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항(정치학 박사)
바리쓰 니꼴라이비치 옐찐(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4
1차 체첸전쟁(1994~1996)
1993년 1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여당이자 가이다르가 이끄는 러시아의 선택(Выбор России)이 76석으로 선전했지만, 당명과 노선이 일치하지 않는 극우 민족주의자 블라지미르 쥐리놉스끼(В. В. Жириновский)의 자유민주당(ЛДПР)이 63석, 러시아 농업당(Аграрная Партия) 55석, 겐나지 쥬가노프(Г. А. Зюганов)의 러시아 연방 공산당(КПРФ) 45석 등 민족주의 및 공산계 등 보수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94년 1월 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 가이다르의 사임을 시작으로 연초에 개혁파 다수가 퇴진했다. 가이다르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르 쇼힌이 임명됐는데, 그는 2년 전엔 가이다르 팀의 핵심 구성원이자 가이다르와 마찬가지로 급진 개혁파였지만, 중도 노선으로 돌아선 인물이다. 중도 보수적 인물인 체르나믜르진 총리는 “시장 낭만주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언명하면서 개혁의 진로와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1994년 연말에 옐찐은 인구 120만에 불과한 이슬람 국가인 체첸 공화국을 무력 침공하는데, 이는 1년 전의 벨르이 돔 포격 사건보다도 더 큰 재앙을 유발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버금가는 피해를 초래했다.
러시아 연방의 89개 연방 구성체 중의 하나인 체첸 공화국은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접경한 산악 지역에서 자치공화국을 구성하여 거주하였기 때문에 분리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더욱이 체첸인들은 18~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끈질기게 러시아제국에 저항했던 전설적인 불굴의 민족이었다.
이래서인지 보통의 러시아인들은 체첸인들 하면 과격함과 폭력성을 연상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는 체첸 마피아조직이 존재했다. 필자 역시 러시아 친구들로부터 체첸 마피아가 가장 강력한 조직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평가받는 레프 똘스또이(Л. Н. Толстой)도 체첸과의 잔인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까자크 사람들(Казак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체첸은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백군(Белая Армия; White Army) 진영에서 싸웠고,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스딸린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체첸인들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했다. 이들은 1957년 니끼타 흐루쇼프에 의해 체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과정에 있었던 1991년, 체첸에서는 분리주의 세력이 혁명을 일으켜 기존의 공산주의 지도부를 전복시켰다. 혁명 세력들은 소련군 퇴역 공군 장성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Д. М. Дудаев)를 체첸의 지도자로 선출하고 독립을 선포했으나, 반정부 세력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옐찐은 두다예프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자제하면서, 주로 반정부 세력들을 지원했다.
이후 1994년 8월 10일 수도인 그로즈니에서 개최된 전 체첸 민족대회에서 두다예프는 체첸의 독립을 재차 강조하면서 독립을 위한 러시아와의 성전 결의를 지지했다. 이에 옐찐은 두다예프 정부에 대해 무장해제와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했으나, 두다예프가 거부하자, 러시아 공군의 그로즈니 공습을 신호로 체첸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작전에 돌입했다.
러시아 연방의 국방장관인 빠벨 그라쵸프(Павел Сергеевич Грачёв)는 “공수부대 1개 대대면 두 시간 안에 그로즈니를 장악할 수 있다”라고 떠벌렸다. 이는 마치 6.25 한국전쟁 발발 직전,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라고 허풍을 쳤던 국방장관 신성모를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다. 결국 체첸을 과소평가한 러시아군은 마치 중국이 1979년 베트남을 침공했다가 체면을 구겼듯이, 체첸의 거센 저항을 받아 사실상 패배하게 된다.
러시아군은 정밀유도 미사일을 발사하여 두다예프를 살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1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를 능가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문제는 당나라 군대와도 같은 러시아군의 참담한 전투 수행 능력이었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치욕감을 안겨주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러시아 연방군의 취약성과 무능력을 널리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러시아군은 전투에 있어서는 무능했지만, 잔인성에 있어서는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체첸 진영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이 창궐하게 되었고, 이들은 러시아에 대해 지하드(성전)를 선언하면서, 러시아군에 버금가는 잔학함으로 보복했다.
