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국가의 딜레마

국가의 딜레마와 인간본성

twinkoreas studycamp 2021. 3. 9. 12:01

유럽의 전간기(interwar period : 1918년 11월 11일~1939년 9월 1일)에 등장한 성찰적인 사상가 및 이론가들은 전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였다.

 

간빙기(interglacial period : 1만1천7백년 전 ~ 현재)에 인류가 문명을 꽃피우고 있지만, 영화 ‘설국열차’에서 보여주듯 빙하기가 다시 도래하면 인류는 전지구적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전쟁은 각종 산업과 의료가 발달하는 전화위복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인류는 간빙기와 전간기의 '평화의 시기'에 번영을 누렸다.

 

‘국가의 딜레마’(홍일립 저)에서는 국가의 비천한 기원이 인간의 본성과 결부돼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굼플로비츠(Ludwig Gumplowicz)는 인간 무리 간의 종족투쟁과 전쟁이 국가탄생의 시발점으로 보았다. 한 종족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Franz Oppenheimer)는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서 국가의 목적을 패배한 집단에 대한 지배를 법으로 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국가의 탄생과 관련해서 오펜하이머는 원시국가를 늑대의 한 무리가 다른 무리를 습격하듯이 전쟁에 의한 약탈의 산물로 이해하였고, 결론적으로 원시국가에서 법치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경제적 부를 착취하는 정치수단의 제도화로 규정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논의를 고려하여 다윈을 호출하였다. 다윈은 ‘털 없는 원숭이’(엄밀히 말하면 일부 털이 남아 있지만)로서 인간이 갖는 비천한 기원에 대해서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비위를 상하게 할지라도 눈을 감고 못 본 체하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이라고 했다.

 

 

찰스 다윈(위키피디아)

 

저자는 다윈의 논증을 국가의 발생에 관한 추론으로 확장하여 국가 또한 비천한 기원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직시할 것을 권한다. 다윈이 인류의 고결한 습성이 점점 강해져서 인간의 충동으로 인한 투쟁이 잦아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처럼, 저자는 사실에 기초한 과학적·지적 정직성으로 국가를 바라봄으로써 국가에 대한 허상을 깨고 진정한 이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다윈이 논증한 인간의 비천한 기원에 비추어 전쟁의 뿌리는 인간본성에서 제거할 수 없는 유전자인가? 국가의 정치적 갈등은 인간본성에서 기인하는가?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렇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악에 대한 잠재성이 있고, 인류가 과학을 발전시키고 사회의 통제를 강화하면서 그러한 악이 미치는 범위가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다윈의 소망과는 달리 유럽의 양차대전은 평범한 인간들의 본성에 숨겨진 악마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라인홀드 니버(위키피디아)

 

니버는 애국심이 개인으로 하여금 이기심에서 탈피하여 자국 중심주의(national egoism)로 변형시키는 역설이 나타난다고 갈파하였다(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그는 전쟁의 뿌리가 인간의 자기애(narcissism)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고, 인간의 원죄를 스스로 피조물임을 깨닫지 못하는 지적 교만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지적 교만은 권력의 교만에 비해 승화된 것이지만, 때로는 권력의 교만보다 더 폭력적이고 권력의 교만 속에 깊숙히 자리한다.

 

