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볼세비키혁명은 과학자들을 2개, 3개의 진영으로 갈라지게 만들었고, 히틀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독일의 과학자들을 염려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1938년에 독일의 과학자들이 핵분열을 규명하였고, 나치독일이 우라늄 프로젝트를 가동했을 것으로 우려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세계의 물리학계에 독일의 핵개발에 대한 공포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연합국의 과학자들은 양자이론에서 기본파이론(fundamental length theory)을 수립한 하이젠베르크 등이 히틀러에 협력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차라리 나치에 반대하는 연합국에서 먼저 핵개발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핵폭탄 제조를 위한 연구소의 설치를 건의했고, 양국 수뇌부의 합의에 따라 상당수 과학자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9년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마지막 기회
후대의 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J. Dyson)은 1939년이야말로 세계의 물리학자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토로하였다(The Scientist as Rebel).
1939년 가모프(George Gamov)는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열린 물리학자 회의에 핵분열을 논의과제에 포함시켰다. 이에 앞서 1928년 당시 20대 초반의 가모프는 독일으로 건너가 방사성 원자핵들이 붕괴하는 속도를 계산한 결과가 양자이론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하전입자가 원자핵 안으로 얼마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가를 계산해냈다. 또한 쉽게 들어온 만큼 쉽게 나갈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바깥 쪽에서 입자들을 쏘아준다면 입자들이 양자적 규칙에 따라 안으로 침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당시 50대 후반의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는 가모프의 생각이 가속기의 과학적 진가를 밝혀줄 것으로 보았고, 라듐에서 방출되는 입자들보다 훨씬 낮은 에너지로 가속되어도 입자들이 원자핵을 뚫고 들어갈 것이란 생각으로 입자가속기를 만들어냈다. 각국의 이론물리학자들과 실험물리학자들이 국경을 뛰어 넘어 원자력의 잠재력을 밝혀 나갔지만 원자폭탄의 파괴성과 핵폭탄을 둘러싼 무한경쟁을 제어하는데 실패하였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열린 물리학자 회의에서 페르미(Enrico Fermi)는 원자의 핵분열에 대해 설명하였고, 마침내 미국의 언론들이 원자폭탄(atomic bomb)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한국의 독보적 핵물리학자로 성장했던 이휘소 박사(Benjamin Lee)도 미 대학의 페르미연구소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보어(Niels Bohr)와 휠러(John Wheeler)를 필두로 하여 폴란드의 로트블랫(Joseph Rotblat), 소연방의 젤도비치(Yakov Zeldovich)와 하리톤(Yuli Khariton)이 핵분열 연쇄반응이론을 규명하였다.
아인슈타인, 보어, 페르미는 독일의 하이젠베르크(Werner Heigenberg), 소연방의 카피차(Pyotr Kapitsa)·하리톤·쿠르차토프와 정보를 교환했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파이얼스(Rudolf Peierls), 프랑스의 졸리오-퀴리(Frederic Joliot-Curie), 나중에 국립 로스앨러모스연구소의 수장이 되는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도 연구에 가세하였다.
졸리오-퀴리, 시라드(Leo Szilard), 페르미 등은 나치 독일이 원폭을 먼저 제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나치는 체코를 점령한 후에 야히모프(Jáchymoff) 광산에서 채굴한 우라늄광을 전면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구체적 정황은 서구 학자들의 의심을 초래했다.
시라드는 연합국이 선수를 쳐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아인슈타인에게 졸리오-퀴리, 페르미 등의 연구성과에 대해 설명하고,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게 전달할 서한을 보냈다. 루즈벨트는 저명한 학자들의 우려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1942년부터 20억 달러와 연인원 15만명을 투입해서 원폭 3기를 개발하였다.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폭발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에 이르러 나치의 패배가 점점 확실해지자 로트블랫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이탈하여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다이슨(Dyson)은 당시 물리학자들이 원폭의 위험성을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책임을 논의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1944년에 독일과 일본에 핵폭탄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굳이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앞장선 것은 과학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라는 것이다.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주의는 전황이 악화되면서 핵개발에 집중할 수 없었고, 소연방은 진지하게 탐색하였지만 미국보다 앞설 수 없는 조건과 환경이었다.