1996년 8월, 대통령 선거에서 힘겹게 승리한 옐찐의 취임식 하루 전날, 체첸의 저항 세력들은 수도 그로즈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다음 달인 9월 러시아와 체첸은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러시아군의 철수, 체첸에서 자유선거 실시, 그리고 체첸의 지위에 관한 문제 해결을 5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이로써 체첸은 영토를 온전히 유지함과 동시에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다.
1996년 대선
1995년에서 1996년 사이의 겨울, 러시아 정부는 커다란 곤경에 직면했다. 체첸과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악몽을 떠올렸고, 러시아 인민들은 끔찍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고난의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블라지미르 구신스끼(В. А. Гусинский) 소유의 엔떼베(НТВ; NTV) 방송은 매일 밤 체첸전쟁 상황과 옐찐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옐찐은 고질적인 심장병 등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한동안 TV 화면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1996년 1월 그에 대한 지지율은 3%에 불과했다. 조언자들과 측근들 다수, 그리고 옐찐의 고향인 스베르들로프스크의 주민들조차도 대통령 선거 출마를 만류했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옐찐의 권력에의 의지는 강했지만, 다가오는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생존 가능성은 불가능해 보였다.
중환자 옐찐의 첫 번째 시련은 1995년 12월 17일 실시된 러시아 국가 두마(하원) 선거였다. 야당이자 겐나지 쥬가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КПРФ)은 투표 결과 22.30%를 기록하면서 제1당이 되었다. 이어 쥐리놉스끼의 자유민주당(ЛДПР)이 11.18%로 제2당, 그리고 체르나믜르진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여당인 우리집 러시아당(Наш дом-Россия; НДР)은 총 득표율 10.13%로 제3당에 그쳤다. 체첸전쟁으로 옐찐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야당으로 돌아선 가이다르의 러시아의 민주선택(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выбор России; ДВР)은 5% 장벽을 넘지 못해 고작 9석에 만족해야 했다.
선거 결과가 주는 메시지는 옐찐 정부에 대한 또 다른 경고신호였다. 투표자들의 과반수가 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와 개혁 세력에 대한 환멸의 결과가 이 선거에서 드러난 것이다. 불과 몇 년 뒤에 들어서는 뿌찐 체제에 대해 서방 세계는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집권 후 오랜 기간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뿌찐을 보면 이 선거의 의미와 러시아인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옐찐은 그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추바이스 제1부총리를 민영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병든 옐찐을 대신하여 대권을 꿈꾸던 체르나믜르진은 참담한 총선 결과로 자신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러시아의 차기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 공산당 대표인 겐나지 쥬가노프가 가장 유력해 보였다.
추바이스를 비롯한 알리가르히(Олигархи; oligarch)들은 쥬가노프의 강력한 부상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옐찐을 배후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추바이스는 자신과 생각이 같은 여러 명의 사업가를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미디어 재벌이자 은행가인 구신스끼와 기업가인 베레좁스끼(Б. А. Березовский)였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РАН) 소속의 전직 수학자였던 베레좁스끼는 1989년 투자 컨설팅 회사인 ‘로고바즈(ЛогоВАЗ)’를 설립하여 소련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아프토바즈(АвтоВАЗ)’의 투자 및 판매를 대행하면서 떼돈을 벌었다. 이후 그는 석유회사와 아에로플로트(Аэрофлот) 항공사를 비롯하여 은행업과 미디어 분야 등 여러 가지 사업에 문어발처럼 진출함으로써 대표적인 알리가르히로 불리게 된다.
