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대남노선의 근본적 전환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한반도)에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가 병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제 현실을 인정하고,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규정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역대 정부가 민주와 보수를 떠나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 기조를 유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우리 공화국과 인민들을 수복해야 할 대한민국의 영토이고 국민이라고 공언하고, 대한민국 헌법은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명기했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한국의 통일노선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에 기초한 조선의 통일노선과 극명하게 상반되기 때문에 한국과는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자신들은 연방체제를 지향하는 반면에 남측은 체제통합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은 최근 몇 년 동안 한반도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북측의 미묘한 기류 변화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중대한 변곡점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즉 조선은 70여년 동안 주장한 ‘하나의 조국’의 프레임에 가려진 쌍방의 근본적 차이를 외면한 비현실적 통일논의를 종식하고, ‘두 개의 코리아’에 기초한 새로운 대남노선 및 대미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는 유사시에는 한국의 영토를 평정하겠다고 밝힘으로써 한반도 통일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란 점을 보여주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조선의 이러한 태세전환에 대해 통일논의를 포기하는 대신에 남북관계를 두 개의 국가 및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핵공격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조선의 변화를 일면적으로 접근한 것이며, 조선의 역대 정권이 지상의 과제로 계승해 온 (평화적) 통일위업에 대한 명시적인 종언은 남북관계의 대전환을 위한 주춧돌로 삼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양측이 각자 정부를 수립한 이후 서로 통일지상주의를 주창해 왔지만, 사실 양측은 각자 국가주의를 강화하면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통일방식을 지향하는 동상이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북측의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남측도 고착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상대의 변화를 창조적으로 수렴하여 대응하는 전환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동권은 영국 등 강대국에 의해 분할됐다가 각자 독립함으로써 대이슬람통일국가를 지향하는 이슬람민족주의자들을 좌절시켰지만, 역사적 현실은 하나의 동질성이 반드시 하나의 국가로 표현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 이슬람 형제국가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때론 반목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대표적으로 파키스탄은 동·서로 나뉘어졌다가 전쟁을 치르고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각자의 길을 갔지만, 지금은 국교를 수립하고 관계정상화를 유지하고 있다.
캐나다와 미국도 초기에 전쟁을 했지만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도 이와 유사하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은 이러한 나라들에 비해 매우 작은 소국들이지만 공동안보를 위해 통합이나 연방을 추진하지 않고 각자 독립을 유지하면서 협력하는 존재양식을 택했다.
반면에 워낙 단일성과 일체성이 강한 역사를 가졌던 한반도는 강력한 통일의지를 견지한 남과 북이 각자의 방식으로 통일을 지향하면서 전쟁을 겪고도 장기휴전(1953~현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남측이 북측을 다시 주적이란 점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이에 반발한 북측은 적대적 교전국가의 관계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양측은 서로 국가가 아니라 민족 내부의 특수한 관계로 바라보면서 상대를 주적이자 통일의 파트너라는 키메라와 같은 상(像)을 부여했다.
법적으로도 서로 반국가단체, 괴뢰, 혹은 할거한 지방권력 정도로 규정함으로써 유엔에서 공인한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외교적 관계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 대화는 양측의 외교부장관이 아니라 남측의 통일부장관과 북측의 통일전선부장 혹은 조평통위원장이 책임자로 나섰다.
그러나 일부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한국인들은 이러한 비현실적인 관계와 동상이몽의 통일논의보다 양측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왕래하는 수준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희망하고 있다.
즉 서로가 국가로 인정하고 ‘사이 좋은 이웃과 같은(good neighbor)’ 형제국가 혹은 남매국가의 관계를 모색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란 것이다. 국민들의 현실적 접근이 동상이몽의 통일논의보다 이성적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상호인정에 기초하여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면, 쌍방의 헌법수정(영토조항 등)이나 전담부서의 재구성을 포함한 법·제도적 변화가 불가피하다.
한국 내부에서는 한국전쟁의 원인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조선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론과 조선의 국력이 날로 쇠퇴하고 체제불안이 지속되기 때문에 굳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평화적인 통일이 올 것이라는 우위론이 광범하기 때문에 법·제도적 변화에 관한 논의가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북측이 대대로 이어온 통일위업 및 통일지상주의에 대한 일대 전환을 분명히 한 시점에서 이러한 중대한 변화를 한반도의 미래에 유익한 전환점으로 활용하는 장기적 관점과 전략적 대응은 남측의 몫이 되었다.
남북관계가 현실적으로 통일(체제수렴)의 가능성이 희박해짐에 따라, 양측은 애초 목표와 기대수준을 낮추어 왕래 가능한 존재양식(체제접근)을 도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Essays on Twin Koreas > 두 국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남 쓰레기 풍선과 대북전단의 딜레마 (30) | 2024.06.01 |
---|---|
자유왕래 가능한 2 국가 선호 52% (2) | 2024.03.16 |
한국과 쿠바 수교 : 정경분리의 실리 추구 (23) | 2024.02.15 |
김여정의 ‘대한민국’ 호칭은 ‘투 코리아’ 선회? (0) | 2023.07.12 |
정전협정 70주년, 2023년 국가안보전략의 명암 (1) | 2023.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