지적 교만은 인간정신의 유한성에 대한 무지이고, 자기이익의 오염과 지식의 조건화된 특성을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에서 나온다. 만약 전쟁이 인간의 원죄에서 유래하는 숙명적인 결과라면, 권력의 교만과 지적 교만으로 인하여 피조물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니버는 국가의 자기보존 충동으로 국내 평화는 신속하게 이뤄지는 반면에 대외적으로는 불필요한 전쟁이 조장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니버는 초월적 본성을 가진 ‘빛의 아들’(Son of Light)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게 되면 인간들이 모여서 나치와 같은 사악한 정치체제로 귀결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지나친 자기확신’이 역사의 역설을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돌아보고, 인간이 스스로의 피조성(creatureliness)을 망각하고 자신을 역사와 자연의 주체로 생각하면서 자기애와 자기이익을 앞세우는 가운데 자만의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순전히 자발성으로 인류의 거대한 협동이 이뤄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니버는 성서에 나오는 빛의 아들(Son of Light)과 어둠의 아들(Son of Darkness)에 대한 이야기를 현실에 투영해서, 인간이 자신의 생존욕구에 대하여 희생을 선택하는 것을 ‘빛의 아들’의 최고형태로 보았고, 인간이 자신의 생존욕구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타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어둠의 아들’의 일반적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실제 정치와 국제관계에서 양자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인 균형이 필요하다고 설파하였다(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 A Vindication of Democracy and its Traditional Defense).

 

그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적 고결성으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낙관주의자인 ‘빛의 아이들’(Children of Light)은 인간의 이기심이 갖는 힘을 간과하여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인간의 이기적 속성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적 냉소주의자인 ‘어둠의 아이들’(Children of Darkness)은 인간의 이기심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규범을 인정하지 않는다.

 

니버는 세계평화에 대한 이상주의에 대해서 특수한 힘들이 가진 영향력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고, 힘의 정치를 강조하는 현실주의에 대해서는 특수한 힘을 절대시하여 세계의 진화 가능성을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을 존재의 중심에 두고 자만과 권력의지에 빠지는 자아는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생존욕구가 권력욕구로 귀착된 인류의 역사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이상주의의 허점을 경계하였다. 또한 개인의 본성이 투영된 집단도 생존의 욕구가 존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세력강화와 팽창적 욕구를 갖게 됨으로써 사회 내부의 분쟁이나 전쟁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속한 국가와 타국이 대립할 때, 자신의 이익을 국가가 대변하고 확장해 줄 것을 바라고 자신의 이기성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민족주의·애국주의)은 자기애를 넘어서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를 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국가에 대한 복종은 내적인 계급투쟁보다 외적인 분쟁을 선호하고, 따라서 사회적인 불평등·불공정·부자유는 국제분쟁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의 국가들은 개인과 가족의 범위를 넘어선 애국심을 가장 고양된 형태의 이타주의로 간주하지만, 국가는 개인들이 위임한 이기심을 전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개인들보다 더 강력한 이기적 욕구와 권력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 니버는 민주주의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을 인정하였지만, 미국이 지나친 확신으로 사려분별(prudence)의 실천지(phronesis)를 망각하면 쇠퇴를 초래하여 세계의 불안을 가져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빛의 아이들과 어둠의 아이들이 공존하는 현실세계에서 고상한 신념과 이기심의 균형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전쟁을 되풀이하는 국제관계에서 희망(이상주의)이 바보라면 공포(현실주의)는 거짓말쟁이(If hope is a fool, fear is a liar)라고 일갈하였다. 따라서 니버는 선악의 이분법에 머물지 말고 순수와 지혜의 현실적 균형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개인이 사회적 실체로서 집단 안에 존재하고, 집단의 주기적인 전쟁상태는 인간본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모겐소(Hans Morgenthau)는 국제정치의 역학이 인간본성에 기초하고, 인간본성에서 기인하는 권력투쟁이 궁극적으로 전쟁을 초래하는 근본적 원인이라고 보았다. 카(E. H. Carr)는 제2차세계대전의 원인을 전간기에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허상에 기초한 이상주의와 낙관주의가 횡행한 유럽정치의 타락에서 찾기도 했다.

