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인 뿐만 아니라 한글을 알고 쓰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예로운 소식이었다. 따라서 한글을 국어로 채택한 조선(DPR Korea)도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지만 침묵했다. 속 좁은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한글은 그 뛰어난 속성들에도 불구하고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 등에 비해 세계적으로 점유율이 낮은 소수의 언어에 속한다. 그동안 한글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도·인도네시아에서 쓰이는 언어들이나 세계적으로 전파된 포르투갈어·일본어 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소수의 언어로 간주됐다.
한글은 남북과 중국(조선족), 일본(재일교포),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고려인) 등을 합쳐도 8천명 안팎의 언어이고, 최근에 한글 바람이 분 베트남·네팔·인도네시아 등에서 한글은 취업용이지 일상적인 언어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일제강점기에 사용 자체가 금지되었던 치욕적 역사를 극복하고, 한글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원어라는 것은 남과 북이 모두 축하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여자선수들이 월드컵(U-17, U-20)을 석권한 것도 남과 북이 함께 축하할 일인가?
이 또한 심상치 않은 쾌거로서 남북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다. 인구 2천만이 조금 넘는 조선의 낭자들이 스페인과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의 축구강국들과 미국, 일본, 브라질, 중국 등 축구대국들을 20세 이하와 17세 이하에서 모두 제압한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크라이나 파병으로 세계적 관심과 경계심을 촉발하고 있는 조선의 평양에서 지난 10일 여고생(U-17) 축구선수들의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이들은 U-17 여자월드컵에서 축구강국 스페인의 대표팀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세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올해 열린 U-20 여자월드컵과 U-17 여자월드컵을 석권한 조선은 젊은 연령에서는 세계 최정상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아시아에서 이렇게 유럽과 남미의 전통적 강팀들과 미국까지 모두 제압하고 우승한 경우는 드물다.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말처럼 한국(Rep. Korea)의 남자축구는 월드컵 4강(2002년)과 U-20 월드컵 준우승(2019년)을 이뤘고, 조선의 여자축구는 U-20과 U-17 월드컵 우승을 여러 차례 차지했다.
남과 북은 이런 대칭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여자선수들은 주로 발을 쓰는 축구에서 세계 최정상이라면 한국의 여자선수들은 주로 손을 쓰는 양궁에서 세계 최정상이다.
한글과 태권도, 김치, 한복 등 : 세계적 문화유산과 두 국가
한반도 국가는 이데올로기의 단층선을 따라 두 국가(Two Koreas)로 분립되었고, 남과 북은 이란성 쌍생아(Twins)의 남매(Sibling)처럼 질적으로 다른 세계관으로 경쟁하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남과 북이 한글을 자국의 문화적 자산으로 배타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뿐더러 쌍방이 한글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쓴다는 점은 양측의 후손들에게 중요한 DNA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손과 발을 모두 쓰는 격투기 중에 한국과 조선이 종주국을 자임하는 종목이 태권도인데, 그 유래가 남과 북의 분단 이전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등록이 어느 쪽으로 이뤄지던 간에 공동의 자산일 수밖에 없다. 아리랑, 한복(조선옷), 김장(김치) 등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남과 북은 각각 다른 분야에서 때론 긍정적인 측면에서 세계적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때론 부정적 측면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국제법적으로 남과 북에 실재하는 두 국가는 전쟁을 멈춘 상태(정전)라는 점에서 교전국가의 관계라는 주장(김정은 위원장)도 할 수 있고, 정전협정이 70년(2023년)이 지나도록 항상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장기평화라는 주장도 할 수 있다.
앞으로 한반도의 두 국가가 비적대적인 관계로 변화하고, 장기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로 진화하여 쌍방이 세계적인 성취를 거둔 일에 대해 서로 축하하는 전통을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조선이 축하해야 할 일이었고, 조선 선수들의 월드컵 제패는 한국이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양쪽의 교조적 이데올로기가 이런 자연스러운 교감을 영원히 가로막을 수는 없다.
