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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원작 영화 '채식주의자', 14년만에 10월 17일 재개봉

twinkoreas studycamp 2024. 10. 14. 21:05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영화화한 작품이 1017일부터 CGV 용산아이파크몰 등 전국 45개 극장에서 재상영된다.

 

배우 채민서가 '영혜' 역을 맡아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채식주의자2010년 2월에 개봉한 영화로 당시에는 관객 3,500여명에 그쳤으나, 원작자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무려 14년 후에 다시 극장가에 돌아오는 괴력을 발휘했다. '채식주의자'의 귀환이다.

 

(CJ CGV)

 

 

한강이 원작자인 또 다른 작품으로 박소연이 주연을 맡은 영화 흉터’(2011년 개봉)13년만에 17일부터 재개봉된다. 두 영화는 수억원대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독립영화로 당시에는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던 잊혀진 영화이지만 제작 및 배급사인 CJ CGV는 원작자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하여 재개봉을 결정했다.

 

흉터채식주의자의 시발점이 되었던 단편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에 수록된 아기부처를 영화로 만들면서 제목을 달리한 작품이다.

 

(CJ CGV)

 

 

 

지난 십수년 지속된 ‘K-컬처 시즌 1’의 화려한 대미 장식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지난 몇 년 동안 기생충-오징어게임-BTS-블랙핑크-임윤찬 등으로 이어진 ‘K-컬처 시즌 1’의 대미이자 Kㅡ문학 세계화의 서막을 여는 기념비다.
 
부친인 한승원 작가가 딸의 이름을 강(江)이라고 지은 뜻이 발현된 것인지 몰라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벨평화상(김대중)에 이어 노벨문학상(한강)은 앞으로 과학, 의학, 경제학 등에서도 파천황이 기대된다.
 
 

 
 
 
한 작가가 맨부커상(인터내셔널)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어로 쓰여진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적절하게 전달한 젊은 영국인 번역작가의 숨은 공로가 적지 않다. 그동안 한국 작가 중에서 최초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대표적 문학상들을 차례로 수상한 것은 노벨문학상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엄숙한 대지, 괴로워하는 대지에 내 가슴을 맡기고, 신성한 밤이면 숙명의 무거운 짐을 진 이 대지를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두려움 없이 사랑하며, 그의 수수께끼를 단 하나도 경멸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노라. 그리하여 나는 죽음의 끈으로 대지의 품에 들었노라.”
 
김은국(Richard. E. Kim 1932~2009) 작가가 ‘순교자(The Martyred)'의 책 앞장에 인용한 휠더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의 일부다.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된 ‘The Martyred’는 한국태생 작가 중에서 그들의 언어로(!) 사실상 최초로 그들의 세계에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준 작품이다. 김은국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최초의 한국인이자 미국인이었고, 그는 미국의 고즈녘한 곳에서 잠들었다.
 
그는 언어적으로 미국인이었다는 점이 세계를 상대로 하는 작가로서 큰 강점이었다. 그는 The Martyred라는 단어에 담긴 영어권의 생각들과 뉘앙스들을 우리 말로 순교자로밖에 번역할 수 없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에서 한국전쟁 당시 목사들의 순교에 담긴 충격적 반전을 암시하기에는 그래도 가장 적합한 단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게 된다.

 

 

"한강의 홍수인가?" (경향 만평)

 

 

 

 

미래세대가 이끌어 갈 'K-문학 세계화'의 서막인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김은국 작가를 떠올리게 한 것은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한국 문학과 한국 작가들이 영어로 대표되는 외부세계의 언어적 장벽을 넘지 못하고, 이에 따라 특유의 작품성과 한국어에 담긴 미묘한 정서들을 전달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안개다.” 시 같은 소설집 ‘흰’(The Elegy of Whiteness)의 ‘흰 개’에 나오는 구절이다, 로맹 가리의 ‘흰 개’는 흑인만 보면 물어뜯으려고 하는데, 한강의 ‘흰 개’는 짖지 않는다.
 
‘흰’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영어단어를 찾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외국인들은 한강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Vegetarian'으로 기억한다. 똑같은 뜻을 담은 단어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세계가 다르면 뉘앙스도 달라지게 마련인데, 언젠가부터 한국어는 영어의 그런 장벽들을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었다. 비단 번역가와 번역기의 공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컴퓨터 대신 손으로 썼다. 손가락의 관절들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 후에 한 작가는 볼펜을 거꾸로 잡고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는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가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의 변주라고 한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영혜는 ‘몽고반점’과 ‘나무불꽃’에도 나온다. 영혜의 언니와 형부도 마찬가지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의 관점이 두드러지고,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의 관점이 두드러지고, ‘나무불꽃’은 영혜의 언니의 관점이 두드러진다.
 
세 편의 중편소설은 저 마다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전혀 다른 이야기(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되는 연작소설이자 하나의 장편소설로 재구성된다. 몽고반점에서는 마지막 부분에 ‘영혜’라는 말이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반전의 충격과 묘미를 선사한다.
 
자신이 식물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자신은 나무가 되어 대지 위에 푸르르게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 채식주의자는 염세(厭世)를 담은 듯하고, 지구 온난화시대에 세계의 보편적 요구가 담겨 있는 듯하고, 모든 작품은 자전적 요소가 투영된다고 했으니 어릴 적부터 꽁꽁 숨겨둔 작가의 꿈일지도 모른다.
 
한 작가는 어릴 적에 자기 방에서 오랜 시간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잦아 처음에는 엄마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나중에는 엄마가 “혹시나?” 하고 문을 열어볼 정도로 오랜 침묵이 이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눈을 초롱초롱 뜬 채로 “생각(공상)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은 어릴 적부터 생각(공상)하는 힘, 사유의 힘에서 나온 치밀한 구성력에서 비롯된 듯하다. 상상이든, 공상이든 사유의 능력과 연관된다. 물론 망상은 사유의 무능에서 비롯된 '생각 없음'과 상통한다.  
 
한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놀랍고 반가운 것은 그녀의 조용한 성품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떠들썩한 것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작품만 쓰다 죽을 것 같은 작가의 자세와 기백은 노벨상을 더욱 영예롭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