연방은 피춘다(Pitsunda) 비밀회의에서 미니트맨 대응계획을 논의하면서 기술적 추격이 아니라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는 도발적 전략을 선택하면서 쿠바위기를 초래했다.
흐루쇼프 서기장의 퇴장 이후 미·소의 ICBM 경쟁은 더욱 고조되었다. 미국은 1967년에 미사일발사대 1천개를 구축하고, 100곳에 달하는 발사통제센터(launch control center)를 설치했다.
핵 스파이 : 푹스와 로젠버그
소연방의 핵개발에서 내무인민위원회 실력자 베리야와 핵물리학자 푹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소연방의 핵폭탄 및 수소폭탄 개발에 관련된 두 사람의 역할과 비중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지만, 북핵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점들이 있다.
스탈린이 핵개발을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인 베리야(Lavrentii P. Beriya)에게 일임한 것은 소연방의 핵개발이 고도의 기밀을 유지하며 추진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최초 개발국인 미국도 극비리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미국의 핵 독점을 깨려는 후발주자인 소연방으로서는 미국의 감시와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은폐한 셈이다. 소연방이 철의 장막 속에 몇 겹의 장막을 더 치고 핵개발을 추진한 것은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소연방과 중국까지 의식해야 하는 조선이 핵개발에 성공한 내막이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것과 상통한다.
베리야는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지만, 소연방으로서는 핵무기 경쟁에서 그가 실질적으로 기여한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베리야는 우라늄광석의 채굴, 핵개발에 필요한 해외정보의 입수 및 검증, 개발팀 독려에 이르기까지 냉혈한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1941년 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돼 독일과의 전쟁을 지휘했고, 항공기 개발에도 관여했다.
독일인 이론물리학자 푹스(Emil Julius Klaus Fuchs)는 미국, 영국, 캐나다의 맨해턴 프로젝트(원자폭탄 제조계획)에서 빼낸 정보를 소연방에 전달한 혐의로 1950년 징역 14년형을 받고 9년 동안 복역하다가 모범수로 감형돼 1959년 동독으로 이주했다.
1942년 1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결정한 맨해턴 프로젝트는 1945년 7월에 우라늄 공급·235U 분리·플루토늄 생산을 거쳐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 푹스는 국립로스알라모 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에서 연구하면서 최초의 원자폭탄과 관련된 중요한 이론적 계산들에 관여했다.
원래 그는 독일 사민당(SPD)의 대학 지부에 가입했으나 1932년에 제명되자 독일 공산당(KPD)에 입당했다. 1933년 의사당 화재사건(Reichstag fire)으로 나치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영국으로 피신해서 과학도의 길을 걸었다.
히틀러는 의사당 화재 현장에서 “하늘이 내린 계시다. 이 화재가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밝혀지면, 이 못된 해충을 철권으로 박멸하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1933년 3월 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 델머(D. Sefton Delmer)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히틀러는 “이 불타는 건물을 보라. 공산주의 사상이 유럽을 단 두 달만 사로잡는다면 모두가 이 건물처럼 불타오르게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역사의 원전, John Carey, 김기협 역).
푹스는 1941년 영국의 원폭 프로젝트(Tube Alloys)에 참여하면서 암호명 소니아(Sonia)였던 독일 공산주의자 쿠젠스키(Ruth Kuczynski)를 통해서 소연방으로 기밀정보를 건네기 시작했다. 쿠젠스키는 극동지역에서 리차드 소르지(Richard Sorge)의 첩보망에서 활동했던 소연방 군정보기구의 대령이었다.
푹스는 1943년에 맨해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가고, 1944년에 로스알라모연구소의 이론물리분과에서 플로투늄탄 개발과 관련해서 내파(內破, implosion) 연구에 집중했고, 1946년 십자로작전(the Operation Crossroads weapons tests)에 관여했다.
또한 미국의 핵 정보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규정한 원자력법안(McMahon Act)의 준비를 도왔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영국으로 돌아와 원자력연구기관의 이론물리학 분과장이 되었다.