결론적으로 다이슨은 당시 과학자들이 공공의 안위보다 선점경쟁을 벌이면서 핵무기가 초래할 재앙에 대하여 정직하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미국 핵개발 목적의 변화 : 나치공격→일본공격, 소연방견제→핵독점에 기초한 세계패권
미국이 핵개발을 선도하게 된 배경에는 나치 독일이 핵을 먼저 개발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크게 작용했지만, 미국은 독일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을 완성해서 독일이 아니라 일본과 소연방을 겨냥한 공격과 위협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1942년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원자폭탄 개발팀을 조직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라비(Isidor I. Rabi) 콜럼비아대 교수는 군사적 목적의 핵 연구를 반대했지만, 오펜하이머는 1943년 2월 서한에서 “이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전시 무기개발이라는 중대한 사안이다. 나치에 대항하는 우리로서는 무기개발이 선택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핵공격의 참상을 목격하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말했다. “교전중이거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국가의 무기고에 원자폭탄이 추가된다면, 인류는 로스엘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1945.10.16)
1944년 보어는 나치독일의 붕괴 후에 소연방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소연방을 포함하는 연합국 전체가 서로 신뢰를 강화하고 원자력기술을 공유하는 세계(open world)를 구축할 것과 일본에 대한 핵공격에 대해서 루즈벨트와 처칠이 스탈린과 긴밀하게 논의할 것을 권고했다.
1945년 3월 시라드와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핵개발의 위험성을 밝히고 중단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과학고문이었던 부시(Vannevar Bush)와 코넌트(James Conant)도 보어와 같은 의견이었고, 스팀슨(Henry I. Stimson) 전쟁장관(Ministry of War)은 실제로 소연방과의 협상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 잠정위원회는 최초의 핵공격을 준비하면서 그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상륙부대의 보조전술, 관측을 위한 실증, 군사목표에 대한 실증을 통해서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검증하는 방안과 사전경고 없는 군사목표 공격, 사전경고 후에 도시 공격, 사전 경고 없는 도시공격을 통해서 전쟁종식에 활용하는 방안을 놓고 심의하였다. 최종 결론은 사전 경고 없이 도시를 공격하는 방안이었다.
1945년 6월 원자력 잠정위원회는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즉시 사전경고 없이 표적위원회에서 검토한 투하 예정지에 사용한다고 결정하였다. 7월 두 차례 원자폭탄 폭발실험에 성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투하 명령이 하달되었다. 1차 공격(작전명 에놀라 게이)에서는 전략폭격기 B-29가 원폭 1호(리틀 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고, 2차 공격(작전명 벅스카)에서는 원폭 2호(팻 보이)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서 항의한 기독교계 인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원폭 사용은 자신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전쟁포로 살해가 더 괴로운 일이었다고 술회하였고, 퇴임 후에는 “원폭 2발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25만명의 미국 젊은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정당화했다.
1945년 8월 9일 중국 공산당계 일간지 ‘신화일보’는 시평에서 원자폭탄이 평화유지의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한 순간에 수많은 어린이, 남편, 아버지를 살상한다고 비판했다. 1946년 미 국방성은 일본에 대한 전략적 폭격의 효과를 분석하면서 원폭 공격이나 소연방의 참전 및 미군의 상륙작전이 없더라도 일본은 1945년을 넘기지 못했을 것으로 평가하였다. 핵무기 선점에 성공한 미국은 ‘핵 사다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해외정보 책임자였던 퍼먼(Robert R. Furman)은 ‘알소스 작전’(Alsos Mission)을 지휘해서 유럽에 산재한 우라늄을 영국으로 반출시키고 독일의 핵물리학자들을 체포해서 소연방과 격리시켰다. 전후에 미국이 UN에서 원자력통제를 위한 국제기구 설치를 제안하자, 소연방은 이를 영속적으로 핵독점의 우위를 지키려는 책략으로 간주하였다.
