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러시아연방

러시아 연방(РФ) : 거대한 모순덩어리

twinkoreas studycamp 2021. 8. 16. 16:29

 

 

김태항(정치학 박사)

 

 

바리쓰 니꼴라이비치 옐찐(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1

 

 

개요

 

전환기의 충격요법은 대중의 인내력을 시험하기 마련이다. (pikabu.ru)

 

1991년 12월 25일 저녁, 고르바초프의 사임 연설이 끝나자마자 끄레믈 궁전에서 휘날리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의 붉은 깃발이 내려지고, 얼마 뒤 흰색, 적색, 청색으로 구성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의 국기가 게양되었다. 역사의 보복인가? 아니면 역사의 진보인가? 제정 러시아를 타도하고 등장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국기조차 제정 러시아 시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의 원흉이 고르바초프라고 지적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실질적 주범은 옐찐이었다. 대중영합적인 급진 개혁세력의 선봉이자, 독불장군 성향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탐독한 듯, 집요한 권력의지의 소유자인 옐찐은 러시아공화국의 소비에트연방 탈퇴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영토와 자원, 인구 등 소비에트 연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러시아공화국의 연방 탈퇴는, 곧 연방의 해체와 다름이 없었다.

 

물론 고르바초프의 우유부단이 사태를 키운 측면이 있지만, 오랜 기간 기득권의 달콤함에 중독된, 참을성이 없는 보수 세력들의 어설픈 쿠데타가 역설적으로 옐찐의 인기와 권위를 높여주었다. 단적으로 옐찐을 체포하지 않고, 고르바초프만을 감금한 상태에서 쿠데타의 성공을 기대한 자체가 나이브(naive)한 행동이었다.

 

이후 옐찐의 급진적인 개혁 추진은 급진적으로 실패하게 되는데, ‘충격요법(шоковая терапия)’으로 명명되는 급진적인 자본주의 경제 프로그램은 사실상 1년 만에 ‘충격적’으로 실패하면서, 러시아 인민들에게 ‘충격’만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옐찐 스스로가 보수 세력의 쿠데타 당시 탱크 위에서 열정적으로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건만,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에 같은 장소에서 보수적 의회의 저항에 직면하자, 탱크를 동원하여 실탄 사격까지 하면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이른바 ‘짜리’적 독재자의 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후 국면 전환을 위해, 의회와 군 지도자들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체첸과의 전쟁에 돌입하지만, 민·군이 똘똘 뭉친 체첸의 거센 저항에 속된 말로 당나라 군대와도 같은 러시아군의 후진성과 미숙함만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러시아 연방의 급격한 국격 하락과 함께 알코올 중독자인 옐찐의 알코올 의존도만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경제개혁의 실패, 반민주적 정치행태의 등장, 러시아 연방의 1/100도 안 되는 인구를 보유한 변방의 소 공화국 체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옐찐은 과도한 음주를 일삼으며, ‘씨미야(семья; 가족)’ 라고 명명된 소수의 참모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참고로 ‘씨미야’ 세력의 핵심은 알리가르히(Олигархи; oligarch)로 불리는, 국영 자산을 헐값에 불하받은 부유한 사업가와 미디어 소유주들을 말하는데, 옐찐은 이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마음의 빚이 많았다.

 

더욱이 옐찐은 1996년 심장 수술을 받은 후 신체적·정신적으로 나약해졌고, 1998년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moratorium) 선언으로 러시아 연방의 인민들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과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옐찐 재임 말기인 1998년 이후 1년 6개월 동안 무려 네 명의 총리가 바뀐 것만 봐도 총체적 카오스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옐찐 부부와 뿌찐

 

결국 1999년 8월 총리로 임명된 블라지미르 뿌찐(В. В. Путин)이 사실상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게 된다. 그리고 20세기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8년 전에 고르바초프가 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옐찐은 TV 화면에서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면서, 즉각 뿌찐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 옐찐은 본인의 안위를 비롯한 가족들의 면책특권 보장을 요구했고, 이에 뿌찐은 면책특권과 더불어 옐찐에게 후한 연금도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거대한 모순덩어리

 

옐찐은 1931년 소비에트 연방의 우랄산맥 중부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 주(Свердловская область) 딸리쯔키(Талицкий) 지역의 부뜨카(Бутка)라는 농촌 마을에서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곳은 옐찐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었다.

 

참고로 스베르들로프스크의 원래 이름은 예까쩨린부르크로 1723년 뾰뜨르 대제(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피터 대제)의 부인인 예까쩨리나(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황후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지명이었다. 이후 1919년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꼴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는데, 이들을 처형한 볼셰비키 지도자인 야꼬프 스베르들로프(Я. М. Свердлов)를 기리기 위해 1924년 스베르들로프스크로 변경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도시 이름은 다시 예까쩨린부르크로 환원됐지만, 주의 지명은 그대로 스베르들로프스크로 남게 되었다.

