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에 관한 문제/대국민 통일사기극

대국민 통일사기극(9) 긍휼과 상호조정의 문제

twinkoreas studycamp 2021. 7. 27. 21:09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2500년 동안 성찰의 근원적 주제였다. 인간이 자기를 기만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며 상충하는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고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 신화를 부정하는 통찰력을 갈구하며, 대체로 사람들이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보다 더 그럴싸한 동기를 내세운다는 것을 많은 연구자들이 확인해 준다.”(찰스 린드블롬, 시장체제, 245)

 

한반도 국가의 재통일에 관한 문제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체제, 민족, 계급, 국가, 그리고 국제관계에 접근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별개의 문제로 바라보는 견해들도 있지만)

 

쿠바혁명의 발상지 : 시에라 마에스트라

 

 

불쌍한 존재들의 깨달음 : 서로에 대한 긍휼

 

칸트는 "저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내 가슴엔 양심과 도덕률이 있다"고 했지만, 끝 없는 우주를 떠올리면 지구인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78억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생로병사를 겪으며 지지고 볶아도, 막상 가족이 먼저 떠나면 보내 드렸다고 말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사실은 어디로 보내 드렸다는 것인지 자신도 간 본 적이 없어서 알 도리가 없다.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가엾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서로를 불쌍하고 가엾이 여기는 긍휼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사랑, 고타마의 자비, 공자의 어짐(), 맹자의 측은지심, 체 게바라의 사랑, 이 밖에도 역사상 무수하게 명멸했던 인본주의자·휴머니스트들이 강조했던 인류애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통한다.

 

관념의 향연이 아니라 실재를 중시했던 정약용이 강조한 서(恕)의 개념이나 증험을 중시했던 최한기가 말한 ‘측은하게 여김’이란 인간의 내재적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마음·태도·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투영된 국가 사이에서도 서로 측은하게 여기는 관계가 성립되지 말란 법이 없다. 허약한 완충국가의 비애를 겪은 한반도 국가의 쌍생아로서 남과 북은 그러한 정서와 관계성을 가질 수 있다. 

 

역사적 경험에서 볼 때 세계의 국가들은 상호인정에 기초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해서 핵전쟁을 회피해 왔다. 북측이 특정한 신념으로 뭉친 집단적 결사체로서 핵무기를 보유한 것과 하나의 국가로서 핵무기를 보유한 것 중에서 어떤 경우가 남측에게 덜 위험할 것일까? 한국과 조선의 관계가 민족내적 관계이면 북핵의 위험이 덜해지는가, 조선의 국가성이 부정되고 국토를 참절한 일개 지방권력이라면 북핵의 성격이 달라지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고 북핵폐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나 반드시 한반도비핵화를 이루겠다는 포부는 근본적으로 실현성이 희박한 대국민 사기극으로 드러날 것이다.

 

 

혁명적 전쟁관과 '새로운 인간'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처럼 인간은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서 부족·종족·인종·지역·계급·민족·국가에 관한 신조를 갖게 되고, 타인을 대상화하고 제거하는 전쟁과 계급투쟁, 혁명을 정당화했다.

 

1차세계대전이 러시아를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게 했고, 2차세계대전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창설로 이끌었다.”(WW1 had led to Russia's leaving the capitalist system, and WW2 to the creation of the socialist system, Georgy Malenkov)

 

말렌코프의 세계전쟁 정식은 수동식 맷돌은 봉건제를 만들고, 증기력에 의한 제분기는 자본주의를 만들었다는 마르크스의 생산력 정식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두 차례 세계전쟁을 거쳐 20세기의 대안처럼 부상했던 사회주의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과 계급해방 및 세계혁명을 지향했지만, 민족과 국가의 틀을 뛰어넘지 못하고 새로운 계급질서를 초래하였다. 계급철폐를 장담했던 소연방(Soviet Union)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는 신계급 노멘클라투라의 문제를 드러냈고, 엄격한 기율을 자부하던 중국 공산당도 개혁개방 이후 태자당논란이 불거졌다.

 

1965312일 우루과이 유력 주간지 ‘Marcha’에 기고한 글에서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우리는 21세기 인간 존재를 만들 것이다(We will make the human being of the 21st century). 우리는 일상의 행동에서 스스로를 구축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갖춘 새로운 인간(a new man and woman with a new technology)을 만들어낼 것이다고 다짐했다.