수소폭탄 ‘새우’의 종말론적 황홀경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은 태평양 마셜제도에 속한 비키니 환초(Bikini Atoll)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체결 이후 8개월만에 시작된 캐슬작전(Operation Castle)은 다양한 형태와 성능을 가진 수소폭탄을 실험하는 것이었다.
1954년 3월 1일 ‘새우(Shrimp)’라는 명칭을 붙인 수소폭탄을 실험하는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 작전에서 관측된 수소폭탄의 거대한 폭발은 ‘악마는 거대한 황홀경을 연출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초현실적인 장엄을 드러냈다.
새우는 엄청난 폭발력을 드러내며 빛을 연구하고 형상화했던 인상주의 화가들도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색조를 표출했다. 거대한 불덩이(fireball)와 버섯구름이 다양하게 응축하면서 네 차례 반지(ring) 모양, 세 차례 모자(ice caps) 모양, 두 차례 치마(skirts) 모양, 세 차례 종(bell) 모양이 나타났다. 구름 위 대기권에서 특수촬영된 상단부의 모습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스스로 절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황홀한 색채로 웅변했다.
미국은 히로시마에 투하한 최초의 핵폭탄을 ‘꼬마(Little Boy)’라고 부르고, 최초의 초대형 수소폭탄을 새우라고 불렀다. 새우는 폭발하면서 15 메가톤(TNT 기준)이라는 사상최고의 핵출력을 분출했다.
1954년 3월~4월에 캐슬 로미오(폭탄명 Runt), 캐슬 유니온(폭탄명 Alarm Clock), 캐슬 쿤(폭탄명 Morgenstern) 작전이 연쇄적으로 진행되었다, 캐슬 브라보의 후속작전이었던 캐슬 양키(폭탄명 Jughead)는 취소되었다가 폭탄(Runt-Ⅱ)을 바꿔서 재개했는데, 핵출력이 13.5 메가톤에 달했다. 캐슬 쿤의 후속으로 추진된 캐슬 에코(폭탄명 Ramrod)는 취소되었고, 캐슬 넥타(폭탄명 Zombie)를 마지막으로 태평양 중심부에 엄청난 방사능오염을 초래한 캐슬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후발주자인 영국은 1952년 오스트레일리아 몬터벨로섬에서 원폭 실험을 한데 이어 1957년 5월 태평양 크리스마스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고, 소연방은 1953년 8월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1960년 2월 사하라사막에서 원폭 실험을 시작했고, 태평양 도서지역에서 200회에 달하는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중국은 1964년 10월 신장의 롭노르(Lop Nor)에서 원폭 실험을 하였고 3년 후에 수소폭탄 폭발실험을 하였다.
쿠바위기 당시에 미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는 38년이 지난 후에 쿠바위기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미국이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술회하였다.
최초의 핵공격이 남긴 의문과 한반도에 미친 영향
츠요시 하세가와(Tsuyoshi Hasegawa)는 일왕과 군부가 미국의 전략적 이해를 간과하고 항복시점을 놓쳐 핵공격을 자초했다고 보았다
츠요시에 따르면 일본의 천황제에 위협적인 소연방의 참전이 미국의 핵공격보다 일본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 지도부가 항복을 미루었던 것이 원폭투하와 소연방의 참전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대일전선에서 연합군은 대형편대의 폭격과 파상적인 상륙전 및 백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팀슨 미 육군장관은 처칠에게 “5백만 병력과 5천대 특공기를 보유한 대군을 격멸하는 것은 쉽지 않다.
1945년 11월 1일에 큐슈 남부에 상륙하고 1946년 봄에 혼슈에 상륙하는 작전에 5백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고, 작전수행에서 1백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처칠은 트루먼 미 대통령이 포츠담회담의 폐막일(1945.7.24)에 스탈린 서기장에게 원폭개발을 통보했지만 무표정하게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했다.
