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항(정치학 박사)
바리쓰 니꼴라이비치 옐찐(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5
알리가르히(Олигархи; oligarchs)란 누구인가?
1996년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던 옐찐은 알리가르히들의 도움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냉혹한 현실주의 정치판에서 옐찐 당선의 일등 공신들인 알리가르히들에게 반대급부 지급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탐욕적이며 기회주의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알리가르히들이 마치 똥개들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듯이, 커다란 먹이(이권)를 두고 첨예한 대립을 하다가 1998년 8월 터지게 되는 러시아의 금융위기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알리가르히란 용어는 보통 과두재벌로 번역되지만, 소련 붕괴 이후 급속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법률과 절차에 무지하거나 무능한 구 국영기업 관료들보다 발 빠른 상황인식과 정경유착을 통해 부와 권력을 얻게 된 소수의 인물을 의미한다.
물론 옐찐의 급격한 사유화 정책에 의해 알리가르히들이 급부상했지만, 이들은 이미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전부터 부를 거머쥐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에는 석유, 가스, 석탄, 금속 등 주요 자원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통제가 사실상 붕괴함에 따라 소련공산당, 까게베, 정부 기관 등에서 핵심 보직을 맡았던 일부 관리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과 정보를 활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은행업에 손을 대면서 러시아 경제를 주물럭거렸지만, 사꾸라(桜)가 일시에 만개했다가, 확 지듯이 1998년 8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으로 인해 대거 몰락하게 된다.
1996년 10월 옐찐은 자신을 도운 알리가르히의 대표격인 베레좁스끼를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베레좁스끼는 옐찐의 심복이었다가 해임된 추바이스에게 재빠르게 접근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도록 설득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이후 옐찐 패밀리, 즉 씨미야(Семья; 가족)의 핵심 멤버가 된다.
베레좁스끼는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7명의 은행가이자 기업가가 러시아 경제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이 러시아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해 지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분히 거만한 태도의 인터뷰는 상당한 논란을 유발했는데, 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7인의 신 정치국 위원들이라고 조롱했다.
옐찐 집권기에 알리가르히들이 거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옐찐 정부가 알리가르히들에게 헐값에 국유자산을 넘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주의자도 개혁가들도 아니었다. 이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자비한 탐욕가들이자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더구나 그 시대는 사실상 무법이 판치는 무정부 상황이었다. 그들은 대통령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알리가르히에 관한 책을 썼던 야꼬프 빠뻬(Я. Ш. Паппэ)는 알리가르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러시아의 기업가들이나 개인 사업자들의 연합은 편협하고, 기회주의적이며, 단기적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목적에 따라 협력했다. 동시에 다른 이슈에 대해서는 서로 다투었다. 이들의 연합이 지속됐던 기간은 1996년 대선 전 몇 개월과 대선 후 3~4개월이 전부였다.”
러시아의 금융위기
충격요법에 따른 가격자유화와 사유화 이후 러시아의 많은 기업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급여가 밀리거나, 세금도 체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기업은 생존을 위해 물물교환(barter) 형태로 다른 기업과 거래를 지속했다. 문제는 물물교환이 비현실적인 가치의 경제인 가상경제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거대한 바터 거래의 네트워크가 존립 불가능한 비생산적인 기업이 생산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부실기업이 B라는 석유회사로부터 대량의 기름을 공급받은 후 대금 대신에 건물을 지어주기로 약속하는 경우, 정확히 언제 건물을 지어줄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1997년 말, 러시아에서 기업 간 거래의 약 50%가 현금이 아닌 바터 거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불 방식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었는데, 옐찐 정부가 조장한 측면이 컸다. 가스쁘롬 등 거대 기업에 대해 정부가 화폐가 아닌 재화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는 기업인들과 정부 관료들 사이의 교섭으로 이루어지므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을 갖고 있었다. 결국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정부가 지연시키면서 가상경제를 더욱 큰 규모로 키운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적자와 세수 감소에 시달리는 정부가 현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유자산을 헐값에 매각하고, 엄청나게 높은 이자율의 국채를 발행한 것이다.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재무부가 발행한 6개월짜리 국채는 연리 200%가 넘는 과도한 이자로 매매되었다.
고이율의 단기 국채가 발행된 이유는 불안정한 정치환경과 지불정지에 대한 투자자들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단기 차액을 노린 외국인들의 간접 투자는 1996년 89억 달러에서 1997년 456억 달러, 즉 GDP의 10%에 달하는 자금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목도한 투자자들은 1998년에 들어 러시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부터 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주요 수출 품목인 원유의 가격 하락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화 조달에 또 다른 고통을 유발했고, 아시아를 뒤흔들었던 금융위기의 영향을 받은 초조한 투자자들은 1998년 5월 말 마침내 대규모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깨진 독에 물 붓는 행위에 불과했다.
러시아의 금융위기는 루블의 평가절하 또는 채무불이행(default) 없이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1998년 8월 17일 러시아 정부는 두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 약 700억 달러의 국내 채무의 불이행을 선언했는데, 즉각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했다. 둘째, 러시아 은행들의 대외 지불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 은행 계좌의 동결을 초래했는데,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은 저축액의 약 70%를 잃었다. 1997년 10월 정점을 찍었던 러시아 주식시장은 1년 만인 1998년 10월에 93% 폭락했다. 이로 인해 알리가르히들이 소유한 은행들도 대거 파산했다.
