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항(정치학 박사)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라비치 뿌찐(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1
3년 7개월의 기적
카오스적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단호한 결정력과 재빠른 실천력을 보여준 블라지미르 뿌찐은 러시아인들에게 질서를 확립·유지하면서, 옐찐 시대에 상처받은 국가적 자존심을 되살려주는 인물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기대감과 인기를 바탕으로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1999년 12월 국가 두마 선거에서 뿌찐은 가뿐하게 승리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권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뿌찐의 최고의 적수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인 겐나지 쥬가노프보다 오히려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던 쁘리마꼬프 전 총리였다. 그러나 뿌찐은 까게베 출신답게 이미 사전 정지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새천년 1월 18일 개최된 국가 두마 전체 회의에서 여당인 단합당(Единство)은 제1야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의 물밑 거래를 통해 공산당의 주요 리더인 유리 쎌레즈뇨프(Ю. И. Селезнёв) 하원 의장의 연임을 지지함으로써, 이 자리를 노리고 있던 쁘리마꼬프의 뒤통수를 쳤다.
또한 베레좁스끼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TV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쁘리마꼬프를 늙고 병약한, 구태적인 소련 시대의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지지율을 깎아내고 있었다. 결국 하원 의장 타이틀을 기반으로 대선 출마를 고려했던 쁘리마꼬프는 지지율 하락과 함께 후보 등록을 포기하게 된다.
11명의 후보가 경합했던 2000년 3월 대선에서 뿌찐은 과반수가 넘는 52.94%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겐나지 쥬가노프는 29.21%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사실 투표 전부터 뿌찐의 지지율은 50% 내외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선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물론 임금 인상안 발표 등 선심성 공세와 일부 언론(Сегодня; 시보드냐 신문)에 대한 탄압으로 선거 과정에서의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선거는 비교적 자유롭고 공정하게 실시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마침내 러시아 역사상 민주주의적인 방식에 의해 두 번째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다. 1996년 8월 끄레믈궁 총무실 부실장을 시작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3년 만에 총리가 되었고, 이후 7개월 만에 세계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거대한 지정학적·전략적 강대국인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바야흐로 뿌찐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양아치(шпана; 쉬빠나)에서 까게베 요원으로
블라지미르 뿌찐은 1952년 10월 7일, 전쟁의 참화가 아직 가시지 않은 레닌그라드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이로 태어났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의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여 큰 인물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레닌과 같은 ‘블라지미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뿌찐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모두 병으로 죽었고, 셋째인 그는 1911년생 동갑인 부모가 만 41세에 겨우 얻은 늦둥이였다.
뿌찐의 아버지인 블라지미르 스삐리도노비치 뿌찐(В. С. Путин)은 독소전쟁 발발 당시 예비역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자원입대해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NKVD) 소속의 특수폭파공작대에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고 제대한 상이용사였다. 할아버지 스삐리돈 뿌찐(С. И. Путин)은 레닌그라드의 명소인 아스토리아 호텔의 요리사였고, 레닌의 미망인인 나제쥐다 끄룹스카야의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뿌찐의 할아버지도 까게베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이었다고 주장한다.
만 여덟 살이 된 1960년 9월, 뿌찐은 초·중등 8년 과정의 쉬꼴라(Школа)에 입학하는데, 학교생활에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특이한 점은 학생들 대다수가 영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지만 뿌찐은 독일어를 선택한 것이다. 선견지명의 소유자인가? 훗날 그는 동독에서 까게베 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또 다른 특이점은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오늘날의 경우, 물론 의도적인 정치 행위로 판단되지만, 각국의 정상들과 회담을 할 때마다 지각하는 습관은 아마도 이때부터 몸에 밴 것으로 보인다.
뿌찐은 공부보다는 부랑아들과 어울리며 동네의 뒷골목에서 수시로 싸움질을 하는 등 불량소년이었다고 한다. 성적도 좋지 않아 남들이 3학년 때 입단하는 소련공산당 소년단 삐아녜르(пионер ; pioneer)에도 6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뿌찐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모범생이 아닌 양아치(шпана)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놀이터나 학교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권투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훈련 도중 펀치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에 유도와 레슬링을 혼합한 러시아 특유의 삼보라는 호신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보 사범으로부터 유도로 종목을 바꿔보라는 권유에 따라 유도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유도에 흠뻑 빠진 뿌찐은 유도를 통해 예를 배우게 되었다면서, 유도야말로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철학이라고 언급하곤 했다. 뒷골목 양아치 생활을 청산하고 운동으로 전향한 뿌찐의 유도 실력은 체육특기생으로 대학 입학이 가능할 정도로 일취월장하게 된다.
뿌찐의 쉬꼴라 시절 담임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대체로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례로 학교에서 댄스파티가 열리면 학생들 대부분이 춤추는 것을 좋아했지만, 뿌찐은 이런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에 혼자서 기타를 치거나 운동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쉬꼴라 졸업 후 뿌찐은 화학전문학교에 진학하지만, 여기서도 학업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졸업 후 레닌그라드 민간항공대학에 들어가 조종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밀 첩보원의 활약상을 그린 ‘창과 방패’라는 영화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까게베 요원이 되고자 진로를 바꾸게 된다.
평소 저돌적이며 머뭇거리지 않는 성격인 그는 얼마 뒤 집 근처에 있는 레닌그라드 까게베 지부를 찾아갔다. 까게베 장교는 자원 근무하겠다는 당돌한 소년에게 까게베는 자원한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군에 복무하거나 대학생 중 적임자를 골라서 받아들인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계속해서 무슨 과목을 공부해야 들어올 수 있는지 묻자, 성가신 듯한 장교는 지나가는 말로 법대라고 이야기했는데, 이 한마디가 곧 한 소년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다.
