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러시아연방

러시아 연방(РФ) : 씰로비키(Силовики)

twinkoreas studycamp 2021. 10. 4. 12:55

 

김태항(정치학 박사)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라비치 뿌찐(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2

레닌그라드 대학(쌍트 뻬쩨르부르크 대학)의 '사부와 애제자' : 쏘브차크와 뿌찐(gazeta.ru)



쏘브차크와의 재회

1990년 1월 동독에서 귀국한 뿌찐은 까게베의 모스크바 본부 파견 제의를 거절하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국립대 총장의 국제관계 담당 보좌관으로 부임했다. 이 자리는 학생들과 방문객들을 감시하기 위해 마련된 까게베의 몫이었는데, 30대 후반의 젊고 혈기방장한 뿌찐에게는 따분한 직책이었다.

뿌찐은 옛 은사이자 당시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인 쏘브차크를 찾아가 즉각 의기투합하게 된다. 쏘브차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옐찐, 빠뽀프(Г. Х. Попов)와 함께 레닌주의 타도, 소련공산당 타도를 외쳤던 급진 개혁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후 옐찐은 대통령이 되고, 빠뽀프는 초대 모스크바 시장, 쏘브차크는 쌍트 뻬쩨르부르크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들은 격동기 러시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참고로 옐찐의 후계자가 쏘브차크의 오른팔이었다는 점을 보면, 뿌찐이 권력의 중심인 모스크바의 정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뿌찐이 까게베 의장이 포함된 1991년 8월 쿠데타의 주역들에 대해 폭도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가 실패한 뒤, 소련공산당 소유의 정치교육원 건물이 쌍트 뻬쩨르부르크시 소유로 이전되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수시로 건물 옥상에 붉은 깃발을 게양하자 화가 난 뿌찐은 크레인을 가져와 직접 전기톱으로 깃대를 잘라버렸다.

뿌찐이 쏘브차크의 오른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계기는, 8월 쿠데타 당시 까게베 요원들이 쏘브차크를 체포하려 할 때, 이러한 내부 정보를 미리 입수한 뿌찐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는 쏘브차크를 까게베 요원들보다 앞서 간발의 차이로 구해낸 것이다.

야코블레프(위키피디아 러시아)


쏘브차크가 1991년 6월부터 1996년 6월까지 쌍트 뻬쩨르부르크 시장으로 재직할 때, 뿌찐은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 부시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96년 쏘브차크가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후, 신임 시장인 야코블레프(В. А. Яковлев)가 부시장직에 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쏘브차크와의 의리를 지킨 것이다. 이후 뿌찐은 “난 모두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 어디서든 반드시 불러줄 것이다.”라는 자신만만한 기대와 함께 다촤에서 가족들과 유유자적하며 백수 생활을 즐겼다.

쏘브차크는 당시 외무장관이던 쁘리마꼬프를 통해 뿌찐에게 대사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뿌찐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시장 선거에 패배한 후, 쏘브차크는 뇌물 수수 등 비리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기 시작했고, 오래된 친구들조차 그를 멀리하면서 냉담하게 굴자 프랑스 파리로 피신한다. 전과 다름없이 일관되게 쏘브차크를 상대해준 사람은 뿌찐이었다. 이후 1999년 8월 뿌찐이 총리가 되자 러시아로 귀국하게 되는데, 뿌찐의 정치적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쏘브차크는 애제자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한 달 전인 2000년 2월 세상을 떠난다.


끄레믈 입성



행운의 사나이답게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1996년 8월 빅또르 체르나믜르진 총리가 새로운 내각 명단을 발표하면서 알렉쎄이 볼샤꼬프(А. А. Большаков)를 제1부총리로 임명한 것이다. 뻬쩨르부르크 출신이자 뿌찐과 친분이 있는 볼샤꼬프는 뿌찐에게 끄레믈궁의 빠벨 보로진(П. П. Бородин)을 만나보라고 했고, 보로진은 그에게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 자리를 주었다. 백수 생활 두 달 만에 일자리를 구한 것이다.