러시아인들은 국가의 실패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 도입한 시장경제가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러시아인들의 자존감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이자 중환자인 옐찐의 리더십은 한계에 이르렀고, 두마(하원)의 탄핵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쁘리마꼬프 내각
1998년 3월 옐찐은 체르나믜르진 총리를 해임하고, 30대의 젊은 쎄르게이 끼리옌까(С. В. Кириенко) 연료·에너지부 장관을 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러시아 정가에서는 체르나믜르진이 차기 대권 후보로 등장할 것을 우려한 옐찐의 경계심과 알리가르히들의 권력 암투로 경질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옐찐은 8월 러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임명 5개월 만에 끼리옌까를 해임하고, 다시 체르나믜르진을 총리 서리로 복귀시키려는 엽기적인 행태를 취했지만, 국민적 웃음거리와 함께 하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옐찐은 정치권에서 두루 호평을 받던 예브게니 쁘리마꼬프(Е. М. Примаков) 외무장관을 총리로 지명했고, 하원은 다음날 압도적인 지지로 인준을 결정했다. 쁘리마꼬프는 고르바초프 시대의 인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고, 옐찐 정부에서 대외정보국(СВР) 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한 인물로 공산주의자들과 재야 세력들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다.
소련 과학 아카데미(Академия наук СССР) 출신의 쁘리마꼬프는 젊은 시절 까게베 요원으로서 쁘라브다(правда) 신문의 중동 특파원으로 오랜 기간 활동하는 등 아랍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는 외무장관 시절 뛰어난 협상력으로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저항하면서 러시아의 국익과 자존감을 위해 강경한 모습을 표출하기도 했다.
일례로 1999년 3월 23일, 쁘리마꼬프는 첫 미국 순방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가던 중 NATO에 의한 세르비아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기의 기수를 돌려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미적인 행위였는데, 러시아 국내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게 되었다. 쁘리마꼬프의 정치적 퍼포먼스는 땅에 떨어진 러시아 인민들의 자존감을 살려주었고, 되살아난 반미주의와 함께 국가적 자부심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쁘리마꼬프는 한국에 그다지 좋은 기억을 남긴 인물은 아니었다. 지한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지만, 평소 뚱한(sullen) 표정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에게는 강성 이미지로 각인된 인물이다. 그는 친서구주의 성향의 외무장관이었던 안드레이 꼬지레프가 경질되고, 후임으로 1996년 1월부터 외무장관을 역임했는데, 그의 등장 이후 러시아의 대외정책 기조도 바뀌기 시작했다. 친서구 일변도에서 탈피함과 동시에 친남한 중심의 한반도 정책도 변하게 된 것이다.
사건은 1998년 7월 6일 안기부에서 파견한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의 조성우 참사관이 러시아 외교부 아·태 1국 부국장인 발렌찐 모이쎄예프(В. И. Моисеев)에게 돈을 주고 정보를 취득하다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후 추방되면서 벌어졌다. 이에 한국 외교부도 즉각 알례그 아브람킨(Олег Абрамкин) 참사관을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정하여, 맞추방했지만 결과는 외교적 참사이자 수치로 기록되게 된다.
1998년 7월 2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쁘리마꼬프는 한국의 외무장관인 박정수에게 아브람킨이 기피인물이 된 이유를 물었고, 즉각 복귀를 취하지 않으면 다른 의제는 논의조차 할 필요가 없다면서 강경하게 나왔다. 사실 아브람킨의 추방은 기계적인 맞추방 차원이었으므로 한국 정부는 러시아 측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언론과 야당은 굴욕외교라면서 정부를 성토했고, 결국 박정수 장관은 경질되었다. 러시아 외교부도 소란스러웠는데, 러시아의 대표적인 친한파 인사인 모이쎄예프는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1심 징역 12년, 최종심 4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또한 옐찐은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까발료프(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овалёв) 연방보안국(ФСБ) 장관을 해임하고, 뿌찐을 임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유력 경제지인 까메르쌍트(Коммерсантъ)는 “까발료프 연방보안국 장관의 해임은 서울에 일종의 위안이 될 수도 있다”라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이렇듯 러시아가 고압적으로 나온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러시아는 한국과의 교역 확대, 대규모 투자 등을 기대했으나 중국에 대한 투자의 2%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했고,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의 소외, 러시아에 사전 통보나 양해 없이 4자회담 추진 결정, 국민의 정부 수립 후 미·중·일과의 정상회담 일정은 잡혔으나, 한·러 정상회담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러시아 정부는 한국의 김대중 신정부 역시 주변 4국 중 러시아를 가장 홀대하고 있다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언급했듯이 1996년 1월 쁘리마꼬프 외무장관 등장 이후 한반도에 대한 기류도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러시아 정부는 한국 길들이기 차원에서 강경하게 나온 것으로 판단되지만, 우리 측의 치밀하지 못한 대응도 사건 확대에 일조했다고 본다.
필자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조성우 참사관이 모이쎄예프에게 돈봉투로 보이는 무언가를 건네는 장면이 러시아 TV 방송에서 보도됐고, 추방 당일에도 그의 딸이 고가의 첼로를 신고 없이 가지고 나가다 세관에 적발되는 등 러시아 측에 빌미를 준 측면이 강하다.
여하튼 쁘리마꼬프는 우리와는 악연이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호평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외무장관 시절 미국에 대한 저항과 한국의 군기를 잡은 게 주효했는지, 쁘리마꼬프는 총리가 되었고,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성장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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