푹스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3년간 페크리소프(Alexander Feklisov)에게 수소폭탄 제조의 주요한 이론개요와 미·영의 연구성과 초안들을 넘겨주었고, 6회로 알려진 회합을 통해서 우라늄·플로투늄 폭탄의 실험결과와 우라늄 235(uranium-235) 생산에 필요한 핵심 데이터를 제공했다. 이런 정치적 행적에도 불구하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자인 베테(Hans Bethe)는 푹스를 역사를 바꾼 유일한 물리학자라고 평가했다.
소연방의 핵개발에 대한 총책임자였던 베리야(Lavrenti Beria)는 해외에서 빼낸 정보 및 자료를 과학자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교차검증을 했는데, 푹스는 소연방 물리학자들의 우라늄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는 2년간 4억 달러가 투입된 실험의 결과와 미국이 원폭제조에 사용하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총량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푹스는 동독으로 돌아가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원 및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됐고, 1979년까지 핵연구소의 부소장으로 활동하다가 과학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나중에 칼 마르크스 훈장과 국가훈장 등을 수상했다.
원자력연구의 메카이자 원폭의 산실이었던 로스알라모연구소와 관련된 스파이사건은 ‘푹스-소연방 라인’ 외에도 ‘로젠버그-소연방 라인’이 있었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와 부인은 핵정보를 소연방에 유출한 간첩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미 공산당 청년조직에서 활동했던 그린글래스(David Greenglass)는 여동생 이델(Ethel Rosenberg)의 남편(로젠버그)과 연결되었고, 로젠버그는 푹스를 관리했던 소연방의 정보요원 페크리소프(Alexander Feklisov)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로젠버그 부부는 그린글래스가 손으로 배낀 핵무기 스케치 등을 소연방에 넘긴 혐의로 1953년 6월에 처형되었다. 이들의 사형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직전에 집행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국병사들의 인명피해와 매카시즘이 영향을 미쳤다.
1990년에 공개된 흐루쇼프 전 소연방 서기장의 녹음파일에는 로젠버그 부부가 핵개발에 도움을 주었다는 대목이 나왔지만, 페크리소프는 1997년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로젠버그가 자신에게 넘긴 것은 원폭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코드명 리버럴(Liberal)’ 로젠버그의 간첩혐의는 대체로 입증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부인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석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스탈린의 핵외교
전후 소연방과 미국의 외교전은 미국과 외교적 접촉이 전무했던 중국과 조선의 전략수립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흐루시초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공격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의 힘이 커질수록 제국주의 국가의 호전성도 비례해서 커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핵개발 및 핵외교에 관한 소연방의 전략기조는 신경전(war of nerves)과 제한(limit)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스탈린은 히로시마 핵폭발 이후 당면한 위험은 전쟁 자체보다 미국의 핵독점에 기반한 ‘핵 외교’(위협 외교)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연방이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고 핵보유 사실을 대외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그러한 맥락에서 결정했다.
반면에 불안정한 세력균형 상태에서 미국을 지나치게 자극해서 전쟁상태로 가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신경전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소연방이 1948년 베를린 위기와 1964년 쿠바위기에서 보여준 것도 이러한 전략기조의 반영이고, 1950년~1953년 한국전쟁에서 소연방의 그림자를 감추려고 했던 것도 ‘제한’이 작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연방은 핵개발의 성공 여부, 개발의 시점, 핵무기의 보유여부에 대해서 시기마다 다른 태도와 반응을 드러냈다. 소연방의 최초 핵실험은 1949년 8월 29일로 알려져 있지만, 1947년 10월 6일 몰로토프 외무장관은 “핵무기에 대한 비밀이란 것은 의미가 없다”고 언급해서 원폭 제조를 암시했다.