 

옐찐의 가족은 워낙 가난한 집안이라 추운 겨울에는 온 식구가 양 한 마리를 껴안고 추위를 버텨냈다고 한다. 나이 6세 때인 1937년 어느 날 옐친은 자신의 부친이 반(反) 볼셰비키 혐의로 한밤중에 연행된 이후부터 집안의 가사를 돌봐야 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이 일로 인해 스딸린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옐찐의 공산당 가입도 고르바초프보다 10년 정도 늦었다. 그리고 그가 공산당에 입당한 이유는 정치적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직업인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옐찐은 평소의 일그러진 인상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기질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아 격하다고 고백했는데, 이로 인해 부친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일한 교육 기구는 가죽 벨트였다면서, 수시로 얻어맞은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1955년 우랄 공대를 졸업한 옐찐은 주로 건설현장에서 일했고, 1961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다. 이후 당 간부로서 1969년에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의 모든 건축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에 임명되지만,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이는 1985년 고르바초프가 옐찐에게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건설담당 부장 자리를 제안했을 때, 즉각 거절한 이유와도 같다. 즉 자리가 본인의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옐찐에 대해 찬사에 가까운 책을 출간한 존 모리슨(John Morrison)조차 옐찐이 출세욕이 강하고, 항상 최고의 자리만을 고집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리 제안에 대한 거절은 이러한 그의 성향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75년 옐찐은 한 단계 승진하여 지역당 서기가 되었고, 이듬해인 1976년에 드디어 스베르들로프스크주 제1서기에 등극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브레쥐네프가 끄레믈의 집무실로 옐찐을 불러, 전임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입성한 야꼬프 리야보프(Я. П. Рябов)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입당 15년 만에 지역당 제1서기가 된 것은 상당히 빠른 승진이었다. 더욱이 승진 관례상 제2서기가 올라가는 게 정상인데, 일반 서기인 옐찐이 제1서기로 발탁된 것이다. 이후 고르바초프와 리가초프의 천거로 옐찐은 1985년부터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게 되며 주요 인물로 급부상하게 된다.

 

포스트 소비에트를 둘러싼 강온세력의 분열

 

일반적으로 모든 권력투쟁의 실상이 그렇지만, 소련 정치의 특성은 유독 배신과 더불어 정글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소련이라는 집을 새롭게 건축한 레닌이 말년에 병약해지자, 레닌에 의해 서기장으로 지명된 스딸린은 혁명 동지이자 레닌의 부인이자 대리인 역할을 하던 나제쥐다 끄룹스카야(Н. К. Крупская)를 하대하는 등 안하무인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1세대 볼셰비키들인 초기 혁명가들의 씨를 철저하게 말린다.

 

스딸린 사망 후 권력을 장악한 흐루쇼프 역시 자신의 심복인 브레쥐네프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게 된다. 중환자들이었던 브레쥐네프, 안드로뽀프, 체르녠까에 이르는 20년 동안 소련도 중환자가 되어갔다. 이어 등장한 젊은 고르바초프 역시 자신이 출세를 시켜준 옐찐에 의해 배신을 당하는데, 이전의 사례와는 좀 다른 면이 있다.

 

흐루쇼프를 제거한 브레쥐네프의 경우 노선상의 차이 때문에 궁정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고르바초프와 옐찐은 사실상 같은 노선을 걷던 동지였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고르바초프의 경우 연방을 깨지 않기 위해 점진적 개혁 노선을 추구했던 것이고, 옐찐은 연방을 깨면서까지 본인의 별명처럼 불도저 같은 급진개혁 노선을 밀어붙인 것이다.

 

둘 다 개혁을 추진했는데, 좀 더 빠른 개혁을 위해 자신을 발탁해준 정치적 은인을 제거하고, 연방의 붕괴까지 도모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배신이자 패악이 아닐 수 없다. 옐찐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서구식 자본주의로 국가의 근간을 판갈이 했지만, 결과는 대규모 자산유출과 함께 총체적 경제위기만 초래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적 권력정치에는 능했지만, 서구 특히 미국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믿음으로 똘똘 뭉친 세력들과 더불어, 역시 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한 알코올 중독자 옐찐은 불과 1년 만에 사실상 러시아 경제를 화끈하게 말아먹게 된다.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급진개혁 노선을 버리고, 중도와 보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8년 가까이 국가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다가 결국엔 자신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타도 대상이자 자신이 경멸했던 반개혁, 보수세력의 원조인 까게베에서 잔뼈가 굵은 뿌찐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러시아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체제인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한, 민주화 세력의 핵심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타도한 구체제를 견고하게 떠받쳤던 보수 강경 세력의 핵심 조직인 까게베의 수장에게 자신의 안전을 의탁하는, 아주 해괴하면서도 소위 가오(顔)가 떨어지는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postila.ru)

 

모스크바 카네기센터의 릴리아 셰프쪼바(Л. Ф. Шевцова) 박사는 옐찐의 8년 행적을 ‘거대한 모순덩어리’라고 분석하였다. 민주화를 지향하면서, 실질적인 권력행사는 비민주적이었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자신이 경멸했던 소수의 노멘끌라뚜라 출신에게만 특권을 부여하는 등 폐쇄적인 사이비 시장경제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좀 야박한 평가 같지만, 옐찐은 러시아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공간을 통치할 철학은 고사하고, 능력조차 부족한 인물이었다. 막대한 자원을 통제하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국가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 국제무대에서의 영향력 또한 초라할 정도로 퇴락하였다. 유럽 지역에서는 나토가 동진해 들어오고 있고, 아·태 지역에서는 한반도 문제 관련, 미국 주도의 ‘4자 회담’에서 소외되는 등 수세적인 입장에 몰리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옐찐 본인이 추구했던 이념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보수적인 뿌찐에 의해 러시아 연방은 예전의 무게감을 되찾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국제무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옐찐 집권기에 비록 국가는 총체적으로 망가지고, 인민들은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나마 인생의 말년을 뿌찐에게 의탁한 옐찐은 2007년 사망할 때까지 편안한 은퇴생활을 누리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