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분석관 출신 한국계 연구자가 한국이 소프트 파워에 기초해서 지정학적 부양(Geopolitical Boost)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미 테리(Sue Mi Terry) 윌슨센터 현대자동차-한국재단의 역사·공공정책 부문장(Wilson Center’s Hyundai Motor–Korea Foundation Center for Korean History and Public Policy)은 포린 어페워즈(Foreign Affairs) 기고문에서 오징어게임 등의 글로벌 신드롬에 담겨진 국제정치적 의미를 탐색했다. 한국의 문화산업이 대중문화를 통해서 민주주의 이상을 세계에 전파하는 소프트 파워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테리는 ‘코리안 인베이전(The Korean Invasion)’이라는 제목에 ‘문화수출이 한국의 지정학적 부양을 초래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한국의 문화산업이 역대 정부의 계획적 노력의 산물이란 점과 한국 소프트 파워의 국제정치적 의미를 제기했다.
나이(Joseph S. Nye, Jr.)가 강조한 소프트 파워는 국제정치에서 경제력이나 군사력 등에 기초한 ‘하드 파워’의 강요가 아닌 묵인을 유도하는 매력(allure)을 만들어내는 자산을 의미한다.
소프트 파워의 개념은 전통적 범주의 강대국에 들 수 없는 나라들, 특히 ‘허약한 완충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한국과 같은 나라들을 고무시켰다.
하지만 소프트 파워가 문화, 정치적 가치, 외교정책 등 여러 가지 자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엔터테인먼트의 수출과 같이 순전히 문화적 요인으로만 구성된 소프트 파워는 그 영향력의 한계가 뚜렷하다.
테리가 강조한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주장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김대중 정부 이후 역대 정부의 문화산업 육성
오징어게임과 같은 스타탄생은 소수의 아티스트에 의해서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징어게임 이전에 기생충, 미나리, BTS, 블랙핑크, 강남스타일, 겨울 소나타가 있었다.
한국은 수십년 전부터 한류(Hallyu, Korean wave)와 관련된 문화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해 왔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던 김대중정부는 한류산업지원개발계획을 수립하고 2년 안에 문화산업(음악,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등)의 경제적 가치를 2900억 달러로 끌어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반도체 부문의 목표(2800억 달러)보다 높은 것이었다. 문화산업 예산도 1998년 1400만 달러에서 2001년 8400만 달러로 확대했다.
자동차, 반도체, 조선, 정보화산업의 발달과 발을 맞추어 한국의 대중문화 발전과 문화산업의 대외수출을 위한 민관협력이 김대중정부에 이어서 노무현정부,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 문재인정부로 이어졌다.
노무현정부에서는 일본 중년여성들을 움직인 겨울연가(Winter Sonata)를 비롯한 한류의 매력에 의해서 일본 관광객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문화산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강화했다. (한류의 일본 전파와 일본인 관광객의 증가는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같은 한일관계의 개선으로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명박정부도 문화산업의 수출을 한국의 국가 및 기업의 이미지 제고와 경제성장의 방편으로 우선시했고, 한식(Korean food)의 전파에 관심을 기울였다.
박근혜정부도 문화융성을 제기하고 문화산업 육성을 주요목표로 삼았다. 글로벌 히트의 첫 사례가 된 사이(Psy)의 강남스타일(Gangnam Style)은 조회스 40억회 이상을 기록했고, 막대한 규모의 문화·예술·체육 지원사업들을 정당화했다. (박근혜 정부는 상대적으로 한복의 세계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재인정부도 세제혜택 및 보조금 정책을 강화하면서 문화산업을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는 소프트 파워로 삼고 있다. 신남방정책, 레드벨벳 평양공연(남북정상회담), BTS의 UN 특별사절단 임명 등이 그러하다. BTS의 UN 연설은 전세계에서 100만명 이상이 시청했다.
이러한 국가적 노력의 결과로 1998년에 1억8900만 달러였던 대중문화 수출(게임, 뮤지컬 투어, 코스메틱 포함)이 2019년에 12억3천만 달러로 증가했다. 한국의 문화산업 종사자도 2017년 기준 64만명을 넘어서 전체 산업인력의 3%에 달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과거에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영향을 막기에 급급했던 처지에서 벗어나 글로벌 소프트 파워의 ‘저거너트(juggernaut)’가 되었다.
2. 막대한 경제적 효과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BTS는 연간 경제적 효과가 35억 달러에 달한다. 2017년를 기준으로 연간 관광객의 7%에 달하는 80만명의 BTS 팬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문화의 세계적 전파의 배경에는 한국을 작고 위협적이지 않고 쿨한 나라로 바라보는 국제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의 삼성, LG, 현대·기아 등은 미국에서 무역흑자를 거두고 있지만 1980년대 일본의 도요타, 소니, 혼다, 오늘날 중국 화웨이처럼 반발을 초래하지 않고 미국인들의 일상 속에 자리잡았다.