 

보로진(Pavel Borodin) - en.wikipedia.org 


빠벨 보로진은 간단치 않은 인물이었다. 옐찐의 오랜 술친구이자, 옐찐의 총애를 받으며 끄레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른바 끄레믈궁의 경제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물럭거리면서 손에 묻은 떡고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등 부패한 인물로도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끄레믈궁의 개보수 공사 관련, 시공사인 스위스계 건축 회사로부터 약 2,5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받아먹은 것으로 조사를 받는 등 옐찐에게는 골칫거리였지만, 옐찐은 그를 끝까지 중용했다. 결국 4년 뒤 자신이 자리를 마련해 준 뿌찐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끄레믈궁의 주인이 된 후 의심이 많은 옐찐으로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물론 씨미야(가족) 세력이 있었지만, 이들과도 실제로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었다. 이때 침착하면서도 진중한 일처리, 그리고 냉정한 판단, 나아가 쏘브차크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났듯이 충성스러운 인간미를 보여준 뿌찐은 옐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유마세프(위키피디아 러시아)



발렌찐 유마셰프(В. Б. Юмашев) 끄레믈 행정실장, 옐찐의 딸인 따찌야나, 알리가르히인 베레좁스끼와 라만 아브라모비치(Р. А. Абрамович), 그리고 볼로쉰(А. С. Волошин)등 씨미야 세력의 핵심들도 뿌찐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후 그는 연방보안국 국장, 총리,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소위 ‘미사일 승진’을 하게 된다. 참고로 뿌찐을 누구보다도 총리로 강력하게 천거한 사람은 베레좁스끼와 아브라모비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뿌찐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베레좁스끼는 숙청되지만, 30대의 젊은 아브라모비치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끄레믈궁 행정실에 있을 때, 뿌찐에게는 측근 그룹이 존재하지 않았다. 씨미야 멤버이자 행정실장이던 발렌찐 유마셰프의 부하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그룹을 만드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방보안국 국장이 되자 본격적으로 자파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씰로비키(Силовики)의 탄생

 

푸틴의 실로비키(economics-prorok.com)


씰로비키란 러시아어의 힘, 무력을 의미하는 씰라(сила)에서 파생된 용어로 뿌찐 체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까게베, 군, 경찰 등 권력기관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 새로운 권력 계층을 의미하는데, 뿌찐의 최측근을 비롯하여 고위직일수록 까게베 출신들이 다수를 이루며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연방보안국 국장 시절 뿌찐이 주안점을 둔 부분은 인사 문제였다. 그는 쌍트 뻬쩨르부르크 시절의 핵심 인맥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뿌찐 체제에서 실세 그룹을 형성하는 니꼴라이 빠뜨루셰프(Н. П. Патрушев), 빅또르 이바노프(В. П. Иванов) 등이 까게베 출신이고, 뿌찐의 그림자와도 같은 이고리 쎄친(И. И. Сечин)의 경우 씰로비키가 아닌 민간인 출신이었다.

옐찐 시대에는 ‘알리가르히 자본주의’로 불릴 정도로 경제력과 경제 권력을 장악한 알리가르히들이 정치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뿌찐 시대에 들어서는 알리가르히의 재편과 더불어 이른바 씰로비키가 권력의 우위에 서게 된다.

씰로비키와 알리가르히 간의 투쟁에서 씰로비키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는데, 알리가르히들은 극한적 경쟁과 대립을 하면서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하는 등 스스로 분열했다. 물론 그들 역시 정치적 야심은 있었지만, 정당이나 군부, 안보 기관 등과의 연계를 맺는 등의 정치력은 부족했다.

반면에 씰로비키의 주류인 전직 까게베 출신들은 국내외에서 활동하며 습득한 일종의 특권의식을 공유했다. 뿌찐의 후임으로 연방보안국 국장이 된 니꼴라이 빠뜨루셰프는 “그들(씰로비키)은 러시아의 신생 귀족이 되었다.”라면서 그들은 돈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책임감과 애국심, 이상주의 때문에 일한다고 언급했다.

사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나스찌(공개) 정책으로 까게베 요원들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 강제 추방과 대숙청의 책임자들로 낙인찍히면서 악마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 회복은 1997년 옐찐에 의해 시작되었고, 뿌찐 시대에 들어서는 신생 귀족들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이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선 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정교회인데, 이른바 ‘영적 변호’를 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했다.

