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구조와 체제의 이질성에 북핵문제까지 겹쳐 매우 난해한 처지에 놓인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데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은 기존의 통일지상주의를 탈피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는데서 중요하다.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초한 통일의 염원은 역설적으로 남과 북이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헌법(대한민국)과 당 규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는 반국적 국가주의(half country statism)로 귀결되었다.
한반도 국가의 복수화(pluralization)는 분단과 냉전,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사회주의(집단주의)의 대립, 주변 강국의 지정학적 이해 등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 ‘국가의 문제’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평화로운 계약에 의한 성립보다는 전쟁을 통해서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본성이 투영된 국가는 개별적 인간의 이기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이기심으로 타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개별적 인간은 국가가 자신을 보호하고 대변해 주기를 바라는 차원을 넘어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통찰하였다.
이러한 자발성은 근대국가는 물론이고 고대국가와 중세봉건국가에서도 통시적으로 관찰되는데, 때론 자발적인 복종으로 때론 초인적인 헌신으로 미화된다. 또한 세계의 영웅들은 대부분 민족과 국가를 무대로 하여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또한 영웅들의 서사에는 흔히 종교적, 이념적 대의명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현대의 국가는 과거처럼 이념이나 종교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계의 국가들은 이념과 종교의 강력한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자기목적화된 관료집단에 기초한 국가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등장했던 사회주의체제, 이슬람체제조차 흔히 국가사회주의, 이슬람신정국가로 불리는 까닭이다. 현존하는 국가들은 어떤 성격과 유형이든 나름대로 독특한 국가주의를 담지하고 있다. 물론 EU와 같이 과거의 국가주의를 일정한 수준에서 탈피한 통합주의적 경향도 존재하지만.
개인에게 미치는 국가의 압도적 규정력을 고려할 때 개인과 국가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덧 없는 결론에 이르기 마련이지만, 국가에 대한 성찰을 멈추면 어떤 재앙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히틀러의 국가, 스탈린의 국가는 인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했다. 또한 한반도에서 70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도 국가와 전쟁, 전쟁과 인간본성, 체제와 개인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비껴갈 수 없다.
국가에 대한 논변은 장구한 역사에 걸쳐 지속되어 왔고, 수많은 관점과 이론이 존재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세계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보다 광범하고 심원한 이해를 갖는 것은 세계와 한반도에 대한 분별력 있는 사유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최근에 출간한 <국가의 딜레마>(홍일립 저)는 한반도 국가에 대한 논의에 유익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저자는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모델을 자임하는 미국의 헌법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소개하면서 국가의 기원, 변천, 국가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반격, 국가와 민주주의, 국민(인민)과 국가, 인치와 법치의 문제를 간결하면서도 심원하게 톺아보았다.
미국 헌법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리산더 스푸너(Lysander Spooner)는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들이 만든 미국 헌법은 절대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 권위와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 헌법을 작성한 것은 55명의 인간과 하나의 유령”(Dave Palmer)이라는 주장이 극소수의 엘리트들이 미국인들에게 헌법 준수의 의무를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논거로 인용되는 까닭이다.
각국에서 헌법제정 및 개정의 절차에서 국민투표 절차를 거치면서 이러한 주장의 파괴력은 둔화되었지만, 1987년에 개정한 대한민국의 헌법은 당시 투표권 연령 이하의 국민들에게서 동의를 얻은 것은 아니다. 당시에 20세 이하와 1987년 이후에 태어난 33세 이하 인구가 전체 국민의 30% 수준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21세기 한국에서 적어도 1천만명 이상의 인구는 33년 전에 국회를 통과한 개정헌법에 대해 아무런 동의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조건 준수하는 의무만 부여된 셈이다.
헌법은 향후 한반도 국가에 관한 문제에서도 핵심적인 지위를 갖기 때문에 국가와 헌법에 대한 논의는 한국적 현실에서 고담준론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재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앞으로 <국가의 딜레마>에서 재발굴하고 재조명한 국가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국가와 개인, 국가와 전쟁, 국가와 인간본성, 한반도 국가의 문제를 찬찬히 톺아보기로 한다. 저자는 각 장의 흐름을 국가에 관한 사유와 논의를 위한 문제제기로 적절히 안배하였다.
국가는 정당한 조직인가?(미국 헌법의 기초) - 국가의 ‘비천한’ 기원(오펜하이머의 늑대국가론) - 국가라는 괴물(피히테와 르낭, 히틀러와 일왕) - 반국가주의자들(고드윈의 국가무용론, 스푸너의 ‘강도국가’, 톨스토이의 ‘폭력국가’, 마르크스 대 바쿠닌, 소로의 시민불복종) - 민주주의는 희망의 언어인가?(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 슘페터의 현실주의) - 국민은 국가의 주인인가?(르봉과 타르드의 군중, 미헬스와 미제스, 관료제).. 저자는 결론적으로 ‘국가의 딜레마’를 직시하고 끊임 없는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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