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김재규)에서 1979년 10월 26일의 사건을 다룬 우민호 감독은 70년을 역주행해서 1909년 10월 26일의 사건을 ‘하얼삔’(안중근)으로 영화화했다.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평소 안중근 의사를 추앙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가 거사일을 10월 26일로 한 것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에서 착안했다는 설이 있다.
신아산전투의 국제적 의미
북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대한의군의 안중근 부대는 1908년에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신의산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무장력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은 대한제국이 교전국가로서 장차 1차세계대전(1914년~)과 2차세계대전(1939년~)에서 승전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국제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에서 한반도 국가는 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됨으로써 종전 이후 자주적 독립국가의 국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남북이 분할점령돼 2개의 정부가 수립되어 결국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게 된다.
또한 안중근 참모중장이 생포한 일본군을 죽이지 않고 만국공법(국제법상의 전시법)을 거론하며 살려 둔 것은 나이브한 휴머니즘의 차원이 아니라 독립군의 행위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그의 결정에 대해 동료들이 민족적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안중근(배우 현빈)은 “그들을 모두 죽이려들면 우리도 모두 죽는다.”고 일갈한다. 전시법에서 전쟁포로에 대한 규정을 둔 것도 이러한 상호주의에 입각해서 살육전의 비극을 최소화하려는 인류의 고민이 담긴 것이다.
무능한 망국의 황제로 인식되었던 고종(광무황제)은 오랫동안 역사적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모색하다 무장력의 미비로 실패했지만, 만주 일대의 무장투쟁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안중근의 10.26 거사에도 고종의 시종무관을 지낸 정재관이 관여했고, 고종의 측근이 안중근 의사의 구명과 변호를 위해 앞장섰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의 왕비였던 명성황후(민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무라이 난동의 배후였다는 점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영화 ‘하얼빈’이 안중근 의사와 동행한 인물들을 부각한 것도 당시 몰락했던 한반도 국가의 다양한 독립세력이 ‘늑대의 우두머리’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결집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링컨의 길, 간디의 길, 안중근의 길, 만델라의 길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전쟁과 같은 폭력적 행위를 감수하거나 비폭력적 투쟁을 고수했다.
링컨은 흑인노예들의 해방을 무력으로 저지하려는 세력에 맞서 내전을 불사했다. 간디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비폭력을 고수했다.
안중근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살육을 피하고 침략세력의 우두머리 한 명을 척결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하고, 일벌백계의 경종을 세계에 울리고자 했다.
촉박한 사형집행 일자로 인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안 의사는 사법절차를 연장하여 집필의 시간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나 모친인 조 마리아 여사가 그러한 방식이 오해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자 단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핵심요체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상호 존중과 공존에 기초한 동북아 평화체제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북유럽 일대의 집단안보체제도 서로 주권을 존중하면서 공동의 안보를 지향한다.
만델라는 흑백분리(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다 투옥돼 최장기수로 생환했지만, 백인과 부역세력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상호 공존의 방안을 모색했다.
토마스의 절대고독과 마리아
몸에 북두칠성과 같은 점을 갖고 태어나 응칠(應七)으로 불리웠던 안중근 의사의 짧은 일생에는 어머니 조성칠(세례명 마리아)의 신앙과 세계관이 투영돼 있다. 조 마리아 여사의 행적에는 ‘나라의 수치를 크게 씻으라’고 독려했던 충무공 이순신의 어머니(초계 변씨)와 같이 대의명분을 위해 일족의 안위를 뒤로 했던 한반도 어머니들의 기백이 면면히 흐른다. 조 마리아 여사는 안 의사의 사형 이후 17년이 지난 시점에 중국 상하이에서 별세했고, 광복 이후 국가훈장이 추서됐다.
충무공 이순신과 안중근 의사는 한반도 국가와 한반도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고자 절대고독의 경지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 절대고독을 커다란 산처럼 받쳐준 것은 어머니 초계 변씨와 조 마리아 여사였다.
안 의사의 세례명 토마스는 구한말의 가차문자에 의해 도마로 불리기도 했다. 토마스는 역사적으로 풍운아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성직자였지만 ‘유토피아’라는 풍자적 작품을 남긴 토마스 모어는 단두대에서 처형돼 가톨릭 성자의 반열에 올랐고, 근대의 세계시민주의자였던 토마스 페인은 혁명적 통찰력으로 현대 민주주의에 요긴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국내에서는 안중근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례명이 토마스였다.
이토 히로부미 일당과 안중근 단지동맹의 일대 결전을 다룬 영화 ‘하얼빈’의 기저에는 지금도 유효한 ‘대동아공영권 대 동양평화론’의 대립구도가 담겨 있다.
“카레이 우라.”(코리아 만세)
29세 안중근 의사의 외침에는 한반도 국가의 지정학적 운명에 대한 코리아 민족의 분노와 역사적 대결정신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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