 

게바라는 ‘From Algiers, for Marcha. The Cuban Revolution Today’라는 제목의 글에서 쿠바혁명과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여러 생각을 밝혔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은 충만한 헌신으로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의식적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지속할 수 있을 때 완전한 해방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민의 새로운 가치체계는 체계적 교육에 의해서 집단적 행위를 창출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만큼 어렵고 장기적 과제라는 것을 인정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게바라는 혁명의 거점이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악지대에서 함께 했던 혁명가들과 게릴라들, 그리고 인민들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새로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귀중한 덕목을 발견했다.

 

그는 사회 전체가 거대한 학교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교육기반의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지만, 새로운 경제양식으로 발전할 때까지 새로운 인간(the new man and woman)의 상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쿠바의 사회주의를 기저귀를 찬 아이와 같은 미숙한 단계로 규정하고, 새로운 인간을 위한 교육과 기술 발전이 사회주의 건설의 두 기둥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교육과 함께 기술과 산업을 강조하고, 쿠바 혁명정부의 초대 산업부장관을 맡은 배경이다.

 

게바라는 대중의 다양한 편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과 이에 따른 당과 혁명적 전위 및 선진대중(advanced mass)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혁명적 전위의 솔선수범이 대중으로 하여금 빠르게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교육혁명과 기술혁명에 의해서 과거의 낡은 결함들을 갖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할 수 있고, 그러한 인간들이야말로 외형적인 부의 축적이나 소비 욕구를 뛰어넘어 내적인 충만함과 책임감으로 스스로 완전해진다고 느끼는 완벽한 사회주의적 인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체 게바라

 

게바라는 진정한 혁명이라 함은 거대한 사랑의 감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혁명의 전위는 가장 숭고한 대의인 인민에 대한 사랑을 깨달아야 하며, 인민을 움직이려면 교조적 극단주의와 냉소적 스콜라주의를 극복하고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혁명의 전위가 심원한 인간 본연의 심성과 정의와 진리에 대한 강력한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게바라는 미래의 혁명가들이 인민의 진정한 목소리를 가진 새로운 인간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지만,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실망했던 것처럼 소연방의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게바라가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었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소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에서는 게바라가 열망했던 21세기 새로운 인간이 오지 않았다. 대신에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성난 인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레닌동상을 끌어 내리고 당원증을 불태웠다.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

 

1935년 소연방은 채탄 공정을 혁신해서 개인 채굴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스타하노프를 스탈린이 표방한 새로운 인민의 표상으로 극화시켜서 초기 사회주의체제의 생산성을 급진적으로 향상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중국의 대약진운동(1958~1962), 조선(DPRK)의 천리마운동(1956~)에도 영감을 준 사건으로 평가되지만, 미국 언론은 조작 및 과장 의혹을 제기했다.

 

소연방은 스타하노프와 같은 혁신적이고 헌신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는 새로운 인간이자 새로운 인민이라고 강조했지만, 장기간 냉전과 미국과의 경쟁과정에서 노동영웅과 소수민족 및 동유럽 동맹국을 소비에트연방의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은 점차 지속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John M. Ordway(wikipedia)

 

 

20101129일 캐나다 일간‘The Globe and Mail’이 보도한 미 외교문서 내용 중에는 오드웨이(John M. Ordway) 전 카자흐스탄 주재 미국대사가 카자흐스탄 국방장관이야말로 워커홀릭(workaholic)을 자임하면서 늘 술에 쩔어 인사불성에 빠져 있는 진정한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스타일이라고 비꼰 대목이 나온다.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새로운 인간유형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주변 국가로 오래 전부터 전파되었던 '호모 보드카쿠스'였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조선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자,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 인간을 강조하였고, 근래에는 주체형의 새 인간, 창조형의 새 인간을 부가했다. 새로운 인간이라 함은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중시하며,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을 겸비한 김일성주의자로서 대중동원과 사회노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김정일 위원장은 주체사상에 관한 여러 담론에서 인간의 본성을 자주성·창조성·의식성으로 특징짓고, 이러한 본성을 참되게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을 주체형의 공산주의적 인간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물질적 자극을 위주로 하여 정치도덕적 자극을 경시하는 경향을 사회주의 제도의 근본성격에 어긋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그러한 경향은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물질에 매달려 사회주의 전취물을 부식하는 위험한 편향으로 간주했다.

 

김 위원장이 강조한 세 가지 본성과 정치도덕적 자극은 사적 유물론에 기초하면서도 탈물질적 인간관이 투영된 것으로, 소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권과는 다른 준거의 틀을 제시했다는 내부적 평가와는 달리 외부에서는 주관적 이상과 객관적 현실의 명백한 괴리를 관념적으로 극복한 또 다른 주관주의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제기됐다. 또한 소연방과 중국의 경험에 따르면 상층부의 정치도덕적 자극은 하부단위로 내려갈수록 교조적인 사상교화로 박제화되곤 하였다.