몰로토프 소연방 외무장관은 히로시마 원폭투하(1945.8.6) 직후인 8월 8일 오후 8시에 미국과의 항복협상 중개를 요청하는 사또 일본대사의 면전에서 대일선전 포고문을 낭독하고, 그날 밤에 소연방군은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의 항복에는 원폭 공격과 소연방의 참전이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러일전쟁에서 북방도서(쿠릴열도)를 획득한 일본은 소연방의 열도 상륙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았다. 영토의 분할은 물론이고 소연방의 이념은 천황체제를 절멸시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태평양전쟁에서 본토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하와이 기습)을 목격한 미국은 일본열도를 태평양 서안(西岸)의 방파제로 삼아 태평양을 내해(內海)로 만들어야 할 안보적 필요성이 커졌다. 원폭 투하는 소연방의 참전을 의식한 결과라는 측면과 함께 소연방의 참전을 앞당긴 측면도 있다.
처칠은 원폭 투하로 연합국이 소연방을 대일전에 참전하도록 간청할 필요성이 감소했고, 유럽문제에 대한 대소 협상력 강화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관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미국의 핵 공격이 지상전의 장기화로 인한 인적 피해에 대한 우려보다 소연방의 진공을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자상에서 유일한 핵 피폭국가로서 일본은 ‘비핵 3원칙’(핵무기의 제조·보유·반입의 금지)을 천명해 왔지만, 중국과 북한의 핵무장에 따라 미국의 핵우산을 요구하면서 반입 및 이동을 허용하고 있다.
일본 제국은 태평양전쟁(1941~1945)을 시작하면서 핵개발을 시도했다. 1941년 일본 육군은 훗날 ‘일본 물리학의 아버지’로 추앙되고 있는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도쿄대 물리학 교수에게 이론적 검토를 의뢰했고, 1942년 해군 기술연구소가 주관해서 니시나 교수를 중심으로 ‘2호연구’(작전명)를 시작했다.
니시나는 TNT 10,000톤에 맞먹는 원자폭탄이 가능하다고 보고했고, 도조 히데끼(東條英機) 총리의 지시로 1943년 9월부터 핵무기 개발이 추진되었다. 해군은 1944년 10월에 아라가스 분사꾸(荒勝文策) 교토대 물리학 교수에게도 원자폭탄 개발을 의뢰했고, 아라가스 교수는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를 1945년 8월 하순에 완성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핵무기로 선제공격하고 일본을 점령한 다음에 핵개발 자료를 압수했지만, 최근에 와서야 구체적 사실들이 공개되었다. 독일의 핵개발 첩보를 담당했던 퍼먼(Robert R. Furman)은 2008년 인터뷰에서 일본의 핵개발은 1945년 8월 패망 당시에 초기단계였다고 주장했다.
일본 제국은 1945년 8월 12일 함경남도 흥남에서 수중폭발에 의한 고폭실험(고성능폭탄의 성능실험)을 했는데,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핵실험의 정황으로 의심했다. 패전 당시 일본의 핵개발 수준에 대한 실상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가 소상히 알고 있다.
패전을 당한 일본이 핵개발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일본 총리는 1957년에 평화헌법에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가 국내외에서 반발과 견제를 초래했다.
미 국무부 극동연구팀이 1957년 8월 2일에 작성한 보고서(2013년 공개, Nautilus Institute)는 일본의 기시내각이 핵무기 생산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려다가 실패한 것으로 분석했다.
‘최초의 핵공격’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핵공격은 일본 패망을 가져온 기폭제였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공격으로 폭사한 한국인(조선인)이 4만명~5만명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핵공격이 초래한 결과의 이면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전승국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소연방이 한반도의 북위 38선 이북을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한 측면이 존재한다.
또한 국체호지(國體護持, 천황제 존속)를 항복의 핵심조건으로 삼았던 일본이 소연방의 관여를 거의 배제하고 반(反)공산주의 해양세력이라는 지정학적 이해를 미국과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파리는 1944년 8월에 해방되었고, 그리스가 그해 11월에 해방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는 결과적으로 1~2년이 더 필요했지만 남북이 분할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었다. 원폭 투하가 늦춰지고 한반도의 해방이 미뤄졌으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보다 명시적인 선전포고와 참전과정을 거쳐서 대한민국이 승전국의 지위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 참고 문헌
Gar Alperovitz, Atomic Diplomacy : Hiroshima and Potsdam
David Holloway, Stalin and the Bomb : The Soviet Union and Atomic Energy, 1939-1956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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