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항(정치학 박사)
바리쓰 니꼴라이비치 옐찐(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3
노멘끌라뚜라 자본주의
충격요법에 따른 경제 자유화 정책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심각한 도덕적 파괴를 초래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급증했고, 남성의 기대수명은 57세로 하락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충격요법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의 지적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 공산당 관료들이나, 까게베 출신들, 정부 관료들이나 국영기업에 연줄을 가진 사람들처럼 정치적 자원(political resources)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앞서 나갈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사유화 또는 민영화란 국영 자산의 재분배였다. 연줄에 의해 국영 자산을 헐값에 인수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떼부자가 됐다. 결국 민주·개혁파로 옷을 갈아입은 과거의 특권계층인 노멘끌라뚜라와 범죄 마피아 조직이 사유화의 거대한 열매를 챙긴 것이다.
옐찐의 급진 개혁은 러시아 인민의 사회 계층 구조도 변화시켰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보기 힘들었던 실업자가 급등하였고, 빈곤층이 창궐했다. 1994년 1월 1일 기준, 인구 대비 상류층 3~5%, 중산층 13~15%, 빈민층 40%, 극빈층 40%로 나타났다. 그러나 옐찐 집권 말기인 1990년대 후반에는 상류층 3%, 중산층 7%, 빈민층 25%, 극빈층 65%로 절대 빈곤층의 비율이 극대화되었다.
공군 장성 출신의 러시아 연방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쯔꼬이는 옐찐의 경제개혁을 ‘경제적 대학살’이라고 비난했으며, 가이다르 경제팀을 ‘핑크빛 팬티를 입은 애송이들’이라고 불렀다. 역설적이지만, 옐찐의 준비되지 않은, 깜짝쇼 같은 성급한 급진 개혁 실험이 낳은 왜곡된 시장 관계는 러시아인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면역력을 키워주기도 했다. 이른바 러시아판 자연인의 등장인데, 어로, 수렵, 채집 등 자연경제로의 회귀와 더불어 다촤 주변의 텃밭을 일구면서 각종 필요한 채소류를 자급자족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주도한 충격요법에 충격을 받은 옐찐은 결국 급진적 경제개혁 개시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옐찐의 트레이드 마크인 오락가락 갈지자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두 얼굴의 옐찐
1985년 고르바초프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옐찐은 특권계층인 노멘끌라뚜라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마스끄비취(Москвич; 모스크바 시민)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노멘끌라뚜라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거 살아남아 러시아 연방 의회, 정부, 기업체 등의 요소요소에 포진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까게베의 경우 별다른 제재도 받지 않았고, 인적 청산도 없이 연방보안국(ФСБ; FSB)으로 이름만 바뀐 채 그대로 존속되었다.
옐찐은 낮에는 가이다르, 추바이스, 쇼힌 등 자신이 발탁한, 개혁적이라는 젊은 친서구 세력들과 러시아의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밤에는 주로 국영기업의 관리자, 구 까게베 출신 간부들, 구 공산당 고위 당료들과 사우나를 즐기며 술판을 벌였다. 이들은 이른바 옐찐이 타도하고자 했던 보수 반동 세력들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몇몇은 낮에는 의회에서 개혁 세력들과 싸우고, 밤에는 개혁 세력의 두목인 옐찐과 술잔을 기울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개혁 세력들은 이들 그룹에 접근할 수가 없었고, 음주 습관도 이들과는 달랐다.
아울러 ‘러시아판 뉘른베르크’로 불리는 공산당 재판 역시 옐찐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생생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옐찐이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이에 소련공산당이 범죄집단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옐찐의 법률팀은 총 36권 분량의 자료를 발간했다. 러시아 연방 헌법재판소의 사건에 대한 심리 역시 1992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TV로 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건은 용두사미로 끝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소련 역사에 대해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발을 뺐다. 다만 헌재는 소련공산당의 폐지를 승인함과 동시에 러시아 연방 내에 공산당 창당을 허용하는 아주 해괴한 판결을 내렸다.
옐찐은 대통령 포고문에서 소련공산당의 범죄와 관련하여, 공산주의자 개개인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추해 보건대, 1976년~1985년 사이에 스베르들로프스크 주 제1서기를 역임했던 옐찐 역시 공산주의자였고,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이 제법 많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주 요란했던 옐찐의 러시아판 적폐 청산은 싱겁게 끝났고, 러시아 연방 정부 요소요소에 전직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자리 잡게 되었다. 노멘끌라뚜라에 대해 유독 게거품을 물며 비난했던 옐찐이 구 노멘끌라뚜라를 대거 정부의 요직에 앉힌 것이다.
충격요법의 후퇴
옐찐은 충격요법을 개시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992년 5월 말, 세 명의 산업주의자들을 부총리로 임명함으로써 사실상 정부를 연립내각으로 재편했다. 본인이 애지중지하던 가이다르 팀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영입된 부총리 중 눈에 띄는 인물은 세계 최대이자 러시아 연방 최대의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쁘롬(Газпром) 의장을 역임한 빅또르 체르나믜르진(В. С. Черномырдин)인데, 그의 입각은 충격요법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또 다른 변화는 러시아 중앙은행장의 교체였는데, 가격자유화로 물가는 폭등하고, 긴축재정으로 돈의 씨가 마르자, 정부는 화폐 공급에 대한 압박을 모든 경제 주체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가이다르 경제팀과 보조를 맞춘 중앙은행장인 게오르기 마튜힌(Г. Г. Матюхин)은 1991년 8월 보수세력의 거두인 하즈불라또프가 임명한 인물이었다. 이에 가이다르 등 개혁파는 마튜힌의 정치적 성향을 의심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마튜힌은 개혁파의 행보를 걸었다. 그는 엄격한 통화정책을 고수하면서 옐찐의 경제개혁에 코드를 맞추며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했지만, 교체대상이 된 것이다.