 

결론적으로 볼세비키혁명 이후 소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는 이데올로기 교육에서 신체문화에 이르기까지 정신과 육체를 망라해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추구하였지만,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고 체제의 종말을 맞이하였다.

 

반면에 중국, 베트남, 조선, 쿠바(인구수 순서대로)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호치민, 김일성, 체게바라 등이 말했던 새로운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행형이다. 또한 사회주의시장경제가 발전하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추구하는 새로운 인간이 다른 자본주의체제의 인간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따져보는 것은 과제로 남아 있다.

 

물론 사회주의체제에서 말하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자본주의형 인간의 최종적 우위를 자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에 기초한 인간론들은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서 현실세계에서 변혁의 위력을 발휘하기보다 어느새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시장체제에 대한 이해

 

경제학을 가장 잘 아는 정치학자로 통하는 린드블롬(Charles E. Lindblom)은 말년의 저서 ‘The Market System’(2001)에서 시장체제에 대한 여러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말하는 시장체제(market system)는 시장(market), 시장경제(market economy)보다 포괄적이고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린드블롬은 시장체제를 경제적 개념으로만 국한하는 기존의 철석 같은 믿음에 도전해서 과감하게 경제를 잊으라고 강조했다. 시장체제는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정치, 기타 일상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장체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사회만 생각하라고 거듭 역설했다.

 

그가 보기에 시장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개념은 상호조정(mutual adjustment)이다. 인류가 성취한 문명의 업적들은 상호조정에 기초한 사회적 조율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희소한 대상과 용역을 놓고 상충하는 열망으로 인하여 무질서의 위협이 폭발하기 쉽지만, 그 전에 응분보상(quid pro quo)’으로 각자의 요구를 제한함으로써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가능성을 평화로운 과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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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드블롬은 법인류학자 포스피실(Leopold J. Pospísil)이 소개한 파뉴아뉴기니 원주민의 두 가지 생존전략에서 시장체제의 장점인 상호조정의 기원을 찾았다. 해당지역의 고지대에 사는 원주민들은 무언가를 획득하려면 서로 습격하는 경향이 있었고, 저지대에 사는 원주민들은 서로 교환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응분보상의 핵심 원리는 거래를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분란을 초래할 수 있는 방식을 포기하는 것인데, 저지대 원주민들은 거래의 성공을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함과 동시에 거래에서 실패할 경우에 다음의 거래를 생각하며 욕구를 자제하거나 포기하는 과정을 습득함으로써 거래 이외의 폭력적 방식, 이를테면 절도 혹은 약탈이나 습격을 배제하는 평화의 정식을 세웠다는 것이다. 린드블롬은 결론적으로 고지대와 저지대의 차이를 폭력성의 정식평화의 정식으로 대비시켰다.

 

 

시장체제의 업적과 응분보상의 한계

 

시장체제는 국내적, 세계적 차원에서 놀라운 협력의 업적을 이룩했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린드블룸은 시장체제를 다른 어떤 관점으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인간 행동의 체계로 이해하면서도, 류가 발견하거나 고안한 것 중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규모의 협력을 가능하게 만든 포괄적이고 정확한 체제로 간주했다.

 

그에 따르면 시장체제는 중앙집권적 조율자가 아니라 참여자들의 상호조정을 통해 사회를 조율하는 방법이다. 사람은 타인에게 조건적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만 그들에게서 필요한 도움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것이 기본적인 사회적 조율의 원칙이다. 시장체제는 자유권, 재산권, 응분보상 원칙에 기초한 일련의 활동들의 집합이다. 이와 함께 어떤 형태로든 화폐, 판매, 중개인, 기업가, 법인(기업)이 합쳐져 시장체제의 뼈대를 형성한다. 여기서 국가는 엄청난 구매자로서 시장체제의 영역을 넓히는 확장자다.