메드베제프 전 러시아연방 대통령, 총리(kremlin.ru)


여하튼 쌍트 뻬쩨르부르크 출신의 까게베 요원들은 끄레믈과 정부 부처, 연방 의회, 국영기업의 최고위직에 포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뿌찐이 쌍트뻬쩨르부르크 부시장 시절 인연을 맺게 된 젊은 경제학자들과 변호사들 같은 자유주의자들 또한 뿌찐 체제의 한 축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도 오르게 되는 드미트리 메드베제프(Д. А. Медведев)인데, 그는 뿌찐의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대 직계 후배이자, 쏘브차크 교수의 제자였다. 뿌찐의 핵심 측근으로서 러시아 최대 국영기업인 가스쁘롬 회장, 총리, 대통령, 당 대표 등을 역임하게 된다.

 

라만 아브라모비치(로만 이브라모비치/1966년생)



이외에도 첼시 FC의 구단주이자 억만장자인 라만 아브라모비치 등 친뿌찐 성향의 알리가르히들 역시 쌍트 뻬쩨르부르크 출신의 까게베 요원들, 그리고 학자·변호사 등 민간인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뿌찐을 떠받치는 권력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다.


언론 길들이기

2000년 5월 뿌찐 취임 사흘 뒤 검은 복면을 쓴 무장한 세무경찰이 구신스끼 소유의 미디어 모스트 사무실을 급습했다. 체포된 구신스끼는 자신의 미디어 제국을 가스쁘롬에 매각하는 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러시아를 떠날 수 있었다. 뿌찐으로서는 방송사에 대한 국영기업의 지분을 높이는 방법으로 직·간접적 언론 통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구신스끼 소유의 러시아 최대 민영방송인 엔떼베(NTV)는 1999년 두마 선거에서 루쉬꼬프와 쁘리마꼬프를 지지했고, 이듬해 대선 때도 뿌찐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뿌찐이 싫어할 일만 했다.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 정치문화가 주된 정체성으로 화석화된 러시아에서, 더욱이 최고 단계의 권위주의적·고압적 조직인 까게베에서 잔뼈가 굵고 수장까지 역임한 뿌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뿌찐은 TV 방송국 채널 대부분을 국영화하는 식으로 보복했다.

핵잠수함 꾸르스크의 잔해


호사다마인가. 대통령 취임 3개월 만인 2000년 8월 12일 러시아의 최신형 핵잠수함 꾸르스크(Курск) 호가 노르웨이 북단의 바렌츠해에서 훈련 중 침몰하여 118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문제는 러시아 당국이 군사기밀 상의 보안을 이유로 외국의 구조 제의를 거절하다가 사고 발생 나흘이 지나서야 노르웨이와 영국의 지원을 수락했고, 뿌찐 역시 흑해 연안의 소치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즉각 복귀하지도 않았고, 사고 현장을 방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최초 사고 보도도 해외 언론이었는데, 이후 독립적 성향이 강한 엔떼베(NTV)와 베레좁스끼의 오에르뗴(ORT) TV는 당국의 무책임과 무능, 거짓말, 비밀지상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정치인들도 이에 동조하자 뿌찐은 사고 발생 열흘만인 22일 사망한 승무원들의 유족을 만났으며, 23일을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물론 뿌찐은 유족들 앞에서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 극한의 분노를 표출했다.

구신스끼의 엔떼베는 조만간 가스쁘롬 소유로 넘어갈 예정이라 문제가 없었지만, 베레좁스끼의 오에르떼 TV가 문제였다. 사실 베레좁스끼는 뿌찐을 총리로 천거한 장본인이자, 베레좁스끼의 호화로운 해외 별장을 뿌찐이 이용하면서 같이 스키를 타기도 하는 등 친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호적인 약효가 끝나가는 시점이 된 것이다.

 

 

(아에라플로트 홈페이지)

 

베레좁스끼는 오에르떼 TV의 지분을 자신의 동료이자, 옐찐의 씨미야 멤버였던 아브라모비치에게 팔도록 강요받았다. 동시에 러시아 당국은 베레좁스끼 소유의 항공사인 아에라플로트(Аэрофлот)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구신스끼의 운명을 이미 목도한 베레좁스끼는 즉각 러시아를 떠났다. 그리고 베레좁스끼의 지분을 매입한 아브라모비치는 그것을 국가에 헌납했다. 뿌찐이 이뻐할 수밖에 없는 행보였다.

 

벤 주다


뿌찐은 주요 TV 채널 외에도 상당수의 채널을 친정부적 성향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 출신의 언론인인 벤 주다(Ben Judah)는 텔레파퓰리즘(telepopulism), 비디오크라시(videocracy)라는 신조어로 뿌찐 체제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스크린의 도움으로 대중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게 끄레믈의 목표라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