최근 미국 갤럽에 따르면 미국인이 한국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이 77%로 나타났는데, 2003년 기준 46%에서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전통적 동맹인 호주·프랑스·독일·영국보다 높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군사적 무임승차’라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증진시킴으로써 양국의 지속적인 동맹을 강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정보화시대에서 한국 기업들이 미국의 역동적인 기업들-애플, 알파벳, 아마존-과 경쟁하려면 창의성이 중요하다.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 파워는 경제적·정치적 측면 외에도 인구구성 변화와 맞물려 유교적 전통문화와 산업화시대의 기업모델을 밀어내고 젊은 세대의 발랄한 기풍을 진작하고 새로운 일터를 만들고 있다. 또한 한국경제가 중공업에서 지적 재산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난해한 이행(difficult transition)’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3. 소프트 파워의 역할에 대한 논란
테리는 파급력이 커진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대외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신냉전(New Cold War)에 기초한 논쟁적 주장을 제기했다.
“지난 세월에 미국과 일본 등은 자국의 문화적 특질을 인권의 진화, 경제발전의 촉진, 글로벌 민주주의 지원에 활용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뒤쳐져 있는 개발원조(development assistance)에 대한 증액부터 시작할 수 있다.
사드 배치로 인하여 최대 무역국인 중국의 보복을 당했던 한국은 점증하는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자제하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의 상품과 음악 및 드라마가 금지되고 중국인의 한국방문이 취소되면서 적어도 75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례는 소프트 파워의 힘과 취약성을 나란히 보여주지만, 한국은 빠르게 강해지면서 중국을 상대로 신중하면서도 민주적 가치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중국의 행위를 변화시키는 수준에 도달해야 의미를 갖게 되지만, 조선(North Korea)에서는 좀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과거에 맥도널드, 코카콜라, 레비스트라우스, 허시, 엘비스 프레스리, 비틀즈와 같은 서구 문화의 수출이 소비에트권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냉전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한 것처럼 한국의 소프트 웨어는 조선의 주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매혹적인 과실을 유혹하면서 폭정에 잠재적 도전이 될 것이다.
조선 정부는 한국 문화의 유입을 남풍(Southern wind)으로 경멸하고 하나의 공격무기처럼 경계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몰래 USB를 이용해서 한국의 드라마와 K-pop을 접하고 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도 이러한 장면들이 담겼다.
일부 탈북자들은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한국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조선 당국은 이를 예지한 듯 한국의 패션, 음악, 헤어스타일, 강남스타일로 유명해진 ‘오빠’와 같은 말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해 왔다. 한국은 문화적 매력을 (대북전략에) 활용하는 것보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당국은 풍선을 이용한 전단 및 기타 물품의 대북 살포와 확성기 및 현수막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한국 문화의 대북 유입은 한국형 모델을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서구문화가 베를린 장벽을 허문 것처럼 한반도의 평화적 재통일을 촉진할 수 있다. 또한 비무장지대 양쪽에서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덜 고통스럽게 재통일을 할 수 있다.
나아가서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공감을 얻고 있는 아시아권에서 민주적 가치를 증진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물론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은 양날의 칼이다. 자본주의 문화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본주의체제의 과도한 불평등이 지닌 위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작품들의 이러한 자의식과 비판적 서사는 그 자체로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자유로운 표현의 효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소프트 파워를 대외정책 목표실현에 활용하는 방안을 안출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먼저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무엇을 대표하려는 것인지를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오직 엔터테인먼트 수출을 원하는가, 아니면 문화적 스타 파워를 공고히 하면서 민주주의 이상도 수출하기를 원하는가?” (이상 Sue Mi Terry, The Korean Invasion : Can Cultural Exports Give South Korea a Geopolitical Boost?, Foreign Affairs, 2021.10.14)
미얀마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국제연대 선도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전파는 한국사회가 유교적·식민지적·군사독재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면서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생적인 자유주의 전통을 구축하는 과정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그동안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서 미흡한 점은 테리의 지적대로 정치적 가치와 외교정책이었는데, 최근의 미얀마 쿠데타와 민주시위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정당, 국회, 정부(외교부)까지 나서 군사쿠데타를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를 선도했고, 미얀마 국민들은 한국의 5.18민주항쟁과 자신들의 저항을 동일시하면서 연대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정치적 가치를 강화하는데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전직 대통령 처벌은 이씨조선 봉건왕조체제와 일제식민통치의 잔재에 대한 불철저한 청산과 군사독재의 1인통치체제의 유산에 따른 국가적 수치였지만, 동시에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법치와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홍콩, 대만,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국가에서는 한국의 붉은 악마, 민주화 시위, 대통령 처벌 및 탄핵, 촛불집회 등에 영향을 받은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고, 특히 홍콩과 미얀마의 현장에서는 한국의 사례를 명시적으로 거론하는 경우가 많았다.
테리의 지적처럼 한국은 일본과 같은 경제선진국이면서도 미,중,러처럼 위협적이지 않은 ‘작은 나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기초 위에 자유롭고 자기비판적인 작품들과 창의적이고 독특한 이국적 전통문화가 어우러져 한국의 문화산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하드 파워를 강화하여 무위(armed suasion)를 형성함과 동시에 상응하는 소프트 파워를 겸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견국으로 자리잡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주도자(전략국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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