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론/인간본성, 국가, 전쟁, 국가주의

원시전쟁의 아련한 흔적들

twinkoreas studycamp 2021. 3. 15. 22:02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렵채취에 의존하던 모계사회에서 전쟁이 없었는데 농업혁명으로 가부장제에 기초한 국가가 등장하고 계급이 형성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 계급관계가 사라지면 원시공동체처럼 국가가 소멸되면서 가부장제와 전쟁이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원시인들에게 없었던 폭력성이 문명의 발전에 따른 질서(가부장제-계급-국가)의 영향으로 생겨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반하는 원시전쟁의 증거들이 발굴되었다.

 

 

원시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인간의 본능에서 유래하는 종족보존에 대한 동물적 욕구로 보는 관점에서 인구증가와 자원의 희소화에서 찾는 관점까지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가트(Azar Gat)는 맬서스(Malthus)의 법칙을 원용해서 원시전쟁의 원인을 추론하였다. 원시인들이 생존적지(safe site for existence)로 모이면서 자손이 늘어날수록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고, 경쟁이 격화되는 시점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핀란드 아보아카데미대학(Abo akademi university)의 연구진이 원시부족 21개 집단의 폭력적 사망사건 148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쟁으로 숨진 사망자는 극소수였고 다수가 이성관계와 재산을 둘러싼 사적인 문제로 살해되었다(Science, 2013.7).

 

이 조사의 결과는 인류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업정착사회로 발전하면서 원시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가설에 부합하지만, 인구증가와 자원의 희소성이 필연적으로 전쟁을 초래한다는 확증은 없다. 또한 원시인들이 지휘명령체계도 없이 휘두른 칼질을 전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Harry Turney-High, Primitive War).

 

대략 6만년 전부터 1만 5천년 전까지 지상의 지배자가 되기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의 최초의 전쟁에 대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전쟁의 기원에 관련된 유적을 발굴하면서 얼마나 오래 전에 전쟁이 시작되었는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전쟁을 찾으려는 과학적 노력들은 최초의 전쟁이 어떤 1인이나 특정한 집단에서 시작되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대대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가설을 부정하였다. 최초의 살인으로 전쟁의 원조가 된 카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동수단이 제한적인 원시시대에 대륙간 이동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의 원시인 유골에서 창·곤봉·칼에 의한 상흔과 전투용 방어시설이 발견된 것은 원시전쟁이 우연하고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는 가설에 부합한다.

 

 

 

지금은 수단에 속하는 누비아(Nubia) 사막의 제벨 사하바(Jebel sahaba)에서 발굴된 유적은 기원전 11,000년에 발생한 집단살상 및 매장의 흔적으로 추정되었다. 전체 59명의 유해 중에서 24명의 유골에서 돌로 만든 화살촉과 비슷한 물체들이 여러 개씩 박혀 있었고,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다수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는 기원전 8천년~4천년, 이라크 북부는 기원전 6500년~4500년, 서유럽은 기원전 4300년, 북미는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원시전쟁을 암시하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리고(Jerich)와 페니키아의 비블로스(Byblos)에 성벽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7500년~6000년으로, 중국 양사오(Yangshao)에서 발견된 방어진지는 기원전 5000년~3000년으로 추정되었다.

 

 

적어도 5천년 전에는 지상에 전쟁이 존재했다고 확신할만한 증거들이 발견되었다(Jack S. Levy & William R. Thompson, Arc of war : origins, escalation, and transformation). 페릴(Arther Ferrill)은 기원전 1만 2천년~8천년에 활, 물맷돌(slings), 철퇴, 단도 등이 등장하면서 원시인들의 전쟁기술이 혁명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 룽산(Longshan)의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2600년 즈음에 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기원전 1000년까지 북미대륙의 남서부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동부는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요새와 전쟁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원시전쟁의 유물·유적이 대륙마다 서로 다른 시점으로 나타난 것은 DNA의 차이에서 비롯된 기질적 특성, 주변 환경의 차이, 사회화과정 및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전쟁의 시점이 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전쟁의 기원에서 정착농민과 유목민의 특화 및 분화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농경정착민과 유목민이 하나의 공동체에서 분업하는 협력체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분화 및 격리됨으로써 쌍방의 자원희소성으로 인한 물물거래와 약탈전쟁의 가능성이 커졌다.

 

반면에 청동기 시대의 초기에 덴마크 지역에서 발생한 소떼분쟁(cattle raiding)은 영토가 아니라 가축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족장들은 땅을 넓히는 것보다 가축을 획득하려고 분쟁을 벌였다. 유목민의 전쟁은 인구증가의 압력이 아니라 인구감소에서도 계속되었다.

 

안정적인 조건에서 필수품을 향유하던 농경사회가 유목민들을 홀대했다면, 유목민들은 평화적으로 이익을 나누는 방법을 찾기까지 약탈을 시도했을 것이고, 정착민들이 방벽과 성곽을 높이 쌓으면서 유목민과의 격리가 심화되었을 것이다.

 

전쟁이 빈발하면서 농경사회에서 정치적 수완가들(political entrepreneurs)이 세력권을 형성하고 인구증가 및 인구밀도의 상승과 함께 정치적 조직이 발달하게 되었다. 여러 씨족과 부족이 통합 혹은 복속되는 과정에서 인구는 더욱 증가하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자원부족과 환경적 압박이 가중되면서 전쟁의 압력이 점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