조선의 우크라이나 파병으로 신냉전의 기운이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지만,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 대립 및 강대국 편승전략에 함몰되지 않고 정경분리의 샛문을 열고, 정문(政文)분리의 창(窓)을 여는 것은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Build not wall but bridge."
(프란치스코 교황)
다음은 한글 작품이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화된다는 것을 강조한 데버라 스미스(Deborah Smith) 번역가의 연합뉴스 기고문 전문이다. 그녀는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한강 작가와 공동으로 부커상(인터내셔널)을 수상했다. 스미스는 한강의 작품들이 점차 영어번역을 거치지 않고 다양한 언어로 직접 번역되는 양상을 높이 평가했다.
< 한강과 번역에 관하여 >
한강의 작품을 사랑하는 세계의 무수히 많은 독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강의 뛰어난 작품이 인정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2016년 '소년이 온다'(영어 제목 'Human Acts') 영어 번역본이 영국에서 출판됐을 때, 존경받는 한 시인은 제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그것이 중요한 책이고, 기념비적이며, 정치적인 폭력과 그 영향을 다룬 새로운 종류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더해줍니다."
한강의 작품 활동을 오랫동안 지켜본 우리에게 노벨상은 이미 우리가 알던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한강은 종전과 완전히 다른 수준의 인정을 받는 작가가 됐습니다. 이 상이 어떻게 수여되는지를 두고 다소 혼란이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2016년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노벨상은 작가의 전체 작품에 수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권 중심적인 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커상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스웨덴인이며 여러 언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자국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다양한 작품들을요. 심사위원들이 최종 결정을 내리긴 하지만, 한국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읽고 쓰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반영합니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한강의 작품성을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는 세계의 중심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한강의 최근작인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미 스웨덴어, 프랑스어, 노르웨이어, 네덜란드어로 번역됐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2021년 한국어로 출간됐고 번역가 이예원과 페이지 모리스의 영어 번역본은 내년 1월 출간될 예정입니다. 영어 번역본에 대한 사전 리뷰는 "한강이 자기 작품 세계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었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에 대해서도 "한강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쓰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왔으며, 프랑스어 번역본은 프랑스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선 2021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채식주의자'가 한강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만,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는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작품은 굉장한 베스트셀러였고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 현재적 영향에 대한 국가적 담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을 때 K-팝 스타인 BTS 멤버들은 군 복무 중 이 책('소년이 온다')을 읽었다고 트위터(현 엑스·X)에 밝혔습니다.
노벨문학상이 주로 백인 남성에게 수여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유럽 중심주의와 성차별이 만연했는지 보여줍니다. 한강이 121년의 노벨문학상 역사상 아시아 여성 최초로 이 상을 받는 것은 문학계가 공정한 시대, 개인의 정체성이 공로를 가리지 않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영어를 단지 세계의 수많은 언어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는 것은 이런 공정성의 일환일 것입니다.
한강의 작품을 번역한 사람은 50명이 넘습니다! 저는 그들 중 세 명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어 번역가 비비안 에벨리나 외베로스, 네덜란드어 번역가 마토 만더스루트는 저와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SOAS)에서 함께 공부했고, 스웨덴어 번역가 앤더스 칼슨 박사(박옥경과 공동 번역)는 제게 조선의 역사를 알려준 분입니다.
저는 윤선미 번역가가 '채식주의자'를 번역하라고 아르헨티나 출판사에 제안하고 그가 스페인어로 이 작품을 번역한 일, 30년 동안 한국에 거주한 리아 요베니티 번역가가 '희랍어 시간'(이탈리아어 제목 'L'ora di greco')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과정을 최근 기사로 접하며 즐거웠습니다.
이 모든 번역은 한국어에서 직접 해당 언어로 이뤄졌고, 영어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비평가는 최근 "한강의 문학적인 공헌은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울려 퍼질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번역가의 노고와 실력 덕분에 한강의 문학 작품은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번역가들)의 공헌이 인정받는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번역가들의 공헌이 과장 없이 정확하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 데버라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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