신임 중앙은행장엔 구 소비에트 연방 중앙은행장 출신이자 보수적인 성향의 빅또르 게라쉔까(В. В. Геращенко)가 임명되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가이다르가 게라쉔까의 임명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게라쉔까는 국가가 경제에 대해 규제를 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에트형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물가 폭등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기업이나 개인을 방치하는 것은 범죄라고 여겼다.
게라쉔까는 통화의 발행이 러시아의 공업과 농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지불 부족 사태와 자금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를 찍어냈고, 결과적으로 1992년 내내 러시아는 대책이 거의 없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다. 서구의 언론과 러시아의 친개혁적인 언론은 게라쉔까를 개혁의 파괴자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충격요법의 주요 설계자인 제프리 삭스는 게라쉔까를 가리켜 세계 최악의 중앙은행장이라고 비난했다.
충격요법 개시 1년만인 1992년 말,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은 10~15배 인상되었던 반면에 가격은 100~150배 폭등하였다. 러시아에는 정치적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옐찐을 지지했지만,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가치 없는 급여조차도 체불된 광부, 석유 노동자, 의사 등은 옐찐 정부에 대해 대규모 파업을 예고했다. 나아가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은 서로 연합하여 옐찐 정부에 본격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993년 10월 사태
1992년 12월, 충격요법 1년 만에 가이다르는 축출되었다. 의회의 수장인 하즈불라또프는 가이다르의 사퇴와 함께 러시아의 헌법과 통치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옐찐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1993년도에 들어서자 의회와 정부는 헌법 개정과 국민투표 문제로 갈등이 더욱 치열해졌다. 3월에 들어서 대의원(의원)들은 옐찐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비상대권인 대통령령을 정지시킬 권한을 의회에 부여했고, 봄에 예정된 국민투표도 거부할 뜻을 비쳤다. 이에 격분한 옐찐은 TV로 중계된 연설에서 자신이 1993년 4월 25일 실시될 국민투표일까지 비상대권을 쥐고 있다고 강조했다.
의회는 마치 벌집을 쑤신 듯했다. 비상대책회의를 열기 위해 인민대의원대회가 또다시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옐찐에 대한 탄핵안이 주요 의제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옐찐은 정치적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탄핵안이 부결된 것이다. 나아가 4월 25일의 국민투표는 옐찐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다. 옐찐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경제개혁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유권자의 과반수가 지지한 것이다.
1993년 여름 내내 의회와 정부는 갈등을 빚었다. 의회는 GDP의 25%에 달하는 적자가 불가피한 통화팽창적인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중앙은행장인 게라쉔까는 옐찐이 휴가 중이었던 7월 24일, 1993년 이전에 발행한 루블화는 통화로써 사용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하기 위해 북새통을 이뤘으며, 여기저기서 혼란과 항의 사태가 벌어졌다. 필자 역시 기한 내에 구권을 빨리 써버리기 위해 술과 담배 등 각종 물품 등을 사들였던 기억이 난다.
1993년 9월에 들어서 옐찐은 반대자로 변한 부통령 루쯔꼬이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가이다르를 임명했으나 의회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러자 옐찐은 9월 16일 가이다르를 경제담당 부총리로 재차 임명했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다시 개혁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의회의 대의원들은 대통령 탄핵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법안을 채택하기 위해 움직였고, 이를 눈치챈 옐찐은 9월 25일 TV 화면에 다시 나타나 전격적으로 의회 해산을 선언하면서, 12월에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의회 해산은 헌법상 옐찐의 권한 밖이었기 때문에 불법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의회의 반발은 격렬했다. 분노한 대의원들은 표결을 통해 옐찐을 탄핵하고, 부통령인 루쯔꼬이를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이들은 최고 소비에트(의회) 건물인 벨르이 돔(현 러시아 연방 청사)에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정부는 벨르이 돔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전기와 전화선을 끊고, 온수 공급도 차단했다. 벨르이 돔 안팎에는 옐찐의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몰려들었고, 소총으로 무장한 의회 지지 세력들도 포진해 있었다. 루쯔꼬이는 군 출신답게 깔라쉬니꼬프(Калашников) 기관단총을 흔들면서, 벨르이 돔 바깥에 운집한 흥분한 군중에게 무장 투쟁을 촉구했다.
1993년 10월 4일 오전, 벨르이 돔 부근에 나타난 여러 대의 탱크 중 한 대가 벨르이 돔 건물 중심에 포격을 가했다. 불과 2년 전 옐찐이 탱크 위에서 쿠데타군에 저항했던 바로 그 건물이었다. 약 150여 명이 사망했고,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하즈불라토프와 루쯔꼬이 등 무장 투쟁을 지시한 자들은 체포되었다.
1993년 10월의 유혈사태는 겨우 움트고 있던 러시아의 민주주의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옐찐은 평소에 “러시아는 흔히 탱크와 병력을 동원하여 과잉 살상을 자행한다”라고 비난하곤 했는데, 그 자신이 의회를 굴복시키기 위해 탱크를 동원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1993년 12월 12일에 총선과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예상한 대로 헌법 개정안은 가결되었고, 옐찐은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각에서 개표 부정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유혈사태의 여파 때문인지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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