1948년 2월 디미트로프(Georgii Dimitrov)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은 모스크바에서 접견한 질라스(Milovan Djilas) 유고슬라비아 부통령에게 소연방이 미국의 핵폭탄보다 우수한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소연방 지도부는 중국의 사절단 대표였던 류사치오에게 핵실험 사진을 보여준 것으로 알려졌고, 1949년 11월 6일에 열린 ‘10월혁명 32주년 기념식’에서 소연방공산당 정치국원 말렌코프는 “미국 외교의 핵심적 요소였던 도발적인 핵위협의 본질은 미국만 핵을 가질 수 있다는 완전히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핵보유’를 강력하게 암시했다.
타스(TASS) 통신도 소연방이 1947년부터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식으로 계속 보도했지만, 미국은 1952년까지 전반적으로 소연방의 핵보유 주장을 위장전술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강했다. 핵보유를 인정하면 핵위협에 기초한 대소 압박과 국제적 협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의도적 반응이었다면, 미국이 조선의 핵보유에 대해 장기간 불인정한 것과 같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소연방의 핵개발 및 핵실험이 실제로 이뤄진 시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시점을 은폐하거나 속이려고 했던 이유에서 찾아진다. 미국이 소연방의 개발시점과 수준을 조기에 간파하면 그만큼 빠르게 신형 핵무기 개발 및 양산 경쟁이 벌어져 소연방의 경제력에 부담이 되고, 어렵게 접근한 ‘핵 균형’에서 빠르게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핵개발 책임자였던 쿠르차토프가 동료 학자에게 말한 것처럼 외부에서 알아채서 방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후발국가 소연방이 놓쳐버린 시간을 만회하면서 충분한 규모로 원자력산업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발의 가공할 파괴력에 경악한 유럽에서 1945년 이후 반핵평화운동이 확산되었고, 소연방과 신중국도 조직적으로 지지 및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상황이었다는 점도 핵개발 여부 및 시점을 밝히는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1947년 10월에 핵무기 보유를 암시한 것은 핵실험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충격이나 이로 인한 갑작스런 외적 변수를 사전에 완충하고 차단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패망 이후 동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소연방의 군사적 긴장이 새롭게 조성되면서, 소연방 지도부는 미국의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소연방 지도부는 1947년까지는 가능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핵개발을 추진했지만, 그 이후로는 핵을 앞세운 미국의 외교적 압박과 점증하는 군사적 압력에 구멍을 내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소연방을 공격하면 핵무기에 의한 반격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위협을 공론화하고, 핵의 복점(複占, duopoly)에 기초한 세력균형을 도모했다. 소연방의 언론은 ‘핵위협 외교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Diplomacy of Atomic Blackmail)를 강조하면서 미국의 핵독점에 기반한 대소 우위가 붕괴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소연방의 대외전략은 핵무기 경쟁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과시해서 미국의 우월감을 약화시키고 미국에 비판적인 비동맹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기조로 선회했다.
1955년 소연방은 중국과 원자력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원자로를 제공했고, 중국은 수십명의 연구원 및 학생을 소연방에 파견했다. 소연방은 1957년에 신중국에 원자폭탄 제조기술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지만, 그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마오쩌둥과 소연방 지도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소관계가 급격히 냉각됐다.
중국은 1958년부터 자력으로 핵개발을 추진하기로 했고, 소연방의 원자력기술 이전을 기대하던 북한도 신중국과 과학기술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푹스가 ‘중국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첸싼창(Qian Sanqiang) 등을 도와 핵개발에 관여했다는 시각도 있다.
중국의 핵개발에서도 소연방과 조선의 과학자 충원과 닮은 점들이 나타난다. 프랑스 소르본대 출신의 첸싼캉, 미국 퍼듀대 출신 덩자센, 영국 버밍엄대 출신 야오통빈, 미국 MIT 출신 첸쉐썬 등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1세대가 되었다.
* 참고 문헌
Gar Alperovitz, Atomic Diplomacy : Hiroshima and Potsdam
David Holloway, Stalin and the Bomb : The Soviet Union and Atomic Energy
Anthony Cave Brown and Charles B. MacDonald, On a Field of Red
Thomas Reed and Daniel Stillman, The Nuclear Express : A Political History of the Bomb and Its Proliferation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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