 

린드블롬은 시장체제에서 응분보상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 한계도 인정했다. 응분보상은 명령이나 강제에 의한 동기부여보다 효율적이고, 자발성이나 우연성에 의존하는 것보다 확실하고 예측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장에 대한 기여도와 보상(반대급부)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응분보상은 평화로운 거래를 통한 상호조정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어떤 활동은 사소해도 보상을 받는 반면에 어떤 활동은 아무리 가치가 커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경제학자 이전에 정치학자였던 린드블롬은 응분보상이 외견상 완벽한 원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지불하지 않고 외면하는 가치도 많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그는 시장가격이 시장가치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기 때문에 시장은 시장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할당한다는 윤리적 주장은 그릇된 것으로 간주했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우연과 악의가 작용하는 현실을 설명하는데 용이하다. 어떤 사람은 뿌린대로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일한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버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이 누군가에게 지불하는 것은 부와 소득을 분배하는 관행에 의존하므로 누가 얼마를 받았는가를 기준으로 시장에서의 기여도를 평가할 수 없고, 시장 이외의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인간이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생물학적, 사회적, 신분적(자산과 기술) 유산은 시장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선행결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선행결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응분보상은 종국적으로 소득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상에서 완벽한 평등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선행결정과 시장의 부덕(不德)이 관여하는 응분보상의 원칙이 초래할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응분보상은 시장체제에서 상호조정의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 명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배분적 효율성(allocative efficiency) vs 부패보호 도덕률과 부패합리화 윤리

 

얻은 가치가 포기한 가치보다 값어치가 있다면 그 선택은 효율적이다.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효율 가격도 달라질 것이다. 자본 확대와 기술 변화는 효율 가격을 크게 변화시킨다. 임의가격은 물자부족 사태를 초래해서 사람들이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서는 광경을 만들어낸다.”

 

린드블롬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에서 효율적 배분과정이 붕괴하였고, 스탈린식 소비에트체제도 불필요한 생산품을 만들거나 투입과 기술혁신 및 유지에 관한 선택을 잘못해서 붕괴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최저 혜택(필수적 수요)은 공공선택을 통해 배분하고, 추가적 혜택(충분적 수요)은 시장선택을 통해 분배하는 배분적 효율성을 강조했다.

 

화폐와 가격이 없는 사회경제구조는 사회조율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생산을 통제하거나 계획하더라도 산출물을 분배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협력해서 생산된 전체 산출물 중에서 각각의 개인이나 가족이 차지하는 몫을 돈으로 환산해 지급하고 그 범위에서 원하는 것을 매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관리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배급표로 인해 초래되는 짜증스러움이나 독단성, 비효율의 문제를 덜어준다.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체제에서도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비자의 선택을 광범하게 허용하는 중앙집권적 계획체제를 상정할 수 있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충분히 부여하는 중앙집권적 계획체제를 상상할 수도 있다. 세계의 국가들은 세금, 정부구매, 보조금을 주요한 관리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도구를 광범하게 활용하면서 중앙집권적으로 계획된 비시장체제를 상상할 수 있다.

 

중앙집권적 계획수립은 정부 차원에서 결정한 목표 혹은 공동 목표를 정부가 추구하는데 적합한 반면에 시장체제는 공동목표와 개인주의적 목표가 혼합된 목표를 정부나 수백만 시장 참여자가 추구하는데 적합하다. 권위의 개입 없이도 협력의 기회를 향유할 수 있거니와 정부의 권위를 강화하지 않고서도 효율적이고 흔쾌히 협력을 도출할 수 있는 다른 기회도 많다. 시장체제를 지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적인 사회적 조율과정으로서 상호 조정이 갖는 장점 때문이다.”

 

린드블롬은 시장사회와 비시장사회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강조하면서 계획체제 및 비시장사회에 대한 온정적 시각을 거부하지만, 기존 시장체제에서 부패가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부패를 보호하는 도덕률과 그 타락을 정당화하는 윤리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시장체제가 비양심적이고 뻔뻔한 인간들에게 너무나 많은 기회를 부여한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사실상 역사는 대부분 대중에 대한 전제적 착취에 관한 기록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엘리트가 대중을 겉보기에만 자비롭게 통제하기 위한 일종의 청사진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항상 엘리트를 위협하는 존재인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세속적인 엘리트와 종교 엘리트가 협력해 온 역사다.”

 

시장체제와 결부된 민주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현재처럼 시민들이 사고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인해 시들어버린 최소 수준의 저급한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상당 부분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인과 기업가의 정치적 에너지 - 과거의 권위주의적 국가의 권력은 제어하지만 좀더 성숙한 민주주의는 방해하는 - 때문인 것 같다.”

 

결론적으로, 린드브롬은 시장체제가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나 논증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체제의 대안으로 추구해 온 사회주의 계획체제에서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더 어렵다고 정리했다.