 

 

국가의 깃발이 어떠한 색이든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라는 기본적 원리는 변한 적이 없으며, 그 기저에서 꿈틀대는 약탈이라는 수법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다윈의 낙관이 맞는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국가가 태동하면서 싹튼 국가주의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형태를 달리하면서 지금도 진화중이다. (국가의 딜레마, 73쪽)

 

다윈 이후 과학자들은 ‘털 없는 원숭이’에게 자연상태의 동물들과 같은 폭력적 성향을 내재하고 전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제도적 장치로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M. Diamond)는 부족사회를 자연상태로 방치하면 전쟁이 만연했을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생물학자 살바도르 루리아(Salvador E. Luria)는 폭력적 행동이 유전인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보았다. 인류학자들도 인간본성에 ‘전쟁의 DNA’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고, 전쟁이 원시사회가 아니라 문명이 발달하면서 시작되고 잔인해졌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에서 호전성과 전쟁수행의 잔인성이 유래한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현대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엇갈린다. 1986년 제25차 유네스코(UNESCO) 총회에서 채택한 세비야선언(The Seville Statement on Violence)은 인간본성과 유전자는 전쟁의 원인과 무관하다는 것을 골자로 한 다섯 가지 명제를 제기했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전쟁을 유발하는 경향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고, 전쟁은 역사적으로 문화적 산물에 가깝다(명제 1). 전쟁과 폭력적 행위가 인간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으며, 유전자는 인간의 행위적 가능성에 참여하는 것이지 스스로 산출을 결정하지 않는다(명제 2).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공격적 행위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고, 폭력은 인간의 진화적 유산에 존재하지 않으며 유전자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명제 3). 인간이 폭력적 두뇌를 가졌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고, 신경생리학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의 행동양식은 어떻게 길들여지고(conditioned) 사회화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명제 4). 전쟁이 본능이나 다른 단일한 동기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으며, 근대전쟁의 출현은 감정적이고 동기유발적인 요인의 우월성으로부터 인지적 요소의 우월성에 이르는 하나의 여정이었다(명제 5).

 

결론적으로 세비야선언에서는 인류가 생물학적 비관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전쟁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듯이 평화도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전쟁을 창안한 종(species)이 평화도 고안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니버가 인간은 ‘신의 형상’에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초월의 잠재적 능력과 자기결정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잠재력을 어떻게 발현하는가에 따라서는 사회와 정치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인간본성의 역사(홍일립 저)

 

인간 본성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필요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결여하거나 미흡하기 때문에 이기적이 되고, 이런 인간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은 피해자가 된다는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적 관점은 이성의 발전에 의해서 이러한 사회적 불의를 제거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 및 낙관주의로 귀결된다.

 

그러나 세비야선언에서 언급한 암시감응성(suggestibility)은 외부에서 들어온 암시를 마치 자신의 기억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피암시성을 말한다. 인간의 암시감응성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전달자에 의해서 정반대로 기억하거나 확신하게 만들 수 있다. 전시에는 전쟁의 주도자들이 평소라면 주저할 만한 상징조작을 거침 없이 구사한다.

 

메리엄(Charles Merriam)이 권력상황의 초석으로 규정한 미란다(Miranda)와 크레덴다(Credenda)는 암시감응성 및 상징조작과 연관된 개념이다. 메리엄은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면 국민들이 합리적·비합리적으로 권력의 행사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도록 상징조작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역사적으로 파시스트(Fascist)는 폭민(mob)의 동원을 위해서 공격대상을 설정하고, 군중이 요리조리 생각하고 행동을 주저하기 전에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적을 규정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하는 상징조작을 통해서 대규모 군중동원에 성공하였고, 단순한 신호로 군중의 극단적 행동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몇 개의 단어와 눈빛만으로 죽일 자와 살릴 자를 구분하는 상황은 비단 파시스트만이 연출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국가의 전쟁상태는 남·북의 국가주의를 강화시켰고, 항상적인 위기상황은 암시감응성과 상징조작에 의한 체제(지도자)와 대중의 일체화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암시감응성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기억전쟁’이 일정하게 성공할 수 있는 기제를 설명해준다.

 

또한 민족, 종교, 인종과 같은 복잡하고 추상적 개념이 집단 내부에서 단순하게 정형화되면 나치즘·파시즘·전체주의의 에너지가 되었고, 홀로코스트(holocaust)·제노사이드(genocide)·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초래하는 집단적 광기의 원천이 되었다.