뿌찐이 양아치 생활을 청산하도록 도와줬던 유도 사범은 체육 특례입학이 가능한데도 갑자기 민간항공대학을 포기하고, 굳이 어려운 법대에 진학하겠다는 발로쟈(블라지미르의 애칭)에게 “죄 없는 사람이나 잡아가는 짭새(мент)가 되겠다고?”라면서 버럭 고함을 쳤다. 이에 기분이 몹시 상한 발로쟈는 “짭새는 안 될 거예요.”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1970년 우리 나이로 열아홉 살이 된 뿌찐은 레닌그라드 국립대(현 쌍트 뻬쩨르부르크 국립대; СПбГУ) 법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네바강 연안에 자리 잡은 레닌그라드 대학은 모스크바 대학(МГУ)보다 31년 앞선 1724년, 뾰뜨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가 설립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대학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알렉싼드르 께렌스끼(А. Ф. Керенский)와 8개월 뒤 께렌스끼 정권을 타도한 레닌도 같은 대학 출신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고, 공부 외의 시간엔 유도장에서 땀을 흘렸다. 강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술과 담배도 끊었다. 지역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고, 여름방학 때는 시베리아 숲에서 벌목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한 번은 그루지야(현 조지아) 공화국에서 개최된 대학생 건설캠프에 2주간 참가하여 받은 돈으로 코트 한 벌을 구입하고, 남은 돈은 흑해 연안의 휴양지에 놀러 가서 다 써버리기도 했다.
1972년 뿌찐의 모친은 우연히 구매한 복권이 당첨돼 경품으로 받은 소형 승용차를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뿌찐은 자동차를 신나게 몰고 다녔는데, 이는 일반인들도 자동차를 보유하기가 쉽지 않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와 관련하여, 뿌찐이 까게베로부터 돈을 받아 차를 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74년 정체불명의 한 남자가 뿌찐을 찾아왔다. 그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파견된 까게베 요원이었는데, 뿌찐을 보자마자 바로 찾아온 용건을 꺼내놓았다. “블라지미르 뿌찐씨. 우리는 최근에 법학과와 소련공산당 청년연합조직(Комсомол ; 껌싸몰)으로부터 당신에 관한 많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면밀한 조사와 관찰을 통해 당신이 빠른 두뇌 회전, 우수한 학업 성적, 건강한 신체,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확인했습니다. 정말로 보기 드문 훌륭한 학생입니다.”
마침내 뿌찐의 오래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까게베 의장은 유리 안드로뽀프였는데, 그는 까게베 조직을 엘리트 집단으로 바꾸려고 했고, 뿌찐은 그런 부류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후 뿌찐은 안드로뽀프를 숭배하면서 영웅처럼 존경하게 된다. 실제로 옐찐의 후임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1999년도 후반기에 뿌찐은 언론으로부터 현대판 안드로뽀프라는 평가를 자주 받았다.
드레스덴(Dresden) 시절
1년 6개월 동안 혹독한 까게베 훈련 교육을 마치고 1976년 중위 계급장을 달게 된 뿌찐은 이후 8년간 까게베 제1총국 소속으로 레닌그라드 지부에서 근무하게 된다. 제1총국은 까게베 내에서 요직으로 평가받는 부서인데, 30만 명에 달하는 까게베 요원들 가운데 제1총국 소속은 5천 명 미만이었다.
레닌그라드 근무 시절 뿌찐은 희한하게도 류드밀라라는 같은 이름의 두 여성을 순차적으로 사귀게 된다. 첫 번째 류드밀라는 친한 친구의 여동생이자 레닌그라드 국립대 의대생이었는데, 1979년 약혼 후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 뿌찐이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게 되어 헤어지게 된다. 이후 1년 뒤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류드밀라(Л. А. Путина)는 깔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 출신인 미모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결국 결혼에 골인하게 되지만, 2014년 이혼한다. 현재 뿌찐의 두 딸은 두 번째 류드밀라가 낳은 자식이다.
1985년 뿌찐은 서독이 아닌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든든한 가족 배경이나 연줄이 없는 뿌찐으로서는 까게베 요원 시절에도 길거리 싸움을 벌이는 등 좋지 않은 행적으로 인해 근무 평가에서 감점을 받았을 것이다.
소령으로 진급한 뿌찐은 1985년 8월 드레스덴에 도착하면서 마침내 해외 첩보원이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희망찬 기대감과는 다르게 그는 까게베의 변두리 지부에 근무하는, 냉소적이고 사기가 떨어진 요원들 사이에 끼어든 일개 사무원에 불과했다. 베를린 주재 까게베는 세계 최대 규모였지만, 드레스덴 지부는 요원 6~8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변방의 작은 사무소에 불과했다.
작센 지방의 사투리까지 구사할 정도로 독일어에 능통했던 뿌찐은 동독에서 6년 동안 근무했지만,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를 자주 방문해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와 경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1987년에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드레스덴 지부의 부총책 역할을 맡았다. 훗날 동독에서 활동했던 까게베 요원들은 영락없는 동독인처럼 생활하며 흐트러짐이 없는 뿌찐을 기억하면서 최고의 까게베 요원이었다고 극찬했다.
1989년 초에 동독의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이 100년은 버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장벽은 무너져 내렸다. 이후 첩보기관은 사실상 쓸모가 없는 조직으로 전락했다. 기강은 무너지고 요원들 사이에서도 탈법행위가 판을 쳤다. 발 빠른 동료들은 정부 영역이나 경제 관련 기관에 진출하여 해결사 역할을 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게 되었다. 뿌찐은 까게베 조직에 계속 몸을 담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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