 

 

실력과 덕성의 문제 : 공정하게 생각하는 사유의 능력

 

76년 동안 남과 북이 아시타비(我是他非)의 심연에 빠진 상황에서 지난 세월 동안 남북관계에서 드러난 변덕(變德)의 역사를 나열하는 것은 장황한 변설이 될 것이다. 노심초사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기다려온 한국의 국민들과 조선의 인민들로서는 양측의 정부가 때론 거창한 프로세스를 내세워 민족감정을 동원하고, 때론 한건주의식 정책이나 교류협력을 되풀이하는 것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서로에게 공정하게 생각하는 사유의 능력이 미비한 조건에서 쌍방은 말로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대원칙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군사적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비극적 시대를 무한정으로 연장해 왔다.

 

뿌리 깊은 지정학적 구조에 더하여 한국의 경제성장과 군사적 능력의 신장, 조선의 핵무력 완성과 중국 경제라는 강력한 배후로 인하여 남과 북이 일방의 실력으로 한반도 재통일을 실현하기 어려운 구조적 요인들이 더욱 견고해졌다.

 

현실적으로 남은 변수는 쌍방이 합의에 의해서 재통일의 물꼬를 터야 하는데, 한국전쟁이 남긴 교훈은 남과 북이 특정한 통일방안에 합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들이 한 나라로 합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하물며 남과 북이 기존의 체제에서 조금씩 이탈해서 제3의 체제로 수렴하는 통일을 지향하자는 것은 사실상 공염불에 불과하다.

 

좀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남과 북의 지도계층에서 평범한 국민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생존본능과 권력욕구에 기초해서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내적 동력을 쉽사리 버릴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이해에 비추어 볼 때, 남과 북의 대표자들이 자신과 주변의 기득권을 버리는 협상을 기대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앞으로 한국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을 강화하고, 조선이 경제적으로 더욱 시장화되면서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으로 개방하더라도 쌍방의 근본적 차이는 평행선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남과 북이 이념의 차이를 조금씩 좁혀가면 인간과 체제에 대한 쌍방의 근본적 인식의 차이와 상이한 이해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인 낭만적 가설이거나 민족주의를 동원한 상징조작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다.

 

결론적으로, 남과 북은 재통일을 이룰 실력이 구조적으로 미비한 조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덕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측이 아시타비(我是他非)의 심연에서 빠져나와 이데올로기와 진영논리를 억제하면서 서로의 체제에 대해서 공정하게 사유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려면 남과 북이 복잡한 것을 인지하고 용인하는 능력과 덕성을 가진 사회로 변화해야 하는 난해한 관문을 속히 통과해야 한다. 그 실마리를 쌍방의 국가승인에서 찾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상호조정에 관한 린드블롬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상호조정에 관한 논의는 한반도 국가가 지향하는 '평화의 정식'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상호조정을 통한 조율에 관한 사상 : 뉴턴-다윈-애덤 스미스-프로이트 .. 린드블롬

 

아이작 뉴턴

린드블롬은 상호조정을 통한 조율에 관한 사상사를 쓴다면, 뉴턴이 가장 먼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에서 물리적 세계를 천체의 상호조정의 기제로 설명했고, (god)에게 천체의 상호조정을 가동시키는 역할 외에는 아무 것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복잡한 생물학적 조율이 조율자없이 진행된다는 진화론을 제시한 다윈이다.

 

 

찰스 다윈

린드블롬은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을 북극의 빙하를 가르고 전진하는 쇄빙선처럼 상호조정을 인식하는 사상의 길을 개척한 기념비적 이론이라고 평가하였다. 다윈의 이론은 중앙집권자인 신이 있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생명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

 

그 다음은 다윈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다. 스미스는 사회조율을 왕이나 재무상의 중앙집권적 역량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상호조정의 성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린드블롬은 상호조정을 시장을 넘어 사회질서 전반으로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스미스의 승계자이자 확장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상호조정에 관한 사상사에서 마지막으로 꼽은 중요한 인물은 프로이트였다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로 통합된 최상의 지적 능력에 의해서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충동과 인지, 의지로 이뤄졌다.

 

 

찰스 린드블롬(1917~2018)

린드블롬은 인간의 내면을 상호조정이 이뤄지는 하나의 경기장으로 바라본 프로이트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보았다.

 

린드블롬은 500억 개의 원자가 조율되어서 DNA 분자를 만들고, 1천조 개의 세포가 조율되어 인간의 신체가 형성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적 조율이 아니라 완전한 상호조정의 결과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한 전후 70여 년 동안 세계대전과 핵전쟁이 재발하지 않은 것도 국제정치에서 상호조정이 작용한 결과이고, 인터넷은 세계적 차원에서 거대한 상호조정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