이들 알리가르히들은 옐찐의 선거 캠페인을 운영하는 비밀 캠프 관리자로 추바이스를 선택했다. 참고로 베레좁스끼는 추바이스와 함께 뿌찐을 옐찐에게 추천하여 끄레믈로 불러들이지만, 뿌찐이 집권하자마자 구신스끼와 더불어 숙청 대상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던 베레좁스끼는 다른 많은 알리가르히들과 갈등했을 뿐만 아니라 추바이스와도 갈등을 겪었다.
여하튼 옐찐의 승리를 위해 알리가르히들이 의기투합을 하자마자, 옐찐 정부에 대해 연일 날 선 비판을 하던 러시아 최대 민영방송인 구신스끼의 엔떼베(НТВ; NTV)는 갑자기 비판을 멈추고, 긍정적인 논조로 돌변하였다. 구신스끼 소유의 일간지인 시보드냐(Сегодня)도 노골적으로 옐찐을 지지하고 나섰다. 베레좁스끼 역시 구 국영 TV 방송국인 오에르떼(ОРТ; ORT)의 주요 투자자였다. 결국 1996년 대선은 TV라는 대중매체의 위력이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선거로 기록된다.
이들 외에도 정치홍보기술자들인 이른바 스핀닥터(spin doctor)들이 옐찐 진영에서 활약하게 되는데, 이들은 옐찐을 대안 부재의 유일한 인물로 홍보하면서 강력한 라이벌인 겐나지 쥬가노프를 깎아내리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특히 저명한 언론인이자 1995년에 효율적 정책 재단(Foundation for Effective Policy)을 설립한 글렙 빠블롭스끼(Г. О. Павловский)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는 “의식할 수 있는 사실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미지와 진실은 조작을 통해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빠블롭스끼는 2000년 대선에서도 뿌찐 진영에서 선거 운동을 개발하게 된다.
공식적인 옐찐 진영의 캠페인 동영상은 볼셰비키가 반공주의자들을 처형하는 장면과 교회를 불태우는 장면 등 자극적인 영상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는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옐찐에게 투표하라!”면서 끝을 맺었다. 이들은 이번 대선이 공산주의의 복귀를 막기 위한 투쟁이라고 선언하면서 쥬가노프를 전체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시내의 모습은 옐찐 홍보로 뒤덮여 있었다. 필자도 직접 목격했지만, 레닌스끼 쁘라스뻭트(Ленинский проспект; 레닌대로)를 따라 시내 중심부까지 러시아 국기가 내걸려 있었고, 옐찐과 유리 루쉬꼬프(Ю. М. Лужков) 모스크바 시장의 악수 장면이 광고판에서 빛나고 있었다.
1996년 6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옐찐은 35.28%로 1위, 겐나지 쥬가노프는 32.03%로 2위, 알렉산드르 레비지(А. И. Лебедь)는 14.52%로 3위를 기록했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최다 득표자 두 명을 대상으로 7월 3일 결선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승리를 굳히기 위해 레비지를 포섭한 옐찐은 53.83%로 40.30%를 획득한 쥬가노프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스끄비치(Москвич; 모스크바 시민)의 대다수는 옐찐에게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들은 90%에 가까운 지지로 루쉬꼬프를 모스크바 시장으로 재선출했다.
추바이스를 비롯한 옐찐 캠프의 선거전략가들은 레비지가 쥬가노프와 쥐리놉스끼의 표를 잠식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막대한 자금을 들인 그들의 도박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옐찐을 지원했던 알리가르히들이 레비지 캠프에도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 언론은 옐찐의 당선에 대해 공산당의 복귀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이 마지못해 옐찐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레비지의 합류, 러시아 언론의 공공연한 옐찐 지지 선동, 일부 지역의 관권 개입 등이 주된 승리의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1996년 가을 옐찐은 몇 개월 동안 심장 수술 등 병마에 시달리느라 선거 이후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선 승리의 공을 인정받아 추바이스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옐찐의 부재로 체르나믜르진 총리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옐찐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레비지는 영입 4개월 만에 해임되었